2

성경을 읽는 안경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바른 접근법인지를 아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접근법은 잘못된 해석을 낳기 때문입니다. 교회 역사상 수많은 이단 문제와 논쟁은 그렇게 생겨난 것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렌즈-안경이 바로 세계관이고, 그 세계관에 따라 사람들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과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바라보게 하는 렌즈인 성경관에 따라서 성경 해석이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으며, 그에 따른 실천도 달라질 것입니다.  

  성경을 대하는 올바른 접근법은 있습니다. 그것을 부인하면 성경 해석에 대한 무질서와 혼돈만 남을 뿐이고, 이단과 진리를 구별할 방법은 없어집니다. 그렇다면 어떤 접근법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것일까요? 여기서는 먼저 몇 가지 접근법들을 예로 들고, 우리가 가져야 할 접근법이 무엇인지를 마지막으로 제시해보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신학자는 아니니깐, 조금 어렵더라도, “아, 이런 생각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읽으시면 됩니다.^^  

 

  1. 성경 그 너머에 숨겨진 역사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  

  인간의 이성과 과학에 대한 신뢰가 강해지면서, 성경과 신앙에 대한 불신도 싹트게 됩니다. ‘진화론’은 다들 아시죠? 과학 분야에서 다윈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파급효과를 일으킨 그 진화론은 이제 성경을 바라보는 시각도 바꿔버리게 됩니다. 다름아니라, 기독교 신앙은 아주 초기에는 단순한 하급 종교였는데, 점차 진화(?)를 거쳐서 고등종교로 발전하는 과정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은 그런 종교 진화의 산물이며, 그 흔적들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인간이 쓴 책이기에 모순도 있으며 틀린 내용도 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잘게 쪼개서, 고등비평 방법이란 것들을 사용해서 성경 너머에 숨겨진 역사를 재구성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의미를 찾습니다. 성경보다는 성경 너머의 역사에 중점을 두고 의미를 찾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는 성경의 내용들이 역사적 신뢰성을 갖는다고 보지를 않습니다. 예를 들어 모세 오경은 모세 시대에 모세가 기록한 것이 아니게 되며, 오히려 선지서 이후에 쓰여진 것이라고 봅니다. 성경 자체가 주장하는 역사적 내용들의 신뢰성이 의심스럽게 되는 것이죠. 또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도 상실하게 됩니다. 이런 관점을 갖는 이들을 종교사학파라고 지칭하며, 대표적인 인물로 벨하우젠이 있습니다.  

 

2.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다는 접근  

  이 관점은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종교사학파에 반대하여, 성경의 권위를 지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관점은 종교사학파의 주장을 어느 정도 수용하긴 합니다. 즉, 성경은 인간이 쓴 책이기에 모순이 있습니다. 종교사학파가 사용하는 비평 방법들도 어느 정도 허용합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성경은 권위를 갖습니다. 왜냐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문자로 기록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를 다 포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때문에, 사람은 계시의 증거인 성경을 대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관점에서 성경은 권위가 있으나 그 내용에 있어 오류가 없는 역사적 신뢰성을 갖지는 못합니다. 이런 관점을 가진 이들을 신정통주의자라고 지칭하며, 대표적 인물은 칼 바르트입니다.  

 

3. 성경은 공동체의 신앙고백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역사다

  이 관점은 종교사학파나 신정통주의자와는 비슷하면서 좀 다른 입장입니다. 성경의 내용들, 특히 구약의 내용들에서 신앙고백의 발전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거기서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종교사학파처럼 성경 너머의 역사적 재구성에 관심이 있지만 그것을 통해서 발견하려는 것은 공동체의 신앙고백의 전승과 그 발전과정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의미를 찾습니다.

  당연히 이 관점에서는 성경의 오류를 인정하기에 성경 내용들의 역사적 신뢰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신정통주의와 비교했을 때 성경이 갖는 권위도 낮습니다. 이 관점의 대표적 인물은 폰 라트입니다.  

