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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윤리, 존중하는 대상, 읽기의 효과

 

읽는 윤리, 존중하는 대상, 읽기의 효과

어떤 행위가 바르냐 바르지 않느냐를 말한다는 것은 그 행위에 대해 도덕적/윤리적 평가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읽기에 있어서 “바른 읽기”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은 도덕적/윤리적인 질문이지요.

계몽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성경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잣대로 쪼개고 분해하며 읽는 것에 만족하는 시대가 있었습니다(지금도 있구요).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읽기”는 과거의 전통적인 구닥다리 방식으로는 얻을 수 없는 새로운 의미 제공하는 흥미진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더 흐르면서 성경 읽기를 윤리적으로 접근하는 시도들이 등장했습니다. 계몽주의적 읽기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금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방식의 읽기는 지적 쾌감은 줄 수 있겠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삶”에는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견해들이 계몽주의적 읽기를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대니얼 패트와 성경 해석의 윤리

그래서 성경 비평학자인 대니얼 패트는 자신의 책 Ethics of Biblical Interpretation에서 계몽주의적 읽기에 대해 반성합니다. 그동안 자신들의 읽기는 윤리적인 책임감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었죠. 물론 그가 계몽주의적 읽기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성경을 “읽는 것”은 윤리적으로 가치중립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는 성경을 읽을 때 사람들이 이미 갖고 있는 전제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전제가 사회에 존재하는 억압과 불평등의 구조에 영향을 받은 것일 수 있으며, 그로인해서 도출되는 “읽기”의 결과가 독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식하고 책임감을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백인 중심/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자라온 백인 남성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인종이나 다른 성에 비해 우월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성경을 읽을 때 무의식적인 “전제”로 작용해서, 남성 우월적이고 백인 우월적인 의미를 뽑아내는 읽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런 읽기는 백인 남성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더 현대 사회는 이런 폭력을 매우 부정적으로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읽기는 문제가 있는 것이죠. 읽기가 폭력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이것이 도덕적/윤리적인 행위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만 여겨졌던 “비평적 읽기”, 또는 “계몽주의적 읽기”는 이제 환상을 깨뜨리고, 자신들의 전제나 편견이 읽기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고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패트는 이것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 읽기의 윤리가 필요함을 말합니다.

하지만 패트는 독자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기 위해서 어떤 방법의 변화를 시도하더라도 한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갖는 무의식적인 전제들, 가치관들을 완전히 중립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 간에 한 사람의 읽기는 누군가에게는 억압과 폭력이라는 작용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양한 “읽기”를 수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양한 관점과 방법을 통해 읽는다면, 어떤 “읽기”가 누군가를 소외시킬 위험이 있더라도, 다른 방식의 “읽기”가 그것을 보완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주장하는 윤리적인 읽기는 다양한 차원으로 다각도의 “읽기”들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패트에게 있어서 수많은 “읽기”들은 어떤 것이 더 좋고 나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를 보완해주는 것이죠. 심지어 그는 성경 비평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읽기를 존중합니다(이 두 방식은 사실 양립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죠). 패트는 자신이 전통적인 읽기를 존중하게 되었을 때,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고 고백합니다. 물론 전통적인 읽기야 말로 참되다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죠. 수많은 읽기들 중 하나로서 받아들인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패트에게 있어서 윤리적인 성경 읽기는 끊임없는 “나선 순환”과도 같습니다. 완벽하게 모두를 소외시키지 않는 읽기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보완해나갈수 있도록 다차원의 읽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패트가 주장하는 올바른 성경 읽기는 독자에게 억압과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읽기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차원의 읽기가 서로를 존중하도록 하는 것이죠. 이것은 어떤 절대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방식의 읽기가 아닙니다.

