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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과 음악: 건설적인 방향을 위한 고찰

찬양에 있어서 음악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역사적으로 보아도 언제든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EDM(Electronic dance music)이 이슈가 되어서 찬반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지금 한국 교회의 상황을 비추어봤을 때 지금 EDM이 문제냐’라는 말에 동감합니다. 말 그대로 지금은 더 시급한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현재 교회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타락의 모습들을 생각했을 때, 지금 EDM 문제를 놓고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은 상당히 소모적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찬양의 대상이 하나님이시기에, 그리고 찬양이 우리의 신앙 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마냥 가볍게 다룰 문제는 또한 아닌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공감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찬성측이든 반대측이든 서로의 입장을 납득하지 않은 상태로 자신들의 생각을 확고히 하는 선에서 이 논쟁이 끝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난이 격렬했던만큼 서로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이 남은 상태에서 각자의 길을 가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여기저기서 많이 언급된대로 이미 오래 전에 드럼 사용 문제로 비슷한 논쟁이 있었지만 모두가 공감할만한 합의가 딱히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냥 지나가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20년 뒤에 비슷한 문제로 또 논란이 일어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이 글에서는 이 문제에 있어서 보다 건설적으로 나아가기 위해 생각해봐야 하는 것들을 다뤄보려고 합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쉽게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그 문제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차근차근 서로의 입장을 정리해보고 상대방이 그런 주장을 하는 근원에는 어떤 사상이 있는지 이해해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자기 입장을 진술하는 이와 그것을 듣는 이 모두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화가 나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겠지만, 어짜피 서로를 변화시키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디까지 서로가 동의할 수 있는지 그리고 서로가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만 잘 이해해도 상당히 고무적인 일일 것입니다. 최소한 서로가 자기 성찰은 할 수 있을 것이고, 찬양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좀 더 발전적인 방향성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 글을 쓰기 전에 이 논란 덕에 알게 된 힐송의 Young & Free의 앨범을 들어보았습니다. 쓰는 지금도 듣고 있구요. 한 마디로 괜찮네요. ‘This is Living’ 같은 경우는 크리스찬 힙합 뮤지션인 Lecrae가 중간에 랩을 하기도 했군요. Lecrae는 진짜배기 블로그에서 꽤 오래 전에 소개했었습니다. 리뉴얼하면서 아직 비공개로 닫아놓긴 했지만 말이죠(비공개한 이유는 편집을 아직 다 못해서입니다). 이 블로그에서 주로 글을 쓰는 3명 중 저를 제외한 나머지 2명은 사실 음악에 있어서 진보적(?)인 사람들입니다. 한 분은 데스메탈을 즐기고 밴드도 했으며, 다른 한 분은 힙합 클럽을 다니고 슬램도 즐기던 사람이었으며 지금도 힙합을 좋아하죠. 제가 제일 순둥이입니다. 아무튼 그런 제가 듣기에도 Young & Free는 나쁘진 않았습니다. 일단 앨범으로 듣는 것으로는요. EDM에 대한 제 편견을 조금 이나마 깨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서로가 갖고 있는 편견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어디까지 같은 견해를 공유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래야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구요.

 

1. 찬양과 음악의 관계

먼저 이야기할 부분은 찬양과 음악의 관계에 대해서입니다. 찬양에 있어서 음악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찬양할 때 음악은 무엇을 하나요? 즉 가사와 그 가사와 함께 표현하는 음악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이것이 먼저 살펴봐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현대에 들어서 음악이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논의가 한창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음악이란 어떤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는, 즉 의미를 지시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이 문제에 있어서 ’형식주의자’들은 음악이 의미를 지시한다는 것에 부정적입니다. 그러나 “음악이 늘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으며 그 일환으로 음악 기호학이 등장한지도 40여 년이 되었습니다. 1 영국과 미국의 음악학자들은 “다양한 관점에서 음악의 정서적 표현이나 의미의 문제를 탐구”해왔으며 우리나라에도 관련된 책들이나 논문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2

 

추상적인, 은유로서의 음악

물론 음악이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지칭하지 않는다고 보는 이들의 생각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음악이 여러 사람에게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죠. 구체적인 용어들을 사용해서 논리적으로 풀어낸 글들의 의미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데, 음악이 그 자체로 어떤 구체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의미를 지시할 수 있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음악은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추상적이고 일반적이고 은유적으로 의미를 지시하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켄달 L. 월튼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3

그러므로 음악은 분노와 두려움을 구별할 수 없다. 음악은 두려움과는 다른 분노를 특별히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음악은 두려움과 분노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 즉 두 가지 모두가 사례가 될, 느낌의 덜 구체적인 상태를 묘사해낼 수도 있다.

