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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과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연합

토마스 아퀴나스는 13세기의 사람으로 중세 최고의 신학자를 꼽으라면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에 관한 간단한 약력이나 주요저서의 해제를 보고 싶다면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에서 올려놓은 자료를 참고하는 것도 추천할만 한 것 같습니다.

“로마 가톨릭의 신학자의 견해를 우리가 굳이 알 필요가 있겠느냐?”라는 의문을 품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종교개혁을 따르는 개신교의 신학은 “가장 성경적인 신학”이어야 함과 동시에 “보편적인 신학”이어야 합니다.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교회는 “모두 보편교회의 전통, 곧, 우주적 교회로서 주요 교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라는 말입니다. 이에 관하여는 R.C. 스프롤이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 강의한 것을 소개한 다음 글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보편교회의 신학에 대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자신들이 사도들과 교부들의 가르침을 가장 잘 이어받았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 당시에도 구원론이나 성례 등이 큰 논쟁의 대상이었으며,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과 종교개혁자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신학적 견해들이 많았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예를들어 신론 같은 경우 서로 논쟁할 여지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가장 성경적이며 가장 보편적인 신학, 사도들의 가르침을 이어가는 신학을 추구해야 하며, 전통을 성경과 동등하게 여기거나 그 위에 놓지는 않지만 중요하게 여기고 선배들의 견해를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권위는 성경에 두지만, 전통은 발로 차버릴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죠.

 

『신학대전Summa Theologica』 소개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은 아퀴나스의 핵심 저서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퀴나스는 이 책에서 신학의 중요한 주제들을 다룹니다. 각 주제에 따라 질문을 제시하고, 그 각 질문 안에는 구체적인 다수의 논제들이 제시됩니다. 예를 들어 아퀴나스는 성육신을 다루는 주제의 첫 번째 질문인 “성육신의 적합성에 대한 것”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은 논제들을 제시합니다. [1]

1)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셔야 한다는 것이 적합한가?
2)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신하셔야 되도록 인류가 회복되어야 할만한 필요성이 있는가?
3) 만약 사람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셔야 했을 것인가?
4) 하나님께서는 원죄를 제거하기보다는 실제적인 죄Actual Sin를 제거하기 위해 성육신하셨는가?
5) 하나님께서 인류가 시작될 때 성육신하셔야 했다는 것은 적합한가?
6) 성육신이 세상의 종말까지 연기되어왔어야 했는가?

아퀴나스는 이런 식의 논제들을 하나씩 제시하고, 각 논제와 관련하여 아퀴나스가 동의하지 않는 반론들을 3가지에서 4가지 정도 먼저 소개한 후, 그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논박해나갑니다. 이런 방식이 『신학대전』에서 그가 사용하는 순서입니다.

 

성육신적 연합?

그렇다면, ’성육신적 연합’이란 무엇일까요?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중요한 교리와도 관련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구원받은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다는 성경의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17세기 이후 신학자들은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교리인 칭의, 성화 등의 순서를 다루는 구원 서정을 논의해나갔습니다. 그리고 이 구원 서정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도 다루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예정적 연합’, ‘성육신적 연합’, ‘신비적 연합’, ‘영적 연합’ 등으로 나누어서 설명했습니다. [2] 여기서 성육신적 연합은 성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셔서 인성(인간 본성)과 연합하신 그 연합을 가리킵니다. 구원받은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교리의 측면에서 종교개혁 이후 신학자들이 이 성육신적 연합을 논의했는데, 그 이전 사람들은 이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졌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자료를 좀 뒤져보니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에 대해서 언급을 한 것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바라보는 관점은 달랐습니다. 아무튼 이런 경위로 아퀴나스의 글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아퀴나스가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연합에 대해서 무엇을 말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의 책 『신학대전』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신학대전』은 3부로 나뉘어지는데 그 중 제3부는 성육신, 기독론, 그리고 성례라는 세 가지 주제로 구성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성육신을 다루는 주제 중 세 가지 질문(Question II부터 Question IV까지)이 성육신적 연합과 연관됩니다. 성육신을 논할 때 아퀴나스는 두 번째 질문에서 성육신하시는 말씀의 연합Union of the Word Incarnate의 방식에 대해 논박하며, 세 번째 질문에서는 더 나아가 취하시는 위격Person Assuming의 부분에 있어서 연합의 방식에 대하여 논박하고, 반대로 네 번째 질문에서는 인간 본성Human Nature의 부분에 있어서의 연합의 방식에 대해 논박합니다.

