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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를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할 것인가?

샤갈의 Song of songs

이 글을 시광교회의 부부들에게, 특별히 2015년 10월 31일에 결혼한 권윤성-서금옥 커플에게 헌정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전인을, 특히 그들의 결혼을 죽는 날까지 지키시고 구원하시길 간구합니다.


  성경을 일독하기로 결심하고 꾸준히 읽어가다 보면 그만 읽고 싶은 충동이 드는 부분이 종종 있습니다. 일단 처음 만나는 복병은 출애굽기 후반부인데, 성막을 만드는 과정에 이르면 이걸 왜 읽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치밀어 오르지요. 수도 없이 등장하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출애굽기에 26회 등장합니다!)의 반복, 재료와 재료를 구성하는 방법 등에 대하여 지루하게 읽다보면 성경읽기 힘든 부분의 끝판왕, 레위기가 등장하지요.

어찌 어찌 레위기를 지나 민수기의 사람 수 세는 이야기와 여호수아의 땅 이야기, 역대상의 8장에 이르는 긴 족보를 지나고 나면 시가서가 등장합니다. 시가서는 묘하게 읽는 맛이 있는데, 우리 자신의 경험과 맞물려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많기 때문이겠지요. 시편과 더불어 지혜의 보고인 잠언, 그리고 노년의 지혜인 전도서, 고난 받는 시기의 지혜인 욥기를 지나면, 두둥! 아가서가 등장합니다.

아가는 우리를 당혹하게 합니다. 내용이 전형적인 연애시(戀愛詩)인데다가, 심지어 에로틱한 표현까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처음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어린 사슴 같구나”(아 4:5) 라는 말씀을 만났을 때 어찌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하나뿐인데, 그냥 빨리 대충 읽어버리는 것이지요. 어디선가 어설프게 들었던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사랑을 말하는 책이다’ 라는 해석원리를 대충 대충 적용시켜 가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대충 읽어 내려가다 보면 본문의 정확한 원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일단 한글성경을 읽는 우리들은 대체 이 말이 남자가 하는 말인지 여자가 하는 말인지도 분간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정말 모든 의미가 속속들이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각각 단어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되지요. 그래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요한계시록과 마찬가지로 아가서 이해하기를 포기해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간략하게나마, 아가서를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긴 교회의 역사 가운데 어떤 해석이 있었는지를 간략히 살피고, 아가서를 기록한 저자의 원의도가 무엇이었을 지를 염두에 두고 바른 해석을 제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바른 해석에 근거한 올바른 적용이 무엇일지도 생각해 보지요. 우선 해석의 방법에 대하여 생각해 보되, 교회 역사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오래된 해석인 풍유적 해석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I.아가서의 해석

1.풍유적 해석(Allegory)

이 해석방법은 아가서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사랑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풍유적인 방식으로 쓰인 책이라고 보는 방법입니다. 사실 이러한 해석은 아가서를 저속하고 세속적인 책으로 보는 입장에 대하여 성경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반발로 일어난 것 같습니다. 실제로 유대교의 전승문헌인 ‘미쉬나’에 보면, 아가서의 정경적 권위를 의심하는 랍비 요세(Yose)에게 랍비 아키바(Aqiba)가 “모든 성경이 거룩하지만, 아가서는 그중에서도 가장 거룩하오”[1]라고 일갈하지요. 그러면서 아키바는 “아가서를 부를 때 목소리를 꺾는 듯 부르면서 세속적인 노래로 취급해 버리는 사람들은 다가올 세상에서 제외될 것이다!”라고까지 말했습니다.[2] 즉 아가서를 일반적인 연애시로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랍비들은 아가서를 알레고리로 해석했습니다. 즉 읽으면 바로 알게 되는 문자적 원의미(Original Meaning) 이면에 숨겨진 뜻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남자와 여자의 사랑시 전체를 이스라엘과 하나님간의 관계와 사랑을 노래한 의미로 해석합니다. 예를 들자면, 아까 언급한 4:5절을 읽어볼까요? 여성의 육체를 표현하는 시라서 조금 낯 뜨거울 수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이니 경건하게 읽어봅시다.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어린 사슴 같구나 (아 4:5)