작곡가가 음악을 통해 분노를 표현했는데, 청자는 그것을 분노로 인식할 수도 있지만 두려움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표현했는데 분노로 인식할 수도 있구요. 그러나 그것을 기쁨이나 행복으로 인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즉 음악은 어떤 의미를 표현하기는 하는데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음악은 언어가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표현할 수 있기도 합니다. 월튼은 이렇게 말합니다. 4

음악은 극도의 특수성을 가진 정서의 ’역동성(dynamics)’을 잘 표현할 수 있는데, 음악의 표현 정도는 회화나 문학에서 쉽사리 또는 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정도보다 상당히 더 자세할 것이다. 음악은 격분과 두려움을 구별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누군가가 격분하거나 두려울 때 가질 수 있는 특정한 (비지향적인) 느낌들이나 기분(sensations)의 본성을 매우 정확하게 묘사해낼 것이다.

음악이 가진 추상적인 특성 때문에 음악은 어떤 것에 대해서 언어로 표현해내지 못하는 본질적인 부분들을 잘 포착해낼 수 있다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음악이 추상적이고 일반적이라서 어느 정도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는 면이 있지만, 그래도 표현해내는 의미의 영역이 있으며 그렇기에 전혀 상반되는 의미 영역으로 이해되기는 어렵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음악의 특성으로 인해 음악은 의미를 지시하는 것에 있어서 은유적이라는 견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은유라는 것은 두 대상 사이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한 대상으로 다른 대상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음악이 “은유적 언어”인 이유는 “음악은 말하려는 것을 언어로써 직접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 없고 음악적인 비유로써만 나타내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음악은 비음악적인 대상, 사건, 행동, 감정 등을 은유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5 그래서 “정서와 감정과 같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음악은 은유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라고 봅니다. 6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특정한 형태로 표현된 음악은 그것이 내적으로 지닌 특징들과 유사한 외부적인 대상들을 은유적으로 잘 표현해낼 수 있습니다.

음악의 이러한 은유성에 대해서는 복잡한 논의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음악이 인간의 경험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인지 인간의 경험이 음악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인지에 대한 관점의 차이도 존재합니다. 전자가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이라면, 후자는 정서적 경험이 추상적인 음악을 은유적으로 읽어내어 의미를 구체화시킨다는 것입니다. 7 둘 중 한 가지만 가능하다고 보기도 하는데, 전 둘 다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둘 다 중요한 시사점을 갖고 있는데요. 정서적 경험이 음악을 은유적으로 읽어낸다는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언급해보겠습니다.

 

제스처로서의 음악

음악이 의미를 지시하는가에 있어서 음악이 추상적이며 은유적으로 의미를 지시할 수 있다는 것이 위의 견해라면, 다른 측면에서는 음악이 제스처로서 의미를 지시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8

…음악을 하나의 제스처로서 지각한다는 것은 음악을 ’나’와 분리된 채 ’저기’에 동떨어져, 나의 무관심적 관찰을 요하는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나의 이해를 요청하며 나를 둘러싸고 있는 하나의 환경으로서 바라본다는 것을 뜻하며, 더불어 그것을 특별히 ’의미 있는 행위’라는 관점에서 구조화한다는 것을 뜻한다.

