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저는 신대원 3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하며 3권의 책에 가장 큰 위압감(?)을 받았습니다. 그 중 첫 번째가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의 4권의 『개혁교의학』이었지요. 바빙크의 교의학을 어렵사리 읽으면서 그의 통합적인 신학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고, 기어코 ‘자연과 은혜(Nature and Grace)’라는 바빙크 신학의 핵심 주제로 논문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논문에서 바빙크의 교의학 전체를 다루었지만, 본 글은 바빙크의 이 중심 논제에 입각하여 교회론을 짤막하게 전개한 글입니다. 제 사고의 저변에 이미 그분의 사상이 깔려있기 때문에, 많은 인용을 하지 않아도 바빙크의 생각이 많이 투영된 글이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참고 문헌에 있는 두세 권의 책 역시 많은 도움이 되었음을 미리 밝힙니다. 이 글을 통해 교회의 존재와 그 위치, 그리고 사명을 더불어 함께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인류와 부름 받은 택자들
2.1. 아담과 그리스도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길과 세계의 시작에 서게 된 아담이지요. 아담은 육체를 입은 인격체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은 그의 존재 전체를 아울러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아담의 창조는 곧 그리스도를 고려한 창조입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육체를 가진 이 아담을 전제하고 있지요. 신적인 중보자가 이 세상에 내려와 인성을 취하실 모습을 시원부터 보여주신 모형이 바로 이 아담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영원부터 생각하신 유한한 피조물의 ‘창조’가, 영원부터 계획하신 성자의 ‘오심’을 준비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인격적인 지혜이신 로고스를 통하여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고 그 피조물의 절정인 인간은 다시금 성육신하실 그리스도를 향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창조 세계의 주인이시며 인류의 머리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육신은 창조와 구별되지만, 그것과 분리되지 않는 절정이요, 그것 가운데에서 빛나는 면류관이며, 그것이 지향하는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2. 인류와 그리스도인
아담의 창조와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관계는, 모든 인류와 부름 받은 성도들 간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아담의 창조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바라본다고 해서 그의 타락이 즉각적인 성육신을 야기한 것은 아니며, 아담의 타락이 아브라함을 택하여 언약의 경륜을 이루어가기로 계획하신 하나님을 재촉하는 데에 성공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계획 가운데에서, 구원 계시의 보편적인 성격과 자연을 정당하게 취급하고자 하셨으며, 전체로서의 인류를 결코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바빙크는 그의 교의학에서, 성경이 아브라함 시대 이전까지의 “인류 발전의 주요한 특징들을 기술”하고 있으며, 아브라함 이후 이스라엘이 택함 받았으나 그들이 “민족들의 바다 위에 기름 방울처럼 표류하지 않으며 그 민족들과 온갖 연관을 맺어 그 민족들을 향한 기대를 끝까지 확고하게 붙든다(3.263)”고 말하였습니다.
이처럼 온 인류와 택자들의 무리는 시초부터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타락한 아담에게 구원을 계시하신 후에 하나님은 먼저 노아 및 온 피조물들과 언약을 맺으셨고, 그 이후에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세상을 종결하시거나 이후 세대의 부패함으로 세상을 멸절하시지 않고 지속적으로 자연적인 인류를 남겨두심은, 그들 안에서 하나님 당신의 택함을 받은 무리들을 이끌어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내의 언약으로 붙드신 피조계의 시공간에 택자들이 존재할 자리를 마련하셨으며, 은혜로 택함 받은 자들을 곧바로 낙원으로 들어올리시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 함께’ 공존하게 하심으로써 그 은혜가 다시금 인류와 자연을 향하여 흘러가도록 하셨습니다.