이러한 주장은 패트에게서만 독창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패트는 읽는 행위, 즉 의미를 도출하는 해석 작업에 어떤 절대적인 규범의 틀을 제시했을 때 그것이 미칠 폭력성을 우려합니다. 그런데 절대적인 틀이 주는 폭력에 저항하는 것은 해체주의 윤리학의 특징입니다. 케빈 벤후저는 해체주의 윤리학에 대해 이렇게 언급합니다.1

소극적으로 볼 때, 해체주의 윤리학은 해석의 전체화 논리와 해석의 종결을 거부하는 문제다. 그러나 이러한 무위화가 이루어진 후에는 무엇이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 적극적으로 말해서, 해체주의 윤리학은 ’타자성’을 존중하고, 타자-무엇이든지 나 자신이 아닌 것-를 나의 사고방식과 행위 방식으로 흡수해 버리기를 거부하는 문제다.

우리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포스트모던 시대의 윤리의 특징은 절대적인 틀이 가하는 억압이나 폭력에 대한 거부감과 저항입니다. 이것이 “읽기”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하나의 올바른 읽기 방법이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폭력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패트와 같은 경우 다양한 읽기 방법을 수용하자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가 주장하는 성경 읽기의 윤리에는 이런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고 방식, 즉 해체주의 윤리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트만의 생각은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을 “포스트모던적인 읽기의 윤리”라고 명명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적인 읽기의 윤리”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어떻게 성경을 읽는 것이 덕스러운 것인지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살펴보고 평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독자를 존중하는 읽기의 윤리, 저자의 죽음

포스트모던적인 읽기의 윤리가 갖는 첫 번째 특징은 “독자에 대한 존중”입니다. 즉 이들이 읽기의 윤리를 말할 때 주된 고려 대상은 다름아닌 “독자”라는 것이죠.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는 이렇게 말합니다.2

성경 텍스트의 언어는 그 성경 텍스트가 바라보는 세계에 굴복하는 독자들에게 “무엇을” 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성경 텍스트들을 주의 깊게 읽는 것과 그들의 역사적 세계들과 그것들이 상징하는 영역들을 적합하게 재구성하는 것은 신앙 있는 성경 공동체에게 오늘날 말씀의 권위를 주장하는 성경 텍스트들이 어떻게 종교적인 기능을 하는지에 대한 신학적인 논의에 의해 보완될 필요가 있다.

피오렌자가 하고 싶은 말은, 성경을 읽을 때 그것이 독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보기에 “있는 그대로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가 있는 읽기입니다. 왜냐하면 피오렌자에게 있어서 성경 텍스트는 주로 남성 중심적으로 쓰인 책이기 때문이죠. 가부장적으로 쓰인 성경은 그것을 읽는 독자들에게 “가부장적인 폭력과 억압”이라는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미칠 영향력을 생각하고 잘 걸러내는 윤리적인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앤서니 티슬턴은 피오렌자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그녀는 자신의 탈가부장화 하는 접근법을 위해서 해방신학적 해석학을 도입한다.”라고 말합니다.3 이렇게 피오렌자는 성경을 읽는 것이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고 그것이 억압과 폭력이 되지 않도록 하는 윤리적인 읽기를 추구합니다.

패트나 피오렌자에게서 볼 수 있듯이 포스터모던적인 읽기의 윤리는 이렇게 독자에게 억압과 폭력이 가지 않도록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즉 주된 윤리의 고려 대상은 바로 “독자”입니다. 우리가 윤리라는 것을 말할 때, 보통 그것은 인격적인 대상 간에서 논의될 수 있는 개념입니다.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에 대고 욕을 한다고 해서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읽기의 윤리를 말할 때도 인격적인 대상을 두고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포스트모던적인 성경 읽기의 윤리는 독자를 그 주된 대상으로 둔다는 것입니다. 벤후저는 이들이 독자에 대한 윤리를 강조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란 현대 해석학이 “저자는 죽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저자가 죽었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이것은 저자가 글을 다 쓴 순간부터 그 글은 저자의 손을 떠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더 이상 저자는 글의 의미에 어떤 관여나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글을 읽고 의미를 파악하는 것에 있어서 더 이상 저자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저자가 글에서 정확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현대 해석학에 있어서 권위주의적인 억압에 불과합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이런 억압이나 폭력은 경계 대상입니다. 벤후저는 이와 관련하여 현대 문학 이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4