제스처는 “움직임인 동시에 의미의 전달자”입니다. 9 문화나 관습에 따라 몸짓으로 표현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상이한 측면이 분명 있습니만, 어떤 면에서는 서로 언어가 달라도 의사를 전달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도구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것도 추상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래서 제스처를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의 일종으로 봅니다.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이 갖는 의사 전달의 중요성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10

그래서 음악적 제스처 이론은 “공간 내에서 음악적 흐름이 생성해내는 역동적 움직임을 포착하고자” 하며, 그 제스처들이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으며 진행되는지를 통해 음악이 표현하는 내러티브를 읽어내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11 그리고 그러한 표현들의 “전반적인 음악적 맥락”을 통해 인간의 복잡한 감정들을 어느 정도 표현할 수 있다고 봅니다. 12 이런 측면에서 보면 제스처로서 음악은 어떤 의미를 더욱 잘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찬양에서 음악은 무엇을 하는가? – 가사와 음악의 상호작용

지금까지의 논의들을 토대로 음악은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음악을 듣는 청자에게 떠오르는 어떠한 해석된 의미는 “음악이라는 기호가 산출한 효과”입니다. 13 그것은 말로 전달하는 것과는 다른, 추상적이고 은유적이며 일종의 제스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음악을 통해서 무언가를 표현해낼 수 있습니다. 음악을 통해 사랑의 감정을, 기쁨의 감정을, 혹은 긴박감 넘치는 두근거림을 표현해낼 수 있습니다.

찬양에 있어서 음악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 즉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가 됩니다. 음악으로 하나님께 의미있는 표현을 하는 것이죠.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대로 음악은 추상적이고 은유적이라서 그런 감정의 표현을 명료하게 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의 찬양에는 가사가 있습니다. 가사는 추상적이어서 어떻게 해석될지 모르는 음악적 표현의 의미 영역을 잡아줍니다. 가령 어떤 음악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표현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보죠. 이것은 아이들이 계단을 뛰어 오르고 내리는 것으로 들을 수도 있으며, 희망과 낙담을 표현하는 것으로 들을 수도 있습니다. 14 이런 불완전한 의미 영역을 가사가 잡아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쁨을 음악으로 표현할 때, 가사는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어떤 기쁨인지 방향을 잡아줍니다. 추상적인 음악을 구체화시키는 역할을 가사가 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러나 또한 반대로 생각해보면 음악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감정을 표현해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며, 그러한 하나님의 속성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경험이 찬양으로 터져나올 때 음악은 언어가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들의 본질적인 부분들을 짚어내어 그것을 풍성하게 표현해줍니다. 은유적이고 추상적이며 제스처와 같은 음악의 특성은 찬양이 역동적이고 다채로우며 풍성할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므로 저는 찬양에 있어서 가사와 음악의 관계를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가사와 음악의 관계는 방향키와 노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즉 가사는 찬양의 방향을 결정하고 길을 잡아주며, 음악은 찬양이라는 배가 힘차게 나아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가사와 음악은 각각 의미의 전달자로서 역할하지만 서로가 갖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만날 때 서로가 상호작용하여 의미 깊고 풍성하고 아름다운 찬양이 되게 만들어줍니다.

 

찬양에 있어서 음악은 감정을 조작하는가?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음악의 감정 조작 여부입니다. 조작이라는 표현 자체가 우리에게 부정적으로 다가오긴 합니다. 하지만 음악의 특성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호학적으로 ’화용론’의 측면에 있어서 음악은 전이, 암시, 즐김이라는 효과가 있는데, 다음은 전이 효과에 대한 설명입니다. 15

(전이 효과란) 기호의 역할이 감상자의 감정적, 육체적 반응을 겨냥하는 것이다. 전이 작용은 대상에 대해 알리는 것에 의미가 있다. 감정적 요소를 표현하거나 움직임과 함께 하는 기호로서 감상자에게 두 가지 방법으로 인지된다. 첫 번째는 감상자에게 실제적이고 직접적으로 느낌이나 특유의 움직임을 가져오게 된다. 즉 감상자의 기분 상태 자체가 직접 조작되어 감상자의 호흡의 리듬에 영향을 주고 감정의 흥분 상태를 초래한다. 두 번째는 감상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어 반응을 이끄는 것은 아니고, 단지 대상을 심상적으로 인지하는 것이다. 선율, 다이너믹, 음색, 화성 등을 통해서 표현되는데, 감상자는 이러한 음악 요소들을 모두 동시에 종합하여 마치 하나의 개념처럼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음악 언어에서 전이 작용의 기능은 기호와의 조건 반사적인 연관으로 인하여 이 반응의 호응도에 따라서 심리 신체적인 반응으로 전이되는 것을 말한다.

