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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신학연구소 세미나가 종강했습니다

전에 소개했던 「개혁주의신학연구소」의 세미나의 첫 학기가 5월 4일부로 종강까지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강의를 진행하신 한병수 교수님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하실 정도로 생각보다 많은 수가 세미나에 끝까지 참석했습니다. 마지막까지 꾸준히 나오신 분들은 대략 3–40명 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세미나는 『신학이란 무엇인가(신학서론)』와 『잔키우스 읽기』를 두 가지 섹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잔키우스 읽기』를 통해서는 잔키우스의 생애와 그의 성령론, 신론, 창조론, 섭리론 등에 대해서 접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라틴어로 적힌 저술이기 때문에 쉽게 접할 수가 없던 잔키우스의 견해들을 살펴볼 수 있었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얼마나 엄밀하게 신학을 탐구해왔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학이란 무엇인가(신학서론)』를 통해서는 특별히 우리가 신학을 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가장 중요한 토대가 무엇이며 한계가 무엇인지, 신학의 원리와 목적은 무엇인지를 배웠으며, 성경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까지 배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서론의 중요성

한 시간 한 시간이 굉장히 밀도있는 수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신학생과 성도들 모두에게 신학 공부의 방향성을 잡아주는 시간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세미나였습니다. 신학대학원 3년 동안 굉장히 많이 느꼈던 것이 신학의 ‘파편화’였습니다. 여러 전공/전문영역들로 나뉘어지는 현대 학문의 경향은 신학에도 적용되었고 기본적으로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으로 분리되어 통합적인 신학 추구가 힘들어졌기 떄문입니다. 각 분과들은 나름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고 원활한 교류가 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신학생들은 배운 것을 종합해내기 어렵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고 말입니다. 이런 경향은 각 분과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조직신학 또한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을 각각 배우지만 그것들을 종합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학은 그 근본적인 목적이 전문적인 지식의 탐구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학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향하는 삶을 사는 삶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자랑하기 위한 것이 신학의 목적이라면 우리가 하는 공부가 얼마나 허무한 것일까요!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이 ‘신학의 서론(Prolegomena)’입니다. 신학을 하는 이유와 목적과 한계와 방향성을 잡아줄 때, 그것을 추구하면서 통합적이고 종합적이며 유의미한 신학을 해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큰 유익이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의미 깊게 다가온 것들

많은 것들을 배우는 시간이었지만, 특별히 와닿았던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인용구는 강의 내용을 받아 적은 것입니다).

“해석의 기준이 무엇이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해관계에 의해 그 기준이 바뀝니다. 우리 마음에 너무 큰 신뢰를 두지 마시길 바랍니다. 나에게서 나온 것은 고작해야 아주 교묘하게 만물보다 부패한 것입니다. ”

신학을 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한계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에, 나로부터 시작하는 신학이 결국 도달하는 지점이란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참된 신학을 추구하려면 결국 나를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성령의 함께하심은 성경과 함께 하심입니다. 성경에 발을 대지 않는 붕 뜬 신학은 위험한 신학입니다.”

우리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우리가 추구하는 신학은 말씀을 토대로 삼고 뿌리내려야 합니다. 그래서 신학의 핵심은 말씀이며, 이 말씀으로 돌아간 것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말씀에 의지하는 신학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한계를 깨닫는다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최종적인 권위로 삼고 그에 의지하는 것이 가장 겸손한 것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감추어진 일과 나타난 일로 나뉩니다. 감추어진 일은 하나님께 속하고, 나타난 일은 우리에게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전체적인 것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말씀에 의존하는 신학은 감추어진 것과 나타난 것의 연관성을 고려하는 신학입니다. 신학은 온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아내려고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고,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리를 생각해보세요. 사람의 귀는 진짜 큰 소리와 아주 세밀한 소리는 못듣습니다. 거시영역의 음파와 미시영역의 음파가지 다 들으면 사람은 살아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소리만해도 들어야 하는 소리와 듣지 않아야 하는 소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돌아가는 엄청난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죽을지도 모릅니다.”
“나타난 것이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했다는 것은 율법의 말씀을 행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타난 계시로서의 자연 만물과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와 말씀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위의 인용처럼, 우리는 세상에 있는 것들을 다 알려고 해도 알수도 없기로서니와, 사실 안다고 해서 유익이 되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들도 있죠.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알기를 원하시고 알아야 하는 것들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뿐 만이 아닙니다.

“의제도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우리가 붙들 가장 중요한 의제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을 붙들었습니다. 교부들이 기독론적 해설을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의 ‘의제’를 하나님이 정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잘 알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이미 성경을 통해 주어졌습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주 하나님과 그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이며, 가장 깊이 탐구해야 할 영역입니다.

“논지 전개 방식도 하나님이 이끄십니다. … 질문과 대답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다보면 상대방에게 이끌려가면서 정말 중요한 초점을 놓치게 될 수 있습니다. 논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 교회는 세상의 질문에 대해 본질적인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대적인 요청에 응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신학을 연구하고 전개할 때 그것을 세상이 아닌 하나님이 이끄시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의 질문에 답하기에 바쁘다면 결국 그 질문들에 이끌려 원래 성경이 말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에 서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의 올바른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잊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가 추구한 신학이 세상에 본질적인 답을 내어놓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최고선(Summum Bonum)으로 알지 않는 모든 신학자는 하나님에 대해 논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이 되시는 최고 선이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면 다른 모든 것들은 배설물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소유하고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하는 것이 바로 신학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학을 하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소유해야 합니다. 지식과 지혜의 모든 보화는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을 하는 것은 그것은 곧 빌립보서 3장에 나오는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을 본받아 죽음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힌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 의존하여, 하나님이 이끄시는대로, 하나님이 알기를 원하시는 것들을 알아가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신학이며, 그것은 결국 우리가 가장 기뻐해야할 최고 선이신 하나님을 알아가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자신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그분께 나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누리는 것이 신학의 목적이자 성경 해석의 목적이며, 그것에 이르지 않으면 우리의 신학은 너무나도 허무합니다.

 


 

더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이 글에서 나누기엔 글이 너무 길어질거 같네요. 여러가지로 많은 유익이 있었던 강의였고, 끝난 것이 아쉽습니다. 가을에 또 새로운 학기가 시작될텐데 그때 어떤 강의가 진행될지는 모르지만 많은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어지네요.

Over de auteur

재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 17세기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의 교회론을 연구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의들, 특히 교회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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