이 본문에 대해 탈굼(Targum, 구약성경의 아람어 번역본, 단순한 번역이 아닌 해석에 가까움)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 두 ‘유방’은 모세와 아론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들은 쌍태 어린 사슴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가르침과 사역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영적 양식을 먹었다고 말하지요.[3]

또한 기독교 해석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대 기독교 해석가들 역시 이러한 야한(?) 본문을 절대로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일종의 죄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침례교 주석가인 존 길(John Gill)은 위의 두 유방을 보며 수도 없이 많은 알레고리적 해석 및 적용을 해냅니다. 그는 복음으로 교회를 양육한 초기 사도들이라고도 생각하고,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하며, 세례와 성찬의 두 성례라고도 생각합니다. 즉, 그는 두 유방이 쌍으로 있는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들을 다 암시한다고 보지요.[4] 하지만 이 해석은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살펴보지요.

첫째, 이 해석은 저자(저는 솔로몬이라고 봅니다)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을 의미를 해석자 마음대로 넣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본래 성경해석의 기본은 ‘저자’(영감 받은)가 의도한 원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원의미가 바로 성령님께서 교회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솔로몬이 과연 두 유방에 대하여 말할 때 시내산 언약의 두 돌판이나 모세, 아론을 생각했겠습니까? 아니, 신약과 구약성경을 생각했겠습니까? 그랬을 리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가 교회에서 주로 많이 부르는 ’You Raise Me Up’이라는 노래를 생각해 봅시다.[5] 사실 이 노래는 기독교인이 가스펠송을 만들기 위해 쓴 곡이 아니고, 영국의 뉴에이지 밴드인 ‘시크릿 가든’이라는 그룹의 노래입니다. 하지만 가사의 ‘You’를 하나님으로 생각하면 워낙 기독교인들의 정서에 딱딱 들어맞는 면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에게 크게 사랑을 받았지요. 그래서 한국컨티넨탈싱어즈는 ‘날 세우시네라’는 이름으로 번안곡을 낸 적도 있었고, ‘장윤영’이라는 가스펠 가수도 ‘나의 영혼 연약하여 지치고’라는 이름으로 번안곡을 낸 적이 있습니다.

뭐 적용이야 아름답게 해서 울고불고 은혜 받고(?) 할 수 있지만 어쨌든 이 곡은 세속적 사랑을 노래한 곡입니다. 즉 시크릿 가든이 쓸 때의 ‘원의미’는 하나님과 관련된 의미는 전혀 없었던 것이지요. 뭐 팝송을 이렇게 이해하고 부르는 것이야 큰 무리가 없겠습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해석할 때 저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의미를 집어넣는 것은 잘못입니다.

둘째, 너무도 당연한 결과지만 알레고리적 해석을 하는 주석가들은 늘 서로 해석이 맞지 않게 됩니다. 물론 성경에는 난해구절이 존재하며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주석가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한 권의 자세한 해석이 천차만별인 것은 잘못된 것이며, 이것은 해석방법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즉, 알레고리 해석방법은 주석가의 상상력과 편견이 지나치게 들어갈 가능성이 있기에 피해야 할 방법입니다.

셋째, 알레고리적 해석방법은 기독교 메시지의 본질에 뿌리를 두고 있기보다는 영지주의적 신플라톤 철학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해석입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음식과 성(性)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딤전 4:3 참조). 하지만 영지주의는 육체가 악하고 약하기에 저급하고, 영혼만이 선하고 고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세계관 아래에서 아가서는 저급한 영역이라 여겨지는 ‘성’, ‘사랑’, ‘데이트’ 등의 주제를 다루는 책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보통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 시의 어떤 부분의 알레고리적 해석도 신학적이거나 주해적 가치를 가진다고 믿지 않는다.”[6]고 말한 두웨인 가렛(Duane Garrett)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원의미에 집중해야 하며, 그것은 일상적이고도 평이하고, 명료한 읽기를 통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특히 기독교 내의 해석 역사만 1,800년이 넘어가는 알레고리 해석을 몽땅 무지의 소산으로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물론 알레고리로 본문을 해석하는 것은 본문의 원의미를 가리기에 따를 수 없지만, 아가서를 보며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교회를 떠올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이미 결혼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백성과 그리스도의 연합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래에 설명할 ‘모형론적 적용’을 이해하고 풍성하게 설명해 주기 위한 기초로써, 알레고리적 해석은 알아두어야 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조금 이따가 더 자세히 생각해 보지요.