음악은 필연적으로 전이 효과를 가지며, 사람의 마음과 감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음악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긍정적으로 쓰일 수도 있고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이건 음악만이 아니라 사실 우리가 가진 대부분의 것들이 그렇죠. 음악의 특성을 무시하고 무조건 조작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특성은 잘 쓰면 찬양 중에 공동체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즉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습니다. 음악이 갖는 지시적인 특성으로 인해서 번잡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긍정적인 방향성을 잡아줄 수도 있습니다. 다윗이 악령이 임한 사울을 치료하던 수단이 음악이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음악은 잘 사용하기에 따라서 찬양할 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합당한 감정을 고양시켜주는 도구가 됩니다.

어렵다면 어려울 수 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지점까지 동의가 되시나요? 아무래도 상이한 견해들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이 부분까지는 어떤 입장을 가진 분들이든 간에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음악이 어떤 의미를 잘 표현해주는 도구가 된다는 위의 논의의 내용들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가령 영화나 드라마만 보더라도 그 장면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공감하게 하기 위해서 적절한 배경 음악들을 사용하려고 하니까요. 아마도 의견이 갈리고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들은 다음 단락에서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찬양에 있어 특정 음악의 적합성 문제

다음으로 생각해볼 문제는 찬양을 하는 것에 있어서 어떤 음악을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찬양을 하는데 적합한 음악과 적합하지 않은 음악이 있을까요? 만약 적합함과 부적합함에 대한 기준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음악의 도구일까요, 혹은 장르일까요? 이 부분이 서로의 의견이 충돌하는 근원적인 부분일 것입니다.

 

적합한 은유와 제스처로서의 음악적 표현

찬양이 하나님께 대한 어떠한 특정한 감정의 표현이라면, 그에 적합한 음악적 표현 방식이 있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위에서 살펴본대로 음악이 은유적으로 그리고 제스처로서 의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면, 그것이 언어보다는 추상적이고 덜 구체적이라 할지라도 특정 영역을 표현하는데 국한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은유란 것이 다양한 것들을 표현해낼 수는 있지만, 유사성이 없을 경우 그 은유는 적절하지 못하며 의미 전달을 방해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우리는 바다를 광대하고 넓은 것으로 이해합니다. 어떤 사람이 성격이 아주 쪼잔하다고 할 때, “그 사람의 마음은 바다 같아”라는 은유는 그 쪼잔함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의미 전달의 장애물이 되어버립니다.

제스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이를 갈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사실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그의 기쁨은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어떤 문화에서는 찡그리고 이를 가는 것이 기쁨의 표현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거기서는 찡그리고 이를 가는 제스처로 분노의 표현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겠죠.

그렇기에 찬양을 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표현하는 특정한 신앙 감정에 대한 적합한 은유와 제스처로서의 음악적 표현은 존재합니다. 어떤 음악적 표현은 하나님을 향한 회개를 잘 표현해낼 수 있을 것이고, 동시에 그 음악적 표현은 다른 종류의 신앙 감정을 잘 표현하지는 못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어떠한 감정을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다양함이 무한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표현 방식은 특정한 감정을 표현하기에 안 어울립니다. 그 범위에 있어서 견해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이 정도까지는 서로가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적어도 제가 읽어본 서로의 견해들에서 저는 그런 생각들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르 문제: 이 음악은 어떤 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제 장르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네요. 음악은 각 시대마다 다른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구현해왔으며, “그 방식에는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과 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16 음악에 있어서 장르는 어떤 공유되는 전통이나 관습들의 집합으로 구별될 수 있는 관습적인 범주를 가리킵니다. 17 이 장르는 음악적 형식이나 스타일과는 구분되기도 하지만, 음악의 테크닉, 스타일, 문학적 맥락, 다루는 주제의 내용 등에 의해 정의되기도 합니다. 18 그런 측면에서 어떤 음악 장르는 단순히 어떤 도구를 다루느냐를 넘어서서(물론 그것이 관련되겠지만) 사람들의 공유된 정신이 담겨 있는 어떠한 특정한 표현 방식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음악 기호학에서는 장르 또한 의미 전달의 기호적 기능을 한다고 봅니다. 19

음악 장르도 역시 시대를 반영한다. 사회 역사적 지식을 갖추어야 장르 기호를 이해할 수 있다. 장르의 의미는 또한 가치 특성을 갖고 있으므로 가치론적 등급을 갖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고상하고, 의미 있고, 진지한” 장르와 “범상하며, 오락적이고, 유행적인 의미”의 장르가 있다. 음악 장르 역시 그 장르에서 기대되는 특정한 형식이나 분위기가 있으므로 기호적 기능을 한다.

