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하나님의 공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를 믿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는 만족을 얻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문25.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시는가?

답.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시는 것은 단번에 자기를 제물로 드려 하나님의 공의에 만족하게 하며 우리를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항상 간구하시는 것이다.

이 단순한 기독교의 교리는 우리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교회 안팎으로 수많은 불의를 목격합니다. 지금 이 시대 대한민국을 살아가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조금만 봐도, 너무나도 불의한 일들이 넘쳐 흐릅니다. 괜히 헬조선이라는 용어가 유행하는 것이 아니죠. 세월호 사건만 봐도 지금 1년 반이 넘게 시간이 흘렀는데, 제대로 해결되기보단 문제만 더 악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세속 사회만 비판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에서 드러나는 문제들도 굉장히 심각하기 때문이죠.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의 온전치 못한 양심 속에 있는 정의에 대한 기준조차 만족되기 어렵다는 것을 날마다 경험합니다. 과연 정의는 세워질 수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과 우리는 정의에 대한 기준의 급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만족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공감이 잘 안 되지 않나요?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형벌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무한히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형을 당하셨죠. 형벌의 크기는 곧 죄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서 사형을 당하셔야 할 만큼의 형벌이 감당할 수 있는 죄는 어마어마하게 큰 죄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죄악들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십자가 형벌은 그것에 대한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의 무게가 얼마나 거대하고 절망적인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이 땅에서 비참한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은 사람의 죄가 그만큼 끔찍한 것이며 절망적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을 십자가는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은 죄와 죄로 인한 세상의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십자가는 그런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죠. 그러나 단순한 사랑과 용납만이 아니라 공의를 위해서도 십자가는 이 땅 위에 세워졌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를 충만하게 드러냅니다.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십자가를 통해 그들의 죄에 대한 공의가 만족을 얻었다는 것을 드러내며, 다른 한편으로는 회개하지 않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조차 자기 백성을 대신해서 그것을 감당하셔야만 했는데, 그 누구라고 예외가 될 수 있을까요?

그렇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며, 불의한 것을 불의하다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는 공의가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회개하고 돌이켜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이 회개는 단순한 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비참함을 깨닫고 그것을 미워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돌이키는 것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에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문 76. 생명에 이르는 회개란 무엇인가?

답. 생명에 이르는 회개란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에 의해서 죄인의 마음 속에 이루어지는 구원의 은혜이다. 그로써 자기의 죄의 위험성과 더러움과 추악함을 보고 느끼고 통회하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깨닫고 자기 죄를 몹시 슬퍼하고 미워하는 나머지 그 모든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와 범사에 새로 순종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끊임없이 동행하기로 목적하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 죄에서 돌이키라는 것을 전하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온전히 전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불의하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공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절망하는 이들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애통하지만 절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 배우게 됩니다. 그 공의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절망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부족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회개하고, 회개할 것을 외치고, 그러면서도 변하지 않는 환경 속에서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십자가를 바라보며 다짐하게 됩니다. 지금은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부르짖는 때지만, 분명 하나님의 공의가 온 세상을 덮을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Over de auteur

재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 17세기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의 교회론을 연구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의들, 특히 교회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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