3. 교회의 상황성
교회가 본질상 택함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지만, 교회가 현존하는 범주는 ‘지금, 여기’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부터 ‘교회가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은 교회의 본질에 관한 질문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사명과 우리의 삶을 향한 전망을 아우르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기독교 역사는 ‘보이는 교회 / 보이지 않는 교회’의 관계로 논해왔습니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별은 항상 제도로서의 교회와 유기체로서의 교회로 치환해 온 개념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도로서의 교회와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모두 ‘보이는 교회’의 구조 내에서 구별되는 개념에 가깝습니다. 더 세부적으로는 동심원 구조로 표현할 수 있는데, 제도로서의 교회는 유기체로서의 교회 내에 있는 내부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동심원 구조에서 양자는 분리될 수 없고, 한 면을 상실한 채 다른 면의 온전함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보이는 교회를 지나치게 구조적인 가시성으로 대변시켜 그 밖에 있는 삶의 영역을 망각케 해서도 안 되고, 상호 고백적인 관계를 가장 명백하게 드러내고 지속시켜주는 형식적인 제도를 무시해서도 안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방식의 구분은 우리에게 항상 명쾌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 구별의 모호함과 더불어 보이지 않는 교회를 규정하는 교회의 영적인 불가시성은, 어떤 면에서 혼동을 주기도 하며 지상 공동체의 잘못을 경시하는 문제를 초래하였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지요.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를 꼽으라면 분열과 분파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보이는 교회가 보이지 않는 교회의 ‘드러남’이라면, 이 땅에 실재하는 교회는 ‘한 교회’로서 드러나고 밝혀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적어도 이를 지향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하나로 선포되고 드러나야 할 지상 교회의 찢어짐은, 세상 속에 일어난, 그리고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참사입니다. 더 나은 연합을 위한 분리는 반드시 그 목적에 부합하는 결과를 가져와야 했지만, ‘적어도 보이지 않는 교회만큼은 여전히 하나다’라는 명분 이상의 회복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의 온전함은 보이는 교회의 온전함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지, 보이는 교회의 잘못을 상쇄시키기 위한 도피처로 여겨져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보이지 않는 교회를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만이 보실 수 있는’ 교회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도로서의 교회와 유기체로서의 교회가 모두 보이는 교회의 구별들이지만, 이 두 요소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교회에 그 영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그 교회가 어디에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우리는 언제나 세상 속에 실제로 살아가고 참여하는 존재로서의 교회를 언급하게 되지요. 그 방면이 바로 ‘인간이 볼 수 있는 교회’이기 때문이며, 교회는 본질상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막연하거나 관념적인 교회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신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하나님께 부름 받는 순간 갑자기 천사가 되거나 육체의 장막을 벗게 된 것이 아니었고, 교회의 일원으로 구별되었으나 여전히 피조 세계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 남아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돌이킨 신자들은 다시금 세상을 향하여 돌이켜 나아갑니다. 교회는 세상 안에서 살고 세상에 완전히 참여하는 공동체이며,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교회의 보편성은 자연히 세상 안으로 거룩한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4.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
그렇다면 세상 안에 존재하는 이 교회는 실제로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떤 범주를 가지고 교회를 정의하고 구분하듯이, 세상 역시 그런 방식으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는 무엇보다 성경이 그렇게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스파이크먼(G. J. Spykman)은 세상에 대해 3가지 의미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작품으로서의 세상, 인간 행동의 패턴들 및 사회적 관계와 구조로서의 세상, 그리고 악의 권세가 지배하는 세상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이 비그리스도인과 다른 점은, 세상을 ‘죄악되다’고 규정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세상을 다중적인 의미로 바라보는 데에 있습니다.
4.1. 신적인 창조 작품으로서의 세상
삼위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섬기는 교회가 그 창조 신앙을 올바르게 견지하고 있다면 피조 세계에 대해 그토록 무관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칼빈은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를 ‘극장’에 비유합니다. 자연 세계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성품을 숙고하는 일은 처음 천지 창조의 목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타락 이후 이 세상을 남겨두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우주 세계는 여전히 그런 점에서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이죠. 타락이 피조 세계의 ‘질료적인 변형’을 가져온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세상의 모든 자연을 하나님의 작품으로서의 고귀함을 상실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인류의 타락 때문에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사명은 훨씬 더 극대화되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공기, 물, 토양의 오염은 말할 것도 없으며, 타락이 가져다 준 산적한 문제들은 그 양과 질에 있어서 상상을 초월할만큼 거대한 과제로 주어져 있습니다.
아담에게 처음 부여하신 다스림의 사명은, 타락 이후 은혜 언약의 경륜 속에서 단 한 번도 축소된 적이 없으며, 오히려 그 다스림은 전체 인류 중에서도 특히 하나님을 창조주로 섬기는 택자들의 모임에서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할 몫인 것입니다. 자연적인 사람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려는 것이 결코 참 자유일 수 없듯이, 구속 받은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향하여 참여하지 않고서는 자신이 얻은 평안과 자유의 참된 완성을 결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얻게 되는 ‘안식’은 하나님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피조 세계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4.2. 사회적인 관계와 구조로서의 세상
피조 세계 전체는 언제나 인간들의 ‘주 활동 무대’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습니다. 범위에 있어서 후자는 전자에 속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양자의 관계는 일방적이라기보다 쌍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행동이 일어나는 사회가 가진 힘과, 피조 세계의 면류관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탁월성이 결코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무대를 구조와 체계로 파악하기 전에, 사회가 인간의 속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부조리한 사회 구조의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목소리를 내지만, 그러한 구조들을 출범시키고 정당화하는 인간들이 가진 자아상, 인간상, 사회상, 세계관을 뚫어보는 시력은 현저히 낮은 것이 사실입니다. 인간은 항상 외부에 자신을 반영하고자 하는 존재이며, 자신의 형상을 끊임없이 외현화합니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이해 없는 사회(에 대한) 이해는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외현화가 언제나 자신이 예상하는 결과를 수반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타인과의 불일치와 수많은 모순 속에서 고뇌하는 자기 실존을 발견케 될 때가 허다하지요.