이런 판단에 기초했을 때, ’어떠한 특정 장르는 특정한 표현을 잘 해낼 수 있으며, 어떤 표현은 잘 못 할 수 있다’는 명제를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어떤 장르가 뛰어나고 어떤 장르는 저급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한 장르는 특정한 감정 표현들을 잘해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힙합이 사회적인 메시지를 통렬하게 표현하기에 적합한 장르라면, 우리 나라의 전통 음악들은 ’애절한 한’을 표현하기에 적합하죠. 발라드만큼 뭉클하고 부드럽게 사랑을 표현하는 장르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토속 음악은 사냥을 준비하기 위한 긴장감과 그것을 극복하는 용기를 표현하는 것에 적합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는 것은 다른 것을 표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음악의 추상성은 특정한 감정들을 잘 표현해내던 장르가 다른 감정들도 잘 담아낼 수 있다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찬양을 할 때 우리는 장르를 창조해내기보다는 외부에서 장르를 끌어와서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요구되는 과제는 ’과연 이 장르는 신앙의 특정한 감정들을 잘 표현해낼 수 있는가’를 숙고하는 것입니다. 무슨 장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특정한 도구의 문제가 아니다

장르라는 것의 구분 자체가 상당히 주관적이기도 하고 겹치는 면도 많이 있기 때문에 칼로 무 자르듯이 선을 그을 수는 없지만, 아무튼 어떤 장르는 그 장르가 주로 잘 해내는 표현이란 게 있긴 합니다. 이건 어떤 도구를 다루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악기들을 사용해서 어떤 음악적 표현 방식을 사용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어떤 것을 표현할 때 어떤 음악을 사용해야 효과적일지에 대한 연구는 상업적 광고 분야에서도 연구가 되고 있습니다. 효과적인 배경 음악을 사용해야 매출이 증대할테니까요. 그래서 어떤 브랜드인지에 따라서 어떤 음악 장르를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인지에 대해 연구하기도 합니다(그렇지만 꼭 어떤 장르를 쓰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아니다로 날카롭게 구분해낼 수 있지는 않습니다). 어떤 광고에는 어떤 장르가 딱이다라는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음악의 구조적 특성이 광고에 있어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관련된 연구가 진행되고 있죠. 20 상업적인 광고를 할 때에도 무슨 음악을 써야 되는지 이렇게 고민하는데,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에 어떤 음악을 쓰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서는 더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DM의 특정한 방식들은 특정한 신앙 감정들을 잘 표현해낼 수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EDM의 특정한 음악적 표현 방식들이 우리의 신앙 감정의 어떤 부분들을 적합하게 표현해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전반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있지만, Young & Free를 들으면서 가능성도 많이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어떤 신앙 감정들에 대해서 적합한 표현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EDM에서 음악으로 표현하는 특정한 방식들은 신앙의 감정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듣기에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신앙 감정이 저렇게 표현되면 안 될 거 같은데’라는 인식을 주기 때문에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게 물론 취향의 문제나 세대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모두 다 그런 문제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일 것입니다.

특정한 신앙 감정을 특정한 장르가 독점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신앙 감정을 여러 장르가 잘 표현할 수도 있죠. 그러나 잘 표현하지 못하는 장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장르로 표현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의 뉘앙스가 굉장히 다채로와질 것입니다. 저는 크리스 탐린의 ’jesus messiah’를 좋아하는데, 우리 구원자이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멋지고 웅장하고 가슴 뛰는 감정을 잘 담아내는 찬양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장르의 표현 방식으로도 이런 감정들을 잘 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방식에 따라 좀 더 엄숙한 웅장함을 표현할 수도 있겠고, 더 비장한 표현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감정들 담아내기에 적절하지 않은 표현 방식도 있다는 거죠. 그런 측면에서 저는 EDM이 제대로 표현해낼 수 없는 신앙 감정들이 있다고 보는 것이구요.