그렇다면 아퀴나스는 성육신하신 말씀의 연합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그가 제시하는 세 가지 질문과 그에 대한 논제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읽으시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쏟아져(..) 나오더라도 그냥 그러려니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무슨 주제가 논의 거리였는지를 알아보는 정도여도 좋을 거 같네요. 저도 간략하게 소개만 한 것이라서 자세한 논증 과정을 잘 담아두지는 못했습니다.

 

성육신하시는 말씀의 연합의 방식에 대하여

먼저 아퀴나스는 성육신하시는 말씀의 연합의 방식에 대해 논박하기 시작하는데 다음과 같은 12가지 논제들이 제시됩니다.

1) 성육신하시는 말씀의 연합은 본성 안에서 일어나는 것인가?
2) 이 연합은 위격Person 안에서 일어나는 것인가?
3) 이 연합은 자주체suppositum 혹은 위격hypostasis 안에서 일어나는 것인가?
4) 그리스도의 위격은 성육신 이후 구성요소로 이루어져있는가composite?
5) 육체와 영혼의 연합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는가?
6) 인간의 본성이 말씀과 우연적으로 연합했는가?
7) 연합 그 자체는 창조된 어떤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8) 이 연합은 취하심assumption과 같은 것인가?
9) 두 본성의 연합은 최고의 연합인가?
10) 그리스도 안에서의 두 본성의 연합은 은혜로 말미암아 가져온 바 된 것인가?
11) 이 연합에 선행하는 어떤 공로들이 있는가?
12) 연합의 은혜는 사람이신 그리스도께 본성적인natural 것인가?

먼저 아퀴나스는 1) 성육신의 연합이 한 본성을 이루는 것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고 논박합니다. 반대자들이 키릴이나 아타나시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등을 인용하지만, 아퀴나스는 본성이 무엇인지 철학적인 정의를 내리고 또한 칼케돈 공의회의 선언(“두 본성 가운데 혼동없이 변화없이 분열없이 분리없이”)과 제2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키릴에 대한 해석(“만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신성과 육신이 한 본성 혹은 실체라고 전한다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을 인용하며 교부들의 가르침을 또한 언급하면서 성육신적 연합이 두 본성이지 한 본성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고 논박합니다. 이런 식으로 『신학대전』 안에는 아퀴나스의 반대자들도 교부들의 글을 인용하지만, 또한 이에 대응하여 아퀴나스도 교부들과 공의회의 결정들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견해가 올바른 해석이라는 것을 입증해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2) 이 연합은 위격Person 안에서 일어나는 것인가?3) 이 연합은 자주체suppositum 혹은 위격hypostasis 안에서 일어나는 것인가?라는 두 논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한 위격을 이룬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인데, 이렇게 두 개로 논제가 나뉘어진 이유는 동방과 서방 간에 빚어진 이 용어들의 혼동이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3] 아퀴나스는 이 두 논제들을 통해서 용어들을 설명하고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연합은 한 위격과 두 본성을 가지신다는 것을 논증해나갑니다.