 

4. 성경을 신앙공동체가 받아들인 정경으로서 해석한다

  1-3번까지의 관점들은 다 비평 방법들을 적극적으로(차이는 있으나) 수용하며, 특히 1번과 3번 관점은 성경 너머의 역사적 재구성에 관심이 크고 그 너머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이런 관점을 비판하면서 나온 것이 정경적 해석을 주장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성경 너머의 역사적 재구성을 통해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정경으로 받아들인 최종형태의 성경 본문에 집중하라고 말합니다. 모든 의미는 성경 본문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죠. 역사적 재구성에 집중해서 성경을 잘게 쪼개면 결국 성경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은 사람들을 다시금 성경 너머가 아닌 성경 본문에 초점을 맞추게 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신앙에 영향을 미치는 성경의 권위가 1번과 3번의 관점보다는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관점 또한 비평 방법 위에 서있습니다. 즉 최종 형태의 정경의 형성 과정에 대해서는 비평 방법들을 수용하는 위의 관점들과 의견이 같습니다. 즉, 성경의 모든 내용들이 역사적 신뢰성을 갖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같은 경우 제1, 2, 3 이사야로 나눠서 뒷부분을 우리가 아는 이사야가 아닌 다른 인물이 후대에 썼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 관점의 대표적 인물은 B. S. 차일즈가 있습니다.

 

5. 개혁주의 성경관

  지금까지 위에서 언급한 모든 성경관들은 성경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주장하는 내용들의 역사적 신뢰성도 떨어집니다. 신정통주의를 제외하면 성경의 권위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는 아닙니다. 신정통주의도 성경은 제한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갖죠.

  이와는 달리 개혁주의 성경관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로 고백합니다. 성경을 쓴 저자들이 사람인 것은 분명하지만,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성경의 내용들은 신뢰성이 있으며 권위를 갖습니다. 성경의 모든 부분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어 무오하다는 유기적 완전축자영감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여기서 잠깐, “이건 밑도 끝도 없는 믿음의 선언인거 아니냐, 대체 그 증거가 뭐냐?”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1-5번까지 말하는 것들은 다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들, 그 전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1-4번의 내용들도 다 각각의 완전 증명이 불가능한 전제들, 각각의 관점이 옳다는 믿음을 깔고 그것이 맞다고 각자 선언하고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성경관은 성경이 자신의 권위를 자증-스스로 증거한다고 말합니다. 성경 스스로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말하고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증거하는 성경의 목소리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개혁주의 성경관입니다. 그리고 신자로서 우리는 성경의 이런 증거가 견실하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이 관점은 성경의 내용들이 역사적 신뢰성을 갖는다는 것을 강력하게 인정합니다. 물론 성경에 담긴 역사의 기록들은 신학적 해석이 들어간 역사인 것은 분명합니다. 모든 역사적 기술은 중립적일 수 없고, 나름의 관점이 들어가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것이 그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신학적 해석이 없는 사실은 왜곡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건의 참된 의미를 보여줍니다.

 

    저는 지금 이 관점이 가장 바르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관점들 중 이 개혁주의 성경관이 가장 낫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이 관점이 성경의 목소리에 가장 귀를 기울이는 관점이기 때문입니다. 즉 스스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하고 있는 성경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개혁주의 성경관입니다. 성경을 쓴 저자의 의도에 가장 적합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하는 관점이기 때문에, 성경을 가장 잘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관점이기 때문에 바르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 외에도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들은 더 복잡하고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그리고 짐작하시겠지만 이런 관점들에 따라서 정말 다른 해석들이 나오게 됩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인 지금 그것은 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단지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성경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세요. 그러면 성경이 스스로가 무엇인지를 증거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요.  

 

  aeternitatem이 (이 블로그의 공동 운영 및 기고자입니다) 해석학 관련 글들을 쓰기에 발맞춰서 끄적여봅니다.^^ (다음 글을 올려라!!) 이 포스팅은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언제?!?) 그리고 혹시 제목이 도발적이었다면 죄송합니다 ㅋㅋ

Over de auteur

재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 17세기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의 교회론을 연구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의들, 특히 교회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Comments 2

    1. Post
      Author

      근식쌤! 반가워요^^ ㅋㅋ 설명이 잘 되었을지 모르겠네요 ㅎㅎ 그나저나 정경적 해석을 검색하시다니 멋지네요 ㅋㅋ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