 

나의 경험이 은유해내는 음악

한 가지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은 위에서 다루었던 은유에 대한 문제입니다. 단지 음악이 은유적으로 어떤 감정을 지시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어떠한 경험적인 정서가 음악을 은유적으로 읽어내고 지시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이야기했었죠. 어떠한 장르, 그것의 음악 형태는 그들의 문화 가운데서, 어떤 특정한 감정을 표현하기에 적절하게 발전되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장르를 즐기며 그 문화 가운데 있던 사람들은 그 특정한 감정을 그 장르로 표현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런데 그 장르를 그 문화 속에서 즐기던 사람들에게 동일한 표현 방식으로 가사만 찬양으로 바꿨을 때, 그 찬양 가사는 음악의 의미를 제대로 잡아주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나의 경험은 은유적으로 오히려 내가 신앙 감정이 아니라 그 음악적 표현 방식으로 표현해왔던 이전의 감정들을 더 강하게 지시할 수 있으며, 그래서 그것들은 신앙 감정의 표현을 방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 익숙하기 때문이죠. 특별히 가사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치명적입니다.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단 EDM에만 국한해서 이야기한다기보단, 모든 음악 장르에서 이런 일들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신앙 감정이 어떠해야하는지에 대한 생각은 각기 다를 수 있겠지만, 그것이 세상의 문화에서 경험되는 감정과 어떤 식으로든 차별되어야 한다는 것은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표현 방식이 똑같은데 가사만 바뀌었을 경우, 가사가 지시하는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청자의 경우 신앙 감정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너무 염려가 많은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경험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보편성과 다양성

한 신앙 감정은 다양한 음악적 방식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방식은 그것을 더 잘 표현해내며, 어떤 방식은 그것을 표현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물론 시대마다 변하는 장르에 따라서, 사람들이 익숙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이 다양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그들의 관습에 따른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시대를 초월해서 보편적으로 우리에게 와닿는 표현 방식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가톨릭의 미사에서 성가가 추구했던 엄숙하고 신비롭고 장엄한 느낌이 우리에게 다른 느낌으로 와닿지는 않습니다. 시대와 문화를 뛰어넘어서 웅장한 것은 웅장하게, 경쾌한 것은 경쾌하게 들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화에서 그 상황에 맞게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을 사용하는 것이겠죠. 시대와 문화가 달라져도 어느 정도 통하니까요.

 

3. 성찰을 위한 제언

너무 많은 말을 한 거 같네요. 간단하게 제 견해만 이야기하자면, ’찬양에 있어서 신앙 감정을 적합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음악적 표현 방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단순히 주관적인 취향과 편견의 문제인 것만은 아닙니다. 저는 찬양을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 비유하고 가사와 음악의 관계를 방향키와 노의 관계로 비유했었습니다. 음악과 가사가 적절히 조화될 경우 찬양이라는 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힘차게 항해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사와 음악이 따로 놀면, 망망대해를 표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찌되었든,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이렇게 견해가 갈리는 것의 원인은 다음의 두 가지에 있을 것 같습니다. 1) 우리의 신앙 감정에 대한 견해가 다르거나, 2) 표현 방식에 대한 견해가 다르거나입니다. 신앙 감정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면 그것은 신학적인 논의가 필요한 문제지 음악적인 논의가 필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표현 방식의 문제라면 지금까지 다룬 이야기들이 서로 대화를 나눠볼 화두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찬양의 문제에 있어서 보수 쪽과 진보 쪽(이렇게 나눠볼 수 있다면) 각각이 생각해봐야할 것들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보수적 입장을 가진 분들은 지금까지 불러온 찬양들이 과연 가사가 표현하는 신앙감정을 표현하기에 적절한지에 대해서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시편 찬송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이 시편의 가사가 다루는 내용에 합당한 음악적 표현을 해내고 있는지에 대해서 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솔직히 그렇지 못한 것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회중이 함께 그런 감정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적절한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전 지금 찬송가가 회중 찬양으로 하기에 음이 너무 높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적인 입장을 가진 분들은 (만약 위에서 다룬 내용들을 어느 정도 동의한다면) 옹호하는 음악적 표현 방식들이 ’무엇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성찰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감정을 표현해내기에 진실로 적합합니까? 저는 경외감은 경외감을 표현하기에 합당한 방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도 예의범절을 따지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대하는데 합당한 방식이 없을까요? 경외감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견해가 아주 많이 다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견해가 같다면, 표현 방식에 대한 보다 깊은 고찰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부탁드리는 이유는 그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과유불급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신앙 감정들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보다 깊은 고찰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야 그것들이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테니까요. 더불어 그런 감정들을 탁월하게 표현해내는 크리스천 음악가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문화 창조’라고 생각하구요. 저는 그리스도인들의 음악은 세상과 어떤 식으로든 차별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세상에 EDM이라는 단 하나의 장르만 있게 되었다고 가정해보면, 그 상황에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으로 찬양을 할까요? 제 생각엔 EDM을 쓸 거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 방법이 바뀌어져 갔을 것이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경건함을 비롯한 다양한 신앙의 감정들이 세상과 차별화되는 방식으로 표현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구별해낼 수 있을 정도로 말이죠.