이런 식으로 아퀴나스는 성육신하시는 말씀의 연합의 방식이 어떠한지를 논박하고 설명합니다. 4) 성육신 이후 그리스도의 위격은 구성요소로 이루어졌는가라는 논제에 대해서 그는 다메섹의 요한Damascene의 말을 인용한 후, 그리스도의 위격이 그 자체 안에서는 단순성을 가지지만, 위격의 양상이 본성 안에 실재하는subsist 측면에서는 그리스도의 위격이 두 본성들 각각 안에 실재하기 때문에 구성요소를 가지시는 위격composite person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5) 육체와 영혼의 연합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는가?라는 논제에 대해서는, 바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빌 2:7) 인류는 영혼이 육체에 연합해 있기 때문에 사람의 형체를 가지신 그리스도 안에도 영혼과 육체의 연합이 있다고 논증합니다. 여기서 그는 흥미롭게도 논증을 위해 당시 교회에서 사용되는 성가chant를 인용하기도 합니다. 6) 인간의 본성이 말씀과 우연적으로 연합했는가?라는 논제에 대해서 그는 인간 본성이 하나님의 아들과 우연적으로 연합한 것이 아니라고 논증합니다. 그는 우연은 실체와는 달리 분열되는 것인데, 실체는 본질이나 본성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또한 다른 면에서 자주체suppositum나 위격hypostasis로도 여겨질 수 있기 때문에, 연합이 위격 안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감안하면 이것이 우연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7) 연합 그 자체는 창조된 어떤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라는 논제에 대해서 아퀴나스는 “시간 속에서 시작된 존재는 창조된 것이다. 이 연합은 영원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시간 속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연합은 창조된 어떤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이 하나님에게 어떤 변화도 주지 않으면서 그분과 실제로 연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연합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8) 이 연합은 취하심assumption과 같은 것인가?라는 논제에 대해 연합과 취하심은 다른 것이며 그것이 어떤 차이점들이 있는지를 논증합니다. 일례로, 아퀴나스는 연합은 관계를 의미하지만, 취하심은 행동을 의미하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언급합니다. 9) 두 본성의 연합은 최고의 연합인가?에 대해서 그는 신적 위격 안에서 두 본성이 연합하는 이 연합은 최고의 연합이라고 설명합니다. 10) 그리스도 안에서의 두 본성의 연합은 은혜로 말미암아 가져온 바 된 것인가?에서 그는 은혜는 우연적인 것이라는 반론에 대하여 은혜가 어떤 방식으로 주어지는지에 대해서 설명한 후, 이 연합은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을 논증합니다. 11) 이 연합에 선행하는 어떤 공로들이 있는가?라는 논제에서 그는 “그리스도 자신을 고려했을 때, 그가 연합에 선행하는 어떤 공로도 갖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라고 말하면서 “성육신의 신비는 공로의 근원이다”라고 논증합니다. 마지막으로 12) 연합의 은혜는 사람이신 그리스도께 본성적인natural 것인가?라는 논제에서 그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인성을 받아들이시는 것에 있어서, 은혜 자체는 인성에 본성적인 어떤 것이 되었고 그래서 그에게는 죄가 불가능했다.”(Enchir. x1)라고 언급한 것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연합은 한 본성을 갖는 것이 아니지만 “신적 본성의 힘으로 말미암아” 연합은 “그분의 출생을 시작으로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 본성적인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취하시는 위격Person Assuming의 부분에 있어서 연합의 방식에 대하여

이어서 그는 다음 질문인 “취하시는 위격의 부분에 있어서 연합의 방식에 대하여” 다룹니다. 구체적인 논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취하는 것은to Assume 하나님의 위격Person에 속한 것인가?
2) 취하는 것은 신적 본성에게 있어 적합한 것인가?
3) 위격성Personality으로부터 분리된 본성이 취할 수 있는가?
4) 한 위격이 다른 위격 없이without Another 창조된 본성을 취할 수 있는가?
5) 하나님의 위격들 각각은 인간 본성을 취할 수 있으신가?
6) 서로 다른 하나님의 위격들께서 하나의 동일한 개별적 본성을 취하실 수 있는가?
7) 하나의 하나님의 위격이 두 개의 인간 본성을 취하실 수 있는가?
8) 다른 하나님의 위격보다 성자의 위격이 인간 본성을 취하셔야 했다는 것은 적합한가?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1) 취하는 것은to Assume 하나님의 위격Person에 속한 것인가?라는 논제에 대해 위격이 본성을 취한다는 진술은 적합한 것이며, 그러나 “신적 위격은 신적 본성을 취한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인성을 취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2) 취하는 것은 신적 본성에게 있어 적합한 것인가?라는 논제에 대해서는 “신적 본성이 인성을 위격에게로 취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3) 위격성Personality으로부터 분리된 본성이 취할 수 있는가?는 논제에 대해서는 “위격성은 하나님 안에서 위격적인 속성을 말하며 이것은 아버지이심Paternity, 자식이심Filiation, 발현하심Procession으로 말할 수 있다. 이성적으로 우리가 이것들을 분리해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남아있으며, 천사가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라고 말한 것처럼(눅 1:37) 이 전능하심으로 인해 성육신은 수행되었다. 그러므로 위격성이 제거될 수 있다하더라도 신적 본성은 여전히 취하실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4) 한 위격이 다른 위격 없이without Another 창조된 본성을 취할 수 있는가?라는 논제에 대해서는 “취하시는 세 위격들 안에 공통으로 있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지만 취하는 관계term는 한 위격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며… 세 위격들은 인간 본성을 아들이라는 한 위격께 연합하게 하셨다.”라는 것을 통해서 이를 설명합니다.