2.드라마 대본으로 보는 해석

이 해석방법은 아가서 전체를 일종의 드라마 대본으로 보는 해석방법입니다. 사실상 자코비(J. F. Jacobi)와 뢰비손(S. Löwisohn)에 의해 제기된 이 해석방법은[7] 이후 델리취(Delitsche)에 의해 발전되고 대중화 되었지요. 그는 아가서가 희곡이나 뮤지컬을 위한 대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해석방법도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1) 2인극 이론

2인극 이론은 아가서가 솔로몬(또는 솔로몬과 같은 남자)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이야기라고 받아들이는 해석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델리취는, 아가서를 여섯 개의 막(Acts)으로 구성된 회곡이라고 봅니다.[8] 이것은 재미있으니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여섯 개의 막은 다음과 같습니다.

1막 – 연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이야기 (1:22:7)

2막 – 연인들이 서로를 찾고 발견하는 이야기 (2:8–3:5)

3막 – 매력적인 신부와 결혼 이야기 (3:6–5:1)

4막 – 멸시받은 사랑, 그러나 다시 사랑을 얻게 되는 이야기 (5:2–6:9)

5막 – 매혹적이고도 겸손한 왕비인 술람미 여인 이야기 (6:10–8:4)

6막 – 술람미 여인의 집에서 사랑의 언약이 인정받는 이야기 (8:5–14)

여기서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은 서로를 사랑하고, 갈등도 있지만 서로를 갈망하며 결혼하게 되며, 사랑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언약적 사랑을 지켜내는 두 배우로 등장합니다. 물론 이 해석방법도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래도 드라마 대본으로 보는 해석인데다가 이야기 진행이 흥미진진해서 참 재미있습니다(사실 델리취의 주석이 가장 재미있습니다). 델리취 외에도 굴더(M. D. Goulder)는 14개의 막을 꾸며내는데[9], 온갖 상상력이 동원되어 무진장 재미있는 막장드라마(?)가 펼쳐집니다.

2) 3인극 이론

3인극 이론은 아가서 이야기의 주인공이 세 명이라고 가정하는 해석방법입니다. 기본적인 스토리라인을 설명하자면, 시골에는 서로 사랑하는 술람미 여인과 이름 모를 ‘목동’이 있는데, 탐욕스럽고 정욕에 가득한 솔로몬 왕은 술람미 여인을 끌어들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합니다. 요건 1:4의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는 술람미 여인의 말에서 ‘왕’과 ‘너’를 다른 인물로 보고 해석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해석의 가장 유명한 예는 NIV Application Commentary의 아가 부분을 쓴 이안 프로반(Iain Provan)의 주석에서 나타납니다. 프로반은 아가서의 여자를 솔로몬의 후궁이라고 가정하고, 그녀는 궁궐 바깥에서 살고 있는 목동 연인을 사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프로반은 강압적으로 여인을 쟁취하려는 솔로몬의 유혹과 압제에 맞서 첫사랑을 지켜내는 이야기로 아가서를 읽어냅니다.[10]

위의 두 가지 ‘드라마 대본’ 해석방법에도 몇 가지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습니다. 가장 커다란 문제는 바로 본문을 드라마로 이해하기 위해서 해석자의 상상력을 지나치게 많이 집어넣는다는 것입니다. 즉, 아가서 자체만으로는 주석가들이 제안하는 재미있는 드라마를 구성할 만큼의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데, 억지로 이야기를 집어넣는 것이지요.

