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편: 현실의 노래

요즘 K팝스타를 꼭꼭 챙겨보고 있습니다. 저는 TV를 잘 보지 않는 편이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을 챙겨보는 이유가 뭘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중 하나는 음악이, 노래가 우리 삶의 단편들 속에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슬픔을 노래하더라도 그 슬픔 속에 담겨 있는 비장하거나 숭고한 아름다움을 드러내줍니다. 그리고 그 노래가 우리 마음에 와닿을 때 우리는 자신의 삶 속에 경험되어왔으나 잊고 있었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노래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분명 어떤 노래들은 우리의 실존을 마주보게 하고 동시에 보지 못했던 곳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주 오래 전부터 불려왔던 노래들-시편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시편을 사랑합니다. 위에서 말한 노래의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시편은 우리 현실의 삶에 가장 잘 와닿는 성경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시편의 1편과 2편은 전체 150편의 시편의 서론이라고 말합니다. 시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3편부터는 본론으로 들어간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런데 시편 3편은 매우 당황스러운 주제의 노래입니다. 왜냐하면 이 노래는 가장 처절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노래인 시편 3편은, 다윗의 일생 중 가장 절망적이고 비참한 순간 중 하나였던 때 지은 시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통곡을 하며 도망치던 그 때 지은 시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이면 이런 절망 속에서 부르는 노래가 시편의 본론에 들어서자마자 나타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시편 3편이 우리 현실에 가장 가깝기 때문입니다. 삶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 마주하는 현실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절망할 요소들은 도처에 널렸습니다. 신앙 생활은 잘 믿으면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삶을 산다는 단순한 공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말씀대로 살아가면 험난한 길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더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시편 3편은 우리에게 필요한 현실의 노래입니다. 이 시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의 노래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줍니다.

 

본문

(다윗의 시, 그가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게서 도망치는 중에 부른 노래)
3.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3.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3.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3.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3.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3.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개역개정)

 

구조와 메시지

이 노래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1. 삶과 신앙을 위협하는 현실 (1-2절)
2. 다윗의 신앙고백 (3-4절)
3. 다윗의 행동 (5-8절)

1. 1–2절은 먼저 다윗이 경험하는 현실을 노래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대적이 너무도 많다는 것에 경악합니다. 다윗이 위기에 처하자 평소에는 숨어있던 수많은 다윗의 적들이 일어나 그를 대적합니다. 1–2절에서 그리는 위기의 상황의 절정은 많은 사람들의 선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라는 말이죠. 삶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는데, 하나님은 행동하지 않고 계십니다. 다윗이 하나님이 계시는 곳인 예루살렘에서 쫓겨 도망갈 때,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수군거립니다. 그는 하나님께도 버림받았다라고 말이죠. 그러므로 다윗의 위기는 현실의 위기인 동시에 신앙의 위기였습니다.

2. 그러나 다윗은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3–4절). 다윗이 의지하고 자랑하는 것은 자신의 군대나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이셨고, 다윗의 삶 속에서 스스로가 높아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3절). 그리고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분은 성산에서 응답하신다는 믿음을 고백합니다(4절). 이 4절에서 쓰인 미완료 동사 형태는 의지를 표현하는 뉘앙스를 가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1)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그 믿음의 고백 가운데 그분께 기도할 의지를 드러내며, 또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4절에서 말하는 ’성산’은 시편 2:6에서 말하는 ’거룩한 산’으로서, 하나님이 왕을 세우시고 다스리시는 곳을 말합니다. 다윗은 거룩한 산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는 분임을 고백합니다. 사무엘하를 보면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두고 나옵니다. 그것은 자신의 구원이 언약궤 자체가 아니라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이 원하시면 언제든 자신은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을 다윗은 갖고 있었습니다.