또한 5) 하나님의 위격들 각각은 인간 본성을 취할 수 있으신가?라는 논제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은 차별없이 공통적으로 모든 위격들 안에 있으며” 또한 “위격성의 본성도 모든 위격들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은 성부의 위격이나 성령의 위격에 인간 본성을 연합하게 할 수 있다.”라고 설명하면서 다른 위격들이 성자처럼 인간 본성을 취하실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6) 서로 다른 하나님의 위격들께서 하나의 동일한 개별적 본성을 취하실 수 있는가?라는 논제에 대해서는 “성육신하신 위격은 두 본성 가운데 실재하신다subsist. 또한 세 위격들은 하나의 신적 본성 안에 실재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세 위격들은 또한 한 인간 본성 안에 실재하실 수 있으시다. 인간 본성이 세 위격들에 의해 취해지는 방식으로 말이다.”라고 설명합니다. 7) 하나의 하나님의 위격이 두 개의 인간 본성을 취하실 수 있는가?라는 논제에 대해서 그는 성부께서는 성자가 인간 본성을 취한 것으로부터 구별된 인간 본성을 취할 수 있으시며 성부께서 가능하신 것은 성자께서도 하실 수 있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했을 때 “성육신 이후 성자께서 취하셨던 인간 본성과 구별되는 다른 인간 본성을 취하실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8) 다른 하나님의 위격보다 성자의 위격이 인간 본성을 취하셔야 했다는 것은 적합한가?라는 논제에 대해서 아퀴나스는 “성육신의 신비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알려지게 되었다. 지혜이신 그분께서는 가장 무거운 채무를 해결하시기에 가장 적합하신 분이시며, 능력이신 그분은 정복자를 정복하실 수 있으시다.”(De Fide Orthod. iii)라는 다메섹의 요한의 글을 인용하면서, 고전 1:24절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능력과 지혜는 성자께 돌려지는 것이므로 성자의 위격이 성육신하시는 것은 적합하다고 논증합니다.

 

인간 본성Human Nature의 부분에 있어서의 연합의 방식에 대하여

위격의 측면을 다룬 이후 아퀴나스는 이제 인간 본성의 측면에 있어서 연합의 방식이 어떠한지에 대한 질문을 다룹니다. 논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인간 본성은 다른 어떤 본성보다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취함 받을만 한 것인가?
2)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인성의) 인격을 취하셨는가?
3) 하나님의 위격은 사람a man을 취하셨는가?
4)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모든 개개인들로부터 추출된abstracted 인간 본성을 취하셔야 했는가?
5)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인간 본성을 모든 개개인들 안에서 취하셔야 했는가?
6) 하나님의 아들이 아담의 혈통Stock의 인간 본성을 취하시는 것은 적합한가?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1) 인간 본성은 다른 어떤 본성보다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취함 받을만 한 것인가?라는 논제에 대해서 아퀴나스는 “(내가)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라는 잠언 8:31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렇다고 설명합니다. 2)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인성의) 인격을 취하셨는가?라는 논제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음을 설명하면서, “만일 인간 본성이 신적 위격에 의해 취함을 받지 않았다면 인간 본성은 자신의 고유의 인격을 가졌을 것”이고, “적절한 말은 아니지만 신적 위격이 연합으로 말미암아 인간 본성이 자신의 인격성을 갖지 못하도록 막는 방식으로서 신적 위격이 인간적인 인격을 흡수했다고 말할 수는 있다.”고 설명합니다. 3) 하나님의 위격은 사람a man을 취하셨는가?라는 논제에 대해서는 인간 본성을 취했다는 측면에서는 사람을 취하신 것이지만 자주체suppositum를 취했다는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으므로 문자적으로 사람을 취하셨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4)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모든 개개인들로부터 추출된abstracted 인간 본성을 취하셔야 했는가?라는 논제에서는 “성자께서 개개인들로부터 추출된 인간 본성을 취하신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하면서, 비록 아리스토텔레스the Philosopher에 따르면 인간 본성은 감각적인 질료를 떠나서 스스로 있을 수는 없지만, 이것 취하심이 일반적인 인격이 아닌 하나님의 위격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과 성자께서 우리의 본성을 취하셔서 우리를 위한 공로를 얻으셔야 한다는 점 등을 말합니다. 그리고 5)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인간 본성을 모든 개개인들 안에서 취하셔야 했는가?라는 논제에 대해서는 다메섹의 요한이 성자에 대해 “종species으로서의 인간 본성을 취하신 것이 아니고 그것의 인격hypostases을 취하신 것도 아니다.”(De Fide Orthod. iii)라고 말한 것을 인용하면서 “말씀이신 분에 의해 인간 본성이 그것의 모든 자주체supposita 안에서 취해지는 것은 부적합”하며 “취해지는 인간 본성에는 취하시는 신적 위격이라는 하나의 자주체suppositum만 있다”고 논증합니다. 6) 하나님의 아들이 아담의 혈통Stock의 인간 본성을 취하시는 것은 적합한가?라는 논제에서는 다른 인간 본성을 취하실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인용하면서 “죄를 저지른 자가 일을 바로 잡는 것이 정당해 보이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취해져야” 하는 것이 맞으며,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 더 드러나기 위해서는 타락하고 연약해진 인간 본성을 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전능과 영광을 드러내기에 적합하다고 논증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언급하는 다른 부분들