이러한 정황에 놓인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 가운데 어떤 ‘교차 지점’에서 자기 자신을 공유하려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조차 이러한 수많은 교차 지점의 일부분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시대적으로 교회가 종교 기관으로만 통용되는 사회 인식을 무시하려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지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일원이라는 이유로, 교회를 사적 이익 집단으로 가두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교회가 내부에서 지나치게 많은 진영으로 섹트화 되는 것도 문제겠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범위에만 머무르며 수동적인 자세로 자신을 섹터화 하는 것도 문제겠지요. 우리 사회 속에서 교회는 자신의 섹터를 인정하면서도, 모든 문화의 ‘교차 지점’을 향한 영향력을 결코 상실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자연을 지배하고 세상 위에 군림하는 기구가 아님은 이미 종교개혁에서 개혁된 바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세상을 완전하게 이원화시키고 독립시킬 권한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며, 세상의 노예가 되어 자신이 가진 탁월한 복음의 가치를 상실하고 이를 빛내야 할 용기를 상실할 권리도 없습니다.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세상과 결코 단절되어 있지 않으며 모든 삶의 영역으로 자신을 도입시켜야 합니다.
4.3. 죄로 물든 세상
세상에 대한 이같은 개념은 앞선 이해와는 다소 대립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성경에서 어둠의 권세와 능력을 지칭하며, 회복되지 못한, 죄로 물든 모든 세상의 총체적인 면을 가리킵니다. 한 인간의 실존이 직면하는 모든 내외적인 환경과 그 너머의 현장까지 죄가 편만하게 퍼져있다는 것을 뜻하지요. 수많은 죄악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분명히 엄격하게 유죄판결을 내리실 것입니다.
우리가 자연 세계, 사회 구조, 인간의 인격에 영향력을 미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소유한 ‘하위의’ 자연을 ‘상위의’ 자연으로 교체시키고 바꾸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모든 것에 침투한 이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세상, 곧 죄의 다스림으로부터 자유케하며, 거룩하고 새롭게 참 자연으로 회복시키는 일이지요. 자연과 동떨어진 초자연의 추구가 아니라, 자연을 변화시키고 갱신하는 은혜의 역사가 이 세상에 침투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이와 같이 다면적인 고찰을 하는 이유는, 삼자가 모두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새롭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존중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세상을 억압하지 않고, 마땅히 대적해야 할 세상을 회피해버리지 않기 위함이지요.
5. 참된 자연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은혜의 공동체의 노력
5.1. 무제한적인 사명
교회의 사명은 죄로 물든 세상을 원래 의도된 세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이 세상을 다스리도록 사명을 부여받은 모든 인간이 참 인간이 되는 것, 곧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바빙크가 통찰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독특한 인간’, ‘유별난 인간’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이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믿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곧 복음을 통하여 사회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겠지요. 그러나 복음을 간편하고 손쉬운 치료책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은, 전술한 문장에 담긴 엄청난 비약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그 간극을 메워야 할 우리의 사명이 무겁고 막중하며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복음이 구주(Savior)와 주님(Lord) 되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라면, 그 복음이 변화시킨 우리의 전인격과 우리를 새롭게 한 일상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구속주만이 아니요 교회의 머리만이 아니라, 우주 만물 전체를 장악하시는 주권자로 믿는, 그런 신앙을 가진 교회가 그물망처럼 얽히고설킨 세상에 고루 침투하여 그분의 주권을 선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교회가 증언하는 복음은 ‘우리가 가진’ 복음인 동시에, ‘그들이 받아들여야 할’ 복음이기도 하기에, 이 사명에 있어 교회는 복음의 외적인 전파에 따르는 ‘모든 자연적인 영역들’을 충분히 고려하게 되는 것이지요.