3. 그런 신앙고백에 근거해서 다윗은 행동합니다(5–8절). 5절에서 “눕고 자고 깬다”고 할 때의 완료형 동사는 과거의 상황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가정할 때 사용하는 동작 동사로 볼 수 있는데,2) 이것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평안하게 잠을 자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잘 뿐 아니라 “깰 것”을 고백하는 것은 삶의 기대와 희망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은 믿음이 있기에 절망적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평안히 잠을 잘 것이며, 다시 일어나 새 힘을 얻어 살아갈 희망을 갖고 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는 6절에서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다윗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상황은 아직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기에 그는 간절히 기도합니다. 7절의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라는 외침은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진영이 여정을 떠날 때마다 모세가 하던 바로 그 기도입니다. 여호와께서 대적을 치시는 분이심을 확신하기에 다윗은 그렇게 기도합니다. 다윗이 이렇게 확신을 갖고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3편은 8절의 고백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 구절은 “구원은 여호와께 속했는데, 당신의 복주심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있나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시며, 그분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는 분이시라는 믿음은 다윗의 소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절망하지 않고 담대히 행동하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 하나님께로 피하는 자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시편 1, 2, 3편은 다 “복”을 말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시편 1편은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고 따르는 자의 복을 말합니다. 시편 2편은 이 세상을 심판할 왕이신 메시야를 섬기고 여호와께 피하는 자의 복을 이야기합니다. 시편 2편에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할 때 궁극적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구약에서 이것은 다윗과 다윗의 왕조를 가리킨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시편 3편은 2편이 끝나자마자 바로 등장해서, 위대한 왕 다윗 또한 여호와께 피해야 하는 자임을 보여줍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라는 고백은 그 역시 주님께 피해 하나님의 복을 누려야할 주의 백성임을 잘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는 복의 수여자이신 하나님께 피해야하는 자들입니다. 2편이 끝나자마자 3편에서 다윗이 제일 먼저 자신도 그러함을 보여줍니다.

물론 시편 1, 2편과 3편에서 말하는 “복”은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1편과 2편은 “아쉬레(אַשְׁרֵי)”, 그리고 3편에는 “베라카(בְּרָכָה)”가 사용되었습니다. 두 단어를 비교했을 때 “아쉬레”는 행복한 상태를 강조하는 반면, “베라카(두 단어를 비교했을 때의 형태는 바루크 (בָּרוּךְ) 입니다)”는 행복한 상태도 포함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자라는 것을 강조합니다.3) 그리고 성경에서 “복되다”는 말이 하나님을 수식할 때는 항상 후자가 사용되는데 그것은 “아쉬레”가 세속적인 행복도 포함하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오직 하나님만이 참으로 헛됨 없이 완전히 복된 분이라는 것을 “바루크”가 수식합니다.4) 하나님만이 복된 분이시며, 그분은 복의 수여자이십니다.

이것을 통해 생각해볼 때, 1, 2편과 3편의 단어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복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2편은 인간의 측면에서 진정으로 참된 행복의 상태가 무엇인지에 대해 변증적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3편은 완전히 복되신 분으로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이 세상이 수많은 복을 노래하지만 참된 행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으며, 메시야를 인정하고 여호와께 피하는 자만이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대표적 모본으로서 절망적인 상황에서 복을 주시는 하나님께로 피하고 있습니다.

 

현실에서 노래하기

해법이나 진단의 원인은 다르더라도, 오늘날 조국교회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은 누구든 공감할 것입니다. 게다가 교회 밖을 나가도 사회에서 마주하는 암울한 현실들은 소망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질문하게 만듭니다. 시편 3편은 이런 우리에게 이런 절망이 새로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돌아보고 고백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의지해서 간절히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영원토록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소망을 품고, 담대히 눕고 자고 다시 깰 것이며, 행동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문헌

1) 『주옹-무라오까 성서 히브리어 문법』, §113n.

2) 『주옹-무라오까 성서 히브리어 문법』, §112e.

3) NIDOTTE, “בָּרַךְ”

4) NIDOTTE, “בָּרַךְ”

Over de auteur

재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 17세기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의 교회론을 연구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의들, 특히 교회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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