프로반의 3인 드라마 이론은 그 억지가 더욱 심합니다. 아가서 1:4은 얼마든지 히브리 시의 병행법상 ‘왕’과 ‘너’를 동일인물로 생각할 수 있으며, 그렇게 본다면 3인 드라마 이론이 자리잡을 근거는 거의 사라집니다. 그래서 두웨인 가렛은 프로반의 해석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프로반의 주해는 해체적(deconstructive)이다. 그는 사회적으로 해체적 의미를 얻어내기 위해서 본문의 언어로 게임을 한다. 그리고 모든 부분에서 그것은 강요되고 있다.”[11]

드라마 이론의 문제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도 당대의 이스라엘에서 희곡이 존재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드라마는 BC 5세기에나 그리스에서 시작되었고, 아가서의 저작연대는 (논란이 있긴 하지만) BC 8세기로 보아야 합니다. 게다가 BC 5세기 이후에도 그리스의 희곡이 이스라엘로 들어왔다는 증거는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아가서는 드라마일 리가 없습니다. 로이드 카(G. Lloyd Carr)는 아가서가 가지고 있는 모든 시적, 내용적 요소들이 아가서를 ‘드라마’로는 생각할 수 없게 한다고 말합니다.[12]

그럼에도 드라마적 해석은 아가서 전체가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하는 데에 도움을 줍니다. 아가서의 구조와 통일성은 지금 제가 다루고 싶은 주제가 아니기에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학자들(예를 들면 트램퍼 롱맨Tremper Longman이나 롤랜드 머피Roland Murphy)은 아가서가 통일된 이야기구조가 있는 하나의 이야기라는 해석을 거부하고, 여러 연애시들을 편집한 모음집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해석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가서 전체를 통해 후렴구가 반복되는 것이나, 여러 주제들이 반복된다는 것, 일관된 계절이나 완전한 결말 등은 통일된 구조를 가진 시임을 부인할 수 없게 합니다.[13]

여러모로 볼 때 ‘드라마 이론’이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통일성을 가진 하나의 시, 특히 한 명의 저자가 영감 받아 쓴 하나의 정황이 있는 시라는 것을 연구하는 데에는 많은 힌트를 주기도 합니다. 따라서 알레고리 해석이 알아두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처럼, 드라마 이론 역시 알아둘만한 가치가 있는 해석입니다.

3.사랑시로 보는 해석

그렇다면 남은 해석은 하나뿐입니다. 억지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해석하는 것을 포기하는 지혜로운 방법. 즉 ‘있는 그대로’ 읽는 해석방법이지요. 그냥 아가서를 ‘사랑시’로 읽는 방법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을 시로 표현한 부부 또는 연인의 시로 보는 것이지요. 이것은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원칙들을 가지고 아가를 읽는다는 것입니다.

1.문자적으로 읽는다 – ‘유방’은 여성의 가슴을 가리키는 것이지 신약과 구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단어와 표현은 문자적으로 읽어야지, 내용이 관능적이라고 해서 지나친 상상력을 동원하며 원의미를 비틀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해석자의 일차적 목표는 ‘저자의 의도’이며, 솔로몬이(저자가 솔로몬이라면) 이 연애시를 썼을 때 원의도는 일차적으로 문자적 원의미일 것입니다.

2.문학성을 고려하여 읽는다 – 우리는 문자적으로 아가를 읽어야 함과 동시에, 또한 문학성을 고려하면서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시는 여러모로 은유와 직유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병행이나 다른 장치들을 사용해서 아름다운 표현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고려하여 읽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자면, 4:8의 “내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오너라”라는 말은, 신부가 지금 ‘레바논’에 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레바논, 아마나, 스닐, 헤르몬 꼭대기, 사자, 표범 등의 거리적으로 멀고, 위협적인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여자가 범접할 수 없는 곳에 있으며,[14] 따라서 남자는 여성에게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마음을 열라고 요청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아가서가 ‘시(詩)’임을 염두에 두고 해석하는 방식이며, 시를 읽는 자연스러운 해석방법이지요.

3.배경을 고려하여 읽는다 – 이 시는 기원전 8세기에 작성된 시이며, 따라서 당대 이스라엘의 문맥과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2:1의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나리꽃)이로다”라는 여자의 말을 읽을 때는, 당대 이스라엘에서 샤론의 수선화와 골짜기의 나리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급하게 읽으면 “음. 이 여자는 지금 자기가 예쁘다고 자랑을 하고 있군. 아휴 망측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대의 샤론은 비옥한 이스라엘의 북부 해얀 평야였고, 그곳에서는 수선화와 나리꽃이 수도 없이 흔하게 피고 지곤 했습니다. 즉 지금 여자는 “나는 길거리의 나리꽃처럼 그저 흔한 여자일뿐인걸요.”라고 말하며 자기연민에 빠져 있는 것이지요.[15]

그래야 2:2의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나리꽃 같도다”라는 말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여자여, 만일 당신이 흔하디 흔한 나리꽃이라고 말한다면, 당신 주변의 여자들은 그저 가시덤불에 불과할 뿐이에요.”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배경과 상황을 아는 것은 이렇게 원의미의 아름다움을 맛보게 해줍니다.