교회와 세상에 대한 이러한 고려는, 우리가 여전히 동일한 세상에서 여전히 동일한 부르심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에는 여전히 창조 질서에 속한 남자들과 여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부모이기도 하고 자녀이기도 합니다. 한 가정의 일원이기도 하고 사회의 시민이기도 하며, 국가의 백성들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다양한 과업들을 볼 때, 교회 전체가 감당해야 할 사명은 거의 ‘무제한적’입니다. 스파이크먼은 “모든 어부가 베드로 같은 설교자가 되고, 장막 만드는 사람 모두가 바울 같은 선교사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도를 실현하는 것은 곧 모든 종류에 있어서 문화적인 제자도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사명의 무한정성은 교회가 세상 속에서 하나의 단순한 구성요소로만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5.2. 어려운 긴장 관계
하지만 교회는 여전히 어려운 긴장 관계에 놓여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는 죄와 그 정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공동체이며, 이 자유함은 거룩함에 의해 규제되는 자유함입니다. 이와 같이 구별된 공동체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일은, 우리에게 양극단을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하는 일을 요구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교회에서 최대한 거룩한 체하고, 교회 밖에서 최대한 세상에 잘 적응된 삶을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거룩함과 세상을 향한 사명 양자를 기가 막히게 상쇄시켜 자신을 합리화하는 중립지대를 구현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 안에 거하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성도, 세상에 있지만 그 원리에 편승하지 않는 교회라는 정체성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논법 같아 보이며 오히려 우리에 인식을 찢어놓는 듯한 느낌이 들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이 긴장을 놓지 않고 자신의 존재와 삶과 공동체 속에서 통합하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요구됩니다. 우리의 예배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되지 말아야 함은 자명합니다. 세상이 우리의 삶으로부터 무슨 편지를 읽게 할지 준비되는 가장 본질적이고 일차적이며 집약된 형태의 모임이 바로 예배일 것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자신의 삶이 해석되고, 동시에 지체와 공동체의 총체적인 삶이 하나의 편지로 읽혀지는 모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와 교제라는 가장 구별된 모임은 세상을 향하여 화해의 사역을 수행할 편지로 준비되는 현장이어야 하는 것이지요.
5.3. 죄의 양식과 공동체적 노력의 당위성
죄는 사람의 영혼 안에 있는 어떤 경향성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식과 감정과 의지에 일정한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죄를 범하는 영혼에 대한 우리의 시선에는 공의와 사랑이 수반됩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있다면, 우리의 공의로운 판단은 죄가 침투한 모든 자연을 짓밟는 형태로 가지 않겠지요. 한 사람의 죄를 미워하면서도 그 존재를 사랑한다는 ‘객관화’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 교회에 소망이 있을까요.
그런데 죄는 단지 그 자체로 개인적인 행동 양식이나 상황으로만 국한시킬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죄의 성향과 타인이 가진 죄의 성향을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리덜보스(Ridderbos)에 따르면, 죄는 우리가 공유하는 것이며, 우리 존재의 초개인적인 양식과 관련됩니다. 이는 우리에게 죄를 극복해야 할 공동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 공동체가 세상을 향하여 가지는 사랑의 마음은 한 그리스도인이 타인을 향하여 가지는 사랑의 마음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이지요.
십자가의 죽으심은 모든 자연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하였으나, 그림자가 드리운 동일한 자연 위에 부활의 빛이 비취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일차적으로 이 빛을 보았고 자신들의 공동체에 그 빛을 공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빛이 최종적으로 향하고 있는 방향을 차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창조 세계의 회복을 지향하고 있는 부활의 빛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가 소유한 빛이며 우리가 가진 부활의 생명력은 우리 모두를 연결시키고 있는 유기적인 생명입니다. 이를 통한 창조 세계의 회복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일치하기에, 최종적인 완성과 회복을 열망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마땅히 세상을 향한 공동체적인 지향점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6. 나가며
교회의 존재와 사명을 한 호흡에 전부 써내려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이 글도 심히 제한적이고 부분적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교회에 대하여 고민하는 모두에게 교회가 가진 본래적인 위치와 궁극적인 지향점을 조금이나마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부족한 모양새를 갖춘 글을 쓰는 제 자신에게 다소간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공동체적인 노력을 지향하고, 창조와 모든 인류를 포괄하는 교회론을 가지는 일은 상당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탕’이겠지요. 그리고 그 위에 세우는 수많은 현실적인 고민도 사실상 움직일 수 없는 뼈대이거나 앙상한 하나의 줄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학문과 숙고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곳곳에 침투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화목케 하는 사역은 하나님의 사랑의 강권으로 주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열심이 주체가 된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주체가 되어야 하며, 그 사랑이 우리로 이 사명을 수행하도록 몰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우리의 노력이 부디 사랑의 확장으로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참고 문헌
Bavinck, Herman. “De Katholiciteit van Christendom en Kerk” (1888); trans. John Bolt, “The Catholicity of Christianity and The Church”. Calvin Theological Journal 27 (1992).
Bavinck, Herman. 개혁교의학 2. 부흥과개혁사 (2011).
Bavinck, Herman. 개혁교의학 4. 부흥과개혁사 (2011).
Ridderbos, Herman. 바울 신학. 개혁주의행협회 (2003).
Spykman, Gordon J. 개혁주의 신학.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