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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가 읽는 성경 vs 평신도가 읽는 성경

전문가의 해석과 성경의 명료성

우리는 전문가가 많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전문가는 자신의 분야에 있어서 굉장한 권위를 가집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문가가 어떤 견해를 주장할 경우 전문지식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쉽게 수긍하지 못하더라도 사실 반박할 방법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명료성이라는 교리는 우리가 전문가의 의견이라고 해서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의 명료성이 궁금하다면 클릭!!) 전에도 잠깐 살펴봤지만, 웨인 그루뎀은 성경의 명료성에 관한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

…나는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분야에 있어 “전문가”인 사람들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라고 격려하고 싶다. 그들이 여러분을 성경 본문의 평이해보이는 의미에서 벗어나도록 이끌려 할 때 말이다.

성경의 명료성은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교리와 핵심들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에 정말 중요한 교리들은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루뎀은 쉽게 읽혀지는 해석을 버리고 어려운 해석을 추구하는 전문가들이 있다면 의심하라고 권합니다. (물론 이 진술 이후에 그루뎀이 “은사중지” 문제를 예로 들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루뎀은 은사중지론자들의 주장이 바로 “어렵게 읽는” 예라고 소개하기 때문이죠. 전 이 주제에 대한 입장을 떠나서 적절한 예는 아닌 거 같네요.

프로페셔널의 위험성

위의 말은 상당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종종 저는 성경신학자들이 너무 자신들만의 전문적인 영역에 빠져있기만 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전문가이기 때문에 어렵게 읽는 것을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고백하자면 사실 “어려운 읽기”를 통해 뭔가 심오한 것을 발견하면 우쭐한 마음이 듭니다. (물론 전 전문가가 아닙니다.) 즉 어렵게 읽는 것, 그리고 (어렵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새롭게 읽는 것은 학문적인 탁월함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기 때문에 학자들에게 굉장히 유혹적입니다. 연구란 것이 반드시 학구적이고 중립적이지만은 않습니다.

게다가 전문가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단점은 자신의 영역에만 특화되어서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안목을 갖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건 신학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전 유다서를 읽으면서 관련 주석들을 살펴봤는데, 많은 학자들이 창세기와의 연관성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유다서를 해설한다는 인상을 받고 실망했었습니다. 성경의 전체 교리가 흔들릴 수도 있는 문제인데, 유다서 주석이니까 유다서만 해설할 뿐 다른 연관성은 관심없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큰 문제입니다. 신학에 있어 전문적인 연구는 그 부분을 깊이 파더라도 다른 부분들과의 연관성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조직신학이나 역사신학 등을 항상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것이죠.

오해할 여지가 있어서 변명하자면, 전 조직신학을 좋아하지만 성경신학은 더 좋아합니다. 제게 유학갈 기회가 주어지면 전 성경신학을 전공할 마음이 더 큽니다. 또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위에서 말한 문제점을 가지고 전문가를 매도해버려서는 안됩니다. 전문가의 연구가 주는 유익은 굉장히 큽니다. 성경을 잘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것이 그분들의 연구 덕분입니다. 그리고 자기공명심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많이 있습니다. 전 그런 분들 밑에서 배울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일부러 어렵게 해석하는 실수를 조심하자는 것이죠.

이런 전문가는 비단 신학자들만을 지칭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과학자들도 자신들의 전문적인 지식으로 성경 해석에 관여합니다. 특히 창세기 같은 부분에 자신들의 과학적 지식을 많이 투영해서 읽으려는 시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평이하게 읽었을 때 얻을 수 있는 의미와 부딪치는 것이라면, 전문가라는 타이틀에 위축되지 말고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명료성이 주는 가르침입니다.

오해하면 안되는 점들

그러나 이것이 목회자가 성경을 덜 공부해도 된다는 면죄부가 되지는 않습니다. 성경의 핵심 메시지는 평이하게 읽을 때 명료하게 드러나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갔을 때 잘못된 해석을 할 여지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다보면 중요한 오류를 범할 가능성도 있죠. 말씀 맡은 자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명료성은 성경의 풍성함과 깊이를 배제하는 교리가 아닙니다. 말씀의 깊이와 풍성함을 전해줘야하는 목회자와 신학자는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원어적 지식, 주해 능력, 신학 공부는 끊임없이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절대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평이하게 읽는다는 것이 “문맥과 상관없는 내 맘대로 읽기”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책을 읽듯이, 아주 평범하게,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읽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우리가 꼭 알아야하는 중요한 교리들을 명료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주저하지 말고 읽기

전문가는 겸손하게 말씀을 연구하면서 자기 영역을 너무 과신하지 않으면 되고, 일반적인 사람들은 스스로도 성경을 공부해야겠지만 전문가를 너무 과신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믿고 의지할 최고의 권위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에 관해 『성경무오와 해석학』에서 포이트리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2]

우리는 평신도들의 성경 이해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해석이 표면상 너무나 ‘틀에 맞춘’ 것처럼 보인다 해서 그것을 거부해서는 안된다. 물론, 평신도들은 때에 따라 지나친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들의 결론이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성경 지식을 종합한 결과이기도 하다.

너무 어렵게 읽으려고 하면 하나님께 의지하는 법을 잃어버리고 읽을 수 있습니다. 때론 많은 지식없는 성도의 성경해석이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깨닫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기 때문이죠. 저도 신학교에 가고 어느 순간부터 너무 “전문적인 읽기”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항상 주석을 봐야하고, 원어 분석을 해야 할거 같고(물론 해야합니다), 역사적 배경을 연구해야 할거 같고(물론 큰 도움이 됩니다) 말이죠. 이 문제는 그래서 저의 개인적인 고민이기도 합니다. 저는 지식이 부족하긴 하지만, 꼭 주변 지식이 완전히 갖춰져야만 성경을 제대로 읽을 자격이 주어지는 건 아닌 거 같습니다. 안 그러면 옛날에 로마 가톨릭에서 성경 해석의 권한을 교회와 사제들만 가졌던 것과 다를 바 없겠죠. 속된 말로, “쫄지 말고”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톨레 레게(집어라, 읽어라).”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노랫소리를 듣고 성경을 집어들고 읽고서 회심한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그는 전문 서적들을 뒤적거리면서 성경을 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저하지 말고 성경을 집어들고 읽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평이한 읽기 속에서도 넘치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신30:11–14)

그러니까, 읽어야겠습니다. 당장요. 


  1. W. Grudem, “The Perspicuity of Scripture,” Themelios: Volume 34, No. 3, p.307.  ↩

  2. Vern Sheridan Poythress, “하나님은 인간 저자들을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Harvie M. conn(editor), 『성경무오와 해석학』, p.143–144.  ↩

Over de auteur

재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 17세기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의 교회론을 연구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의들, 특히 교회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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