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플래쉬에서 그리스도 바라보기

주의: 이 글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영화를 안 보셨고 앞으로 보실 분들은 읽지 마세요.

줄거리

이 영화는 “일반적인 음악영화들과는 다르다.”, “끝날 때까지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는 평이 많습니다. 위플래쉬는 “채찍질”을 뜻합니다. 훈훈한 감동이 담긴 여느 음악영화들과는 달리, 최고의 드러머로 인정 받기를 원하는 학생과 폭압적인 학대를 통해서 전설적인 음악가를 키워내길 원하는 선생이 만나 벌어지는 숨막히는 사건들이 전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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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실력을 가진 음악가이자 지휘자인 플래처는 자신의 밴드에 속한 학생들을 억압하고 몰아붙이기로 유명합니다. 1비트의 어긋남도 용서하지 않는 까탈스러움과 광기를 보이는 그의 눈에 들기 위해 주인공 앤드류 네이먼은 손에 피가 터지도록 연습합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플래처의 학대와 억압을 견디고 그의 요구에 맞는 실력을 갖추어 최고의 드러머가 되어 모두에게 인정받겠다는 그의 바람은 사귄지 얼마 안 된 여자친구를 스스로 차버릴 정도로 지독하게 자신을 몰아붙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모종의 사고로 음악경연을 망치게 되고, 모든 것을 잃게 된 네이먼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플래처를 폭행하고 학교에서 퇴출당합니다. 그리고 네이먼 또한 익명으로 억압과 학대를 일삼는 교사 플래처를 고소하는데 동참하여, 결국 플래처도 학교에서 쫓겨납니다. 모든 꿈을 잃어버린 네이먼은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우연히 플래처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플래처 자신의 억압적인 교육이 전설적인 음악가를 키우기 위한 노력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밴드에 들어와 공연을 도와달라는 말을 듣고 이에 수락합니다. 공연날, 공연이 시작되고나서야 네이먼은 플래처가 이미 누가 자신을 고발했는지 알고 있었으며 공연 자리는 네이먼을 음악계에서 영영 퇴출시키려는 음모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위기에 맞서 굴복하지 않고 공연을 리드하여 플래처의 인정을 받게 되는 것으로 영화는 끝 맺습니다.

 

위대함을 위한 파멸의 길

이 영화에서 선생인 플래처와 제자인 네이먼은 공통된 생각을 공유합니다. 플래처는 전설적인 음악가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극한으로 사람을 몰아붙여야 하며 이를 위한 억압과 학대는 정당화된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괜찮아. 그만하면 잘했어.”라는 격려가 음악계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이먼도 사실 그 주장과 다르지 않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최고의 드러머가 되기 위해 그는 여자친구가 방해가 된다고 여기고 헤어질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드럼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연습합니다. 밴드의 학생들도 한번의 실수가 퇴출로 이어진다는 긴장감 속에서 치열한 경쟁을 합니다.

네이먼은 결국 플래처에게 인정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이후 이들의 결말을 부정적으로 여긴다고 인터뷰에서 밝힙니다. 주인공 네이먼은 30대에 마약 중독으로 죽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견해를 밝힙니다. 즉 감독도 억압과 학대를 통해 극한으로 능력을 끌어내는 교육을 긍정적으로 보진 않습니다.

경탄할만한 음악 실력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가진 위대한 가능성입니다. 노력을 거듭해 놀라운 능력을 갖추는 인간의 가능성은 정말이지 탁월합니다. 이 가능성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그 위대함을 쟁취하기 위해 플래처와 네이먼 모두 타인을 희생시킵니다. 그릇된 욕망을 추구하고 높은 실력을 쌓아 귀를 즐겁게 하지만, 위대한 성취 뒤에 참된 안식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위대함을 얻기 위해 추구하는 길은 스스로를 파괴와 절망으로 몰고 갑니다. 위대함을 위해 달려간 그 길은 사실 파멸의 길이었습니다.

 

약간의 선을 위해 용인하는 수많은 악함들

광기어린 학대와 욕망어린 노력이 만든 음악적 뛰어남은 그들의 연주를 듣는 이들에게는 황홀함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연주, 그 자체는 선하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러나 그 약간의 선함을 위해 수많은 악이 용인되고 생산되게 된다면, 약간의 선함은 정말 아름답고 선한 것일까요.

사실 선은 그 자체로 선한 것도 있겠지만, 올바른 조화와 질서 속에 있어야 비로소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애국심’은 선한 것이지만 그 애국심이 다른 나라에 대한 잔인한 공격과 약탈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악합니다. 플래처가 그런 폭압적인 학대를 통해 전설적인 음악가를 100명을 길러낸다고 해도, 10000명의 다른 학생들이 그 교육으로 인해 삶이 망가진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약간의 선을 위한 수많은 악을 용인하고 생산하는 것이 됩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이런 모습들이 많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 사는 나라는 사실 못사는 나라를 착취하는 것을 통해 경제적 풍요를 유지합니다. 그러나 잘 사는 나라의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경제적 풍요는 ’선’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요. 커피에 대해 공정무역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도 한잔의 커피를 위해 많은 이들이 경제적 착취를 당하면서 정작 이익을 보는 사람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아주 값싼 가격에 음악을 사고 감상할 수 있는 것에는 수많은 음악가들이 당하는 부당한 구조가 한몫을 합니다. 너무나도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약간의 선을 위해 수많은 악을 용인하고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 약간의 선은 보통 소수를 위한, 소수가 독점하는 선입니다. 소수가 유익을 누리기 위해, 다수가 고통을 짊어집니다.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약간의 선을 위한 수많은 악, 그리고 소수의 유익을 위한 다수의 고통이 세상의 길이라면, 그리스도의 길은 이와 다릅니다. 그분은 최고의 선을 위해, 선으로 세상을 뒤덮기 위해 자신의 몸에 죄악을 짊어지셨습니다.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 홀로 고통을 껴안았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롬 5:15)

세상의 길은 이기적인 유익을 위해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고 갑니다. 아담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선악과를 탐하여 모든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죄의 유혹은 항상 이와 같습니다. 어떤 것을 매력적이고 좋아보이게 만들지만, 죄를 저지른 이후에 남는 것은 허무함과 자신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상처뿐입니다. 약간의 선을 위한 수많은 악을 위해 달려갑니다. 그 약간의 선도 사실 더 이상 선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길은 이와 다릅니다. 한 사람의 고통이 많은 이들을 생명으로 이끌고 갔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길이었지만 많은 이들에게는 유익이요 기쁨이었습니다. 타인을 희생하여 자신의 유익을 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여 모든 이들의 유익을 추구하셨습니다. 게다가 궁극적으로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께도 유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히 드러내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수많은 이들을 위한 구원의 길이 되었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 모든 이들에게 유익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길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의 길의 끝에는 파멸이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돌이켜,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길은 진정한 유익과 선함이 있는 길입니다. 고통스러워보이지만, 그 길은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유익한 길입니다.

이것이 서로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작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단지 본이 되시고 선생되시는 그리스도를 따라 각자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하는 길입니다. 가족에게라도 이것은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수많은 것들을 희생하여 약간의 선을 추구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희생에는 보통 자신보다는 다른 이들이 많이 해당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길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길이 어떠해야 하는지는 그리스도께서 잘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고민할 부분은 많이 남겨져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수많은 부조리와 악함으로 인해 나오는 유익을 누리고 있는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약간의 선을 누리는 대상이 우리 자신일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쉽게 말하기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구조가 너무나도 복잡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길과 방향은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3)

Over de auteur

재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 17세기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의 교회론을 연구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의들, 특히 교회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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