기이한 운명의 역전으로, 오늘날의 문학 이론은 저자를 텍스트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텍스트의 효과로 보고 있다. 의미의 안정적 원리에 대한 로고스중심주의적 개념은 형이상학적 허세로 폭로되었다. 그러나 텍스트 의미의 주인으로서 저자라는 개념은 형이상학적 오류 이상의 것이었다. 어떤 비평가들은 저자 개념이 어떤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는 억압적인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비평가들에게 있어서는, 텍스트를 살리고 독자를 해방시키기 위해 저자는 죽어야만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문학 이론에 있어서 저자는 형이상학적 허구에 불과합니다. 더 나아가 약자들을 억압하는데 사용되는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쓴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전통적인 주장은 이들에게 정치적이고 권력의 냄새가 짙게 배인 말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읽기에 있어서 저자를 배제시키면 이제 글의 의미 파악을 하는데 있어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사라지게 됩니다. 벤후저는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의 의도’와 논리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5  우리가 어디서든 일련의 배열된 기호들을 보게 된다고 가정했을 때, 그 기호들을 누군가가 배열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기호들이 의미를 갖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길가에 돌맹이들이 “사랑”이라는 글자 형태로 배열이 되어있는 것을 봤을 때, 자연스럽게 우리는 누군가가 이것을 사랑이라는 글자로 배열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배열한 누군가를 거부해버리면, 이제 의미 부여는 독자의 마음에 달린 것이 됩니다. 이렇게 저자가 거부되면 글의 의미를 결정할 수 있는 권위적인 제약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글 자체가 정말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한 관심도 희미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글을 읽을 때 그것이 정말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저자가 의도한 ’고정된 의미’를 발견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자를 의미 파악에서 제외시켜버린다면 이제 모든 것은 독자의 몫이 됩니다.

그러므로 현대 해석학에서 글을 읽을 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저자도 아니고, 글 자체, 즉 텍스트도 아닙니다. 관심의 대상은 바로 독자입니다. 그들이 성경 읽기의 윤리를 말할 때 존중하는 대상은 바로 독자인 것이죠.

 

읽기의 효과를 고려하는 윤리

포스트모던적인 읽기의 윤리가 갖는 두 번째 특징은 읽기가 독자에게 미치는 효과와 영향력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독자를 존중하는 읽기의 윤리와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독자를 존중하기 때문에 읽는 행위가 독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살펴봐야 하는 것이죠. 독자에게 적절하고 좋은 영향을 미쳐야 그 읽기는 윤리적인 것이 됩니다. 그래서 벤후저는 이렇게 말합니다.6

비평가들도 독자들도 모두 윤리적인 해석을 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으로, 비평가들은 자신이 동시대적 상황에 대하여 그리고 사회에 대한 텍스트의 영향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윤리적이라고 주장한다.

읽기가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력과 효과가 억압과 폭력으로 나타나면 윤리적으로 실패한 읽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독자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읽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 좋은 영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억압과 폭력을 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일단 거부됩니다. ’좋은 영향을 주는 읽기가 되어야 한다’는 읽기의 윤리는 글을 읽을 때 의미를 도출하는 해석 작업의 전제가 됩니다. 그 전제를 가지고 패트는 다차원적인 읽기를 수용하는 방법을 제시하게 만들었고, 피오렌자에게 있어서는 성경의 가부장적이고 남성적인 요소들을 걸러내도록 만들었습니다.

