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강 보편적, 복음적, 개혁주의적 Catholic, Evangelical, and Reformed
Summary 요약
먼저 개혁주의 신학은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다.
(영어에서 조직신학의 ‘조직’과 우리가 보통 체계로 번역하는 ‘시스템’이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보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직System에 대해 염증을 가지고 있다.
이는 특정한 철학적 시스템System을 가지고 성경의 진리를 끼워맞추려는 시도에 대한 반발일지도 모른다. (이는 정당한 것이다.)
하지만 조직신학은 성경이 모두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일관성이 있다고coherent 본다.
따라서, 조직신학은 성경의 각 진리들일 모두 모아 모아 대체 이 각 요소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 시스템System으로 정립하려 하는 신학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런 의미에서 조직신학이다.
여러 다른 신학들도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는 대부분 같은 교리를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신론에 있어서는 개혁주의 신학만의 차이점을 찾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R.C.스프룰은 오히려 신론Doctrine of God이 개혁주의 신학이 가장 독특한 점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이를 모순이라고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다른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상대적으로 잊어 버리고 다른 교리를 강조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믿습니다’라고 할테지만, 그 사람이 ‘예정론’을 믿지 않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의) 수많은 교리들을 대할 때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신론으로 끊임없이 되돌아와서 검증하려 한다.
보편적이다.
영어로 Catholic이라고 표기되어 있어서 생소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서 Catholic은 ‘로마 가톨릭적이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새롭게 발명된 것이 아니라, 기본 가톨릭적 배경에 기독교 사도적 믿음을 회복하자는 운동이었다.
모든 개신교 신학은 16세기 종교개혁에서 시작되어 나왔다.
결국 모든 개신교 신학은 세부 차이점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교리적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개혁주의 신학과 다른 신학과의 차이점을 다루기 전에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모두 보편교회의 전통, 곧, 우주적 교회로서 주요 교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복음적이다.
모든 보편적 교회가 복음적이진 않다.
하지만 모든 복음적 교회는 보편적이다. (= 우주적 교회의 일원이다.)
‘복음’이라는 말은 개혁주의자들에 의해 명명된 것인데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정립할 때 그들은 성경의 복음을 회복하고 있는 것이었다.
당시 ‘복음’의 핵심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칭의의 구원이었다.
따라서 우리 개신교도들이 ‘복음적’이라고 표현할 때,
그것은 루터가 말했던 칭의의 구원, 곧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였다.
이외 모두가 공유하였던 또 한가지는 ‘성경의 절대적 권위’였다.
따라서, 모든 복음적 교회는 ‘칭의의 구원’과 ‘성경의 절대적 권위’에 대해 인정한다.
개혁주의적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앞에서 말했던 보편적이고 복음적인 교회의 일원이다.
하지만 다른 보편적, 복음적 신학과는 구별되는 신학 분류이다.
특별히 역사적 종교개혁 전통을 따르는 신학을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한다.
Thoughts 더 생각하기
이번 강의에서 R.C.스프롤은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 직접적으로 다루기 보다는 ‘개혁주의 신학’이 어떤 커다란 카테고리 안에 속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말해주었습니다.
‘정체성 확립’이랄까요.
처음 ‘개혁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다짜고짜 책들부터 읽기 시작했을 때,
제게 가장 먼저 다가왔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이었다.
그리고 그 ‘절대주권’을 시작점인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변두리 영역에까지 적용시킨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에서 출발하여 이 교리를 절대 양보하지 않으며 신학적 일관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경향성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논리적 엄정함으로 나타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 자체로 너무나 커다랗고 쉽게 빈틈이 발견되지 않는 논리체계이기 때문에,
(논리체계로서의) 다른 신학들을 받아들이기가, 아니 심지어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아직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목이 뻣뻣해졌다는 것이죠.
두 번째 강의를 통해 명백해졌다.
모든 개신교는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으며,
그 공유하고 있는 뿌리가 차이점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다른 신학의 입장에서 이렇게 생각할 뿐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아, 잊지 말아야지. 나도 결국은 주님의 몸된 교회의 일원인 것을…’ 이라고 말이죠.
개혁주의 신학을 시작하기 전,
우리는 먼저 어머니, 아버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Comments 1
Pingback: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과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연합 | 진짜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