이번에 EDM 논란의 관련 글들을 보면, EDM을 찬성하는 분들이 크리스찬 뮤지션으로써 그런 차별화를 추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어떤 것이 회중 찬양에 적합한 방식인지에 대한 고민도 하시는 것 같고요. 물론 동영상으로 보게 된 부분들 중에 제가 동의하지 않는 요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더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여전히 서로 동의하지 않는 부분들이 많을 수 있겠죠. 어떤 입장이든 간에, 그것을 넘어서서 이 글이 한번쯤 시간내서 고민해볼 가치가 있는 화두가 되었길 바랍니다. 더불어서 많은 찬양 사역자들께 이런 부분에 대해서 고민해주시기를, 그리고 이미 고민을 했다면 어떻게 우리가 건설적인 찬양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시고 실제로 음악으로 ’표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각주

1: 강나원, “음악의 의미와 대상의 문제: 퍼스의 기호학적 접근” 「서양음악학」 제 18–2호: 59.

2: 오희숙 책임편집, 『음악, 말보다 더 유창한』 (음악미학연구회, 2012), 181.

3: 켄달 L. 월튼, “음악의 추상성이란 무엇인가?” 『음악, 말보다 더 유창한』, 54.

4: 켄달 L. 월튼, “음악의 추상성이란 무엇인가?” 『음악, 말보다 더 유창한』, 58.

5: 김미애, “음악 기호학의 이론 연구” 「연세음악연구」 제 7권 (2000): 20.

6: 김미애, “음악 기호학의 이론 연구”, 21.

7: 이에 관하여는 제니퍼 로빈슨, “음악이 정서적 삶의 은유로 기능할 수 있는가” 『음악, 말보다 더 유창한』, 181–209를 참고하라.

8: 정혜윤, “음악적 제스츄어 – 영상도식에 의한 해명의 시도” 「서양음악학」 제 15–3호: 149.

9: 정혜윤, “음악적 제스츄어 – 영상도식에 의한 해명의 시도”, 147.

11: 박유미, “내러티브의 단초로서의 음악적 제스처” 「음악이론연구」 제 23집: 144.

12: 제니퍼 로빈슨, 그레고리 칼, “쇼스타코비치 10번 교향곡과 인지적으로 복잡한 감정의 음악적 표현” 『음악, 말보다 더 유창한』, 389.

13: 강나원, “음악의 의미와 대상의 문제: 퍼스의 기호학적 접근”, 85.

14: 제니퍼 로빈슨, “음악이 정서적 삶의 은유로 기능할 수 있는가” 『음악, 말보다 더 유창한』, 198.

15: 김미애, “음악 기호학의 이론 연구”, 12.

16: 이건용, 『작곡가 이건용의 현대음악강의: 현대음악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시대정신을 어떻게 담아냈는가』 (한길사, 2011), 7.

18: 위의 링크 참조.

19: 김미애, “음악 기호학의 이론 연구”, 12.

20: 이에 관하여는, 최일도, “광고 배경음악의 특성이 브랜드 이미지에 미치는 영향: 음악의 장르별 특성을 중심으로” 「한국광고홍보학보」 제 7–2호: 35–72를 참고하라.

Over de auteur

재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 17세기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의 교회론을 연구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의들, 특히 교회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Comment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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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감사합니다. 찬양과 음악과의 관계에서 약간의 고민이 있었는데 정리되는데 도움이 됐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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