 

평가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포스트모던적인 읽기의 윤리는 독자를 존중하고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윤리는 어떤 문제점이 있을까요? 그것은 이들이 ‘독자만’ 존중하고 ‘독자에게만’ 윤리적 책임을 가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이들은 저자를 죽었다고 여기고, 저자를 배제시킵니다. 내가 어떤 말을 했을 때 누군가가 그 말을 내 의도와 전혀 다르게 왜곡해서 이해하고 마음대로 생각해버리면 기분도 나쁠 뿐더러 그 일의 중요성에 따라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어떤 말을 하든 간에 저자와 저자의 의도를 배제하고 독자만 존중하는 것은 저자에 대한 억압이자 폭력입니다. 읽기가 독자들에게 억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려는 윤리가 오히려 저자에 대한 폭력으로 변질되는 것이며, 단지 폭력의 대상이 독자에서 저자로 바뀌어 버린 것이죠. 좀 더 생각해보면 다른 모든 책의 저자들은 실제로 ‘죽었기 때문에’ 윤리적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성경을 읽을 때 저자를 배제시키는 것은 살아있는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배제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윤리적으로 공정하지 못합니다. 물론 성경의 저자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요.

게다가 이런 윤리는 독자들에게 정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사실 이런 접근은 결국 의미 도출에 있어서 혼돈과 의미 없는 관용을 낳을 뿐입니다. ’좋은 영향’을 미치는 읽기가 무엇인지 어떻게 정할 수 있을까요? 패트가 말하는 것처럼 결국 어떤 해석을 추구하는 읽기든 간에 누군가에는 억압과 폭력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결국 지극히 상대적인 대답 밖에 할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윌리엄 슈바이커는 패트의 주장이 “텅 빈 텍스트와 공허한 도덕적 호소”만을 남길 뿐이며 “의미를 창조하는 것에 대한 이 찬가는 희망 없는 모호한 도덕적 아젠다와 그리고 ’타자’와 정의에 헌신하는 것에 대한 몹시 비관적인 믿음으로 끝맺게 된다.”고 평가합니다.7 어떻게 보면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독자를 위한 윤리를 추구하지만 결국 모호한 배려와 공허한 영향 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이죠.

물론 이런 시도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들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읽기가 그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중요합니다. 읽는 것이 단순히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독자에게 미치는 효과를 고려하려는 윤리적 질문들은 성경을 읽을 때 고려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어떤 효과를 가져와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이죠. 독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쳐야 바른 읽기인지를 고려할 필요는 분명 있습니다. 또한 읽기의 한계, 즉 한 사람이 성경에서 의미를 도출하는 작업의 한계를 인식한 것도 주목해야 합니다. 패트가 말했듯이 사람은 한계가 있기에 완벽한 해석이란 없습니다. 그에 대한 대처가 다르더라도 이런 문제 인식은 성경을 읽는 것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모습들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기독교 전통에 눈을 돌려보겠습니다. 포스트모던적인 읽기의 윤리가 갖는 문제점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기독교 전통에 있을까요? 그리고 이들이 독자에게 미치는 효과를 고려하고 읽기의 한계 또한 인식하는 모습이 기독교 전통에는 나타날까요? 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읽기의 미덕을 살펴보겠습니다.

 

* 덧글. 참고로 여기서 ‘읽기’는 ‘해석’으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해석이라고 말하면 너무 학문적인 논의가 될 거 같아서 읽기라고 썼습니다. 물론 이 포스팅은 학문적일 수 있지만, 좀 더 실천적인 내용을 이끌어내고 싶어서 ‘읽기’를 말해보려 합니다.

 


 

참고문헌

1: Kevin J. Vanhoozer, 『이 텍스트에 의미가 있는가』, 297.

2: Elisabeth Schüssler Piorenza, “The Ethics of Interpretation: Descentering Biblical Scholarship,” 15.

3: Anthony C. Thiselton, 『성경해석학 개론』, 436.

4: Kevin J. Vanhoozer, 『이 텍스트에 의미가 있는가』, 109.

5: Kevin J. Vanhoozer, 『이 텍스트에 의미가 있는가』, 171.

6: Kevin J. Vanhoozer, 『이 텍스트에 의미가 있는가』, 595.

7: William Schweiker, Journal of Religion 76, 357.

Over de auteur

재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 17세기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의 교회론을 연구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의들, 특히 교회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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