지금까지 살펴본 아퀴나스가 설명하는 성육신적 연합은 종교개혁 이후 신학자들이 논의했던 ’구원받은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론적 관점에서, 성육신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둘러싼 여러 논점들에 대해 다루는 것입니다. 기독교 초기의 논쟁들과 더 관련이 있는 부분이죠.

물론 그렇다고 그가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다루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아퀴나스는 성례를 논하는 부분에서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언급합니다. 그는 성례를 시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께 속한 이들의 연합을 통해 영적 자양분을 공급하는 것”이며 “이 연합은 사랑의 효과”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아퀴나스는 성례의 시행이 성직자들에게 속한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경건한 평신도layman는 믿음과 사랑을 통해 영적인 연합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그는 영적 제사를 드리는 영적 제사장직을 가진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결혼이 성례(이것은 개신교의 견해와는 다릅니다)라는 것을 논증하는 부분에서 그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이 이 (결혼) 성례 속에 실제로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이 실제가 (결혼 성례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결혼을 통해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실제가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나가는 말

아퀴나스가 이후 후배들(?)인 종교개혁 이후 신학자들이 그런 것처럼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관점에서 성육신적 연합을 언급하지는 않은 이유는 이 작품이 미완성작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구원의 서정이라는 개념이 더 후대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구원론의 관점에서 성육신적 연합을 언급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구요. 그러나 아퀴나스가 구원론적인 측면에서 다루지 않았다고 해서 아퀴나스가 이 연합으로 인한 신자의 유익을 간과하고 사변적인 논의만 해나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위의 논의들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는 이 성육신적 연합이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과, 이 연합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공로가 신자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성육신적 연합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놀랍고 신비로운 것이었습니다.

간접적으로나마 이렇게 아퀴나스를 접하니까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저는 아퀴나스가 방대한 주제에 대해 각각 간명하게 반론을 소개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명료하게 해나가는 것을 보면서 역시 대가는 대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퀴나스에겐 명료했지만 전 어렵더군요. 아쉽게도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우리나라에서는 완역이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언젠가는 되겠죠. 하지만 전통적인 가르침을 잘 배워나가고 성경을 연구해나가면서도, 신학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은 굉장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1.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ca (Bellingham, WA: Logos Bible Software, 2009), III q.1.  ↩
  2. 이에 관해서는 John V. Fesko의 Beyond Calvin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 John V. Fesko, Beyond Calvin: Union with Christ and Justification in Early Modern Reformed Theology (Vandenhoeck & Ruprecht, 2012).  ↩
  3. 제롬은 hypostasis를 ousia와 동의어인 것으로 여기고 의심을 가졌으며, 갑바도기아 교부들에 의해 hypostasis는 substantia로 자주 번역이 되었습니다. 보에티우스는 persona를 “이성적인 본성의 개별적 실체an individaul substance of a rational nature”라고 정의했는데, 이는 persona를 sunstantia와 연결해서 또 다른 혼동을 낳았습니다. 아퀴나스는 보에티우스의 용어를 따르지만 이것이 삼신론적 이단적인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여겨서 persona를 정의하는 것에 있어서 substantia는 본질essentia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suppositum(자주체: 구별된 개별자)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 Richard A. Muller, Dictionary of Latin and Greek Theological Terms (Grand Rapids: Baker, 1985), “persona”.  ↩

Over de auteur

재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 17세기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의 교회론을 연구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의들, 특히 교회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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