4.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다이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형제자매들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남녀가 각각 이 시를 읽게 했는데, 오글거리고 민망하다며 불평하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어야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강조했던 것은 아가서가 단순한 사랑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었지요. 이 시는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근동의 사랑시와 유사하지만, 그 품격과 내용에 있어 차원이 다른 거룩함을 지닌 시입니다. 고대 근동의 사랑시는 저속하고, 일회적이며, 신실하지 않고, 욕망에 집착하지만 이 시의 내용은 거룩하고 완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하시듯 말입니다.

II. 아가서의 적용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아니, 아가서가 사랑시인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이것이 무슨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겁니까? 이렇게 관능적인 내용에 과연 교훈이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마땅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딤후 3:15)를 주는 것인데, 사랑시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는 것이 맞을까요? 즉, 우리는 이 시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 시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 것일까요?

1.사랑, 성, 데이트, 결혼에 관한 지혜

하나님의 구원은 전인적(全人的)입니다. 즉 그분은 우리의 교회 생활과 기도, 예배에 관한 것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학교와 일터, 가정과 연애까지 모든 것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性)도 구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그분께서 지으셔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며, 또한 이 모든 것이 죄로 인해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특히 미디어를 통해서 잘못된 결혼과 연애, 성에 대하여 배웠고 그것은 죄로 인해 오염된 개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구원하시는 당신의 백성들을 이러한 죄로부터 꺼내주시기 위해 ‘구원의 지혜’를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가서의 역할입니다. 아가서에서 우리는 데이트 하는 연인들을 만나고(1-2장), 그들이 성적 유혹 앞에 신앙으로 대응하는 것도 보게 됩니다(2:6–7). 그들은 갈등하기도 하고(5:2–8), 서로 애타하기도 하며(3:1–5), 이윽고 결혼하고(3:6–11), 첫날밤을 보내며 서로를 탐닉하기도 합니다(4장 전체). 여기서 우리는 한 연인의 사랑시를 보며 결혼, 성, 데이트, 사랑에 대한 전반적인 지혜와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은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쾌락도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성과 쾌락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마귀는 그것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마귀가 하는 것은 성과 쾌락을 비틀고 왜곡하는 것이지, 그것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누리고 기뻐하되, 바르게 기뻐하고 바르게 누리는 법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르게 연애와 결혼을 하는 것은 구속받은 자들의 마땅한 삶인 동시에, 죄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아야 하는 영역이기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아가서를 깊이 연구하면서, 온갖 종류의 세속심리학을 응용한 ‘이성교제 세미나’나 ‘부부 세미나’ 같은 것들이 무익하다고 결론 내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면 충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 외에 존 그레이의 ‘화성 남자 금성 여자’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물론 무용한 것도 아니지만). 아가서는 결혼과 데이트에 있어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딤후 3:16) 전체를 다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늘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딤후 3:17) 하기 때문입니다!

2.구속받은 결혼의 이야기

한 발 더 나아가 볼까요? 아가서는 ‘구속받은 결혼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일찍이 저 대단한 (그러나 논쟁이 많은) 신학자 칼 바르트는 자신의 교회교의학 3–1, ‘창조의 교의’ 부분에서 창세기2~3장과 아가서를 상세히 비교하여 분석합니다.[16] 이러한 분석은 미국 유니온 신학교의 구약신학 교수였던 여성신학자 필리스 트리블(Phyllis Trible)의 ‘God and the Rhetoric of Sexuality’라는 책[17]에서 심화됩니다.

트리블은 그녀의 책에서 아가서의 해석학적 열쇠는 바로 창세기 2~3장에 있다고 말합니다.[18] 그녀는 두 성경본문 간의 여러 병행을 지적하는데, 몇 가지만 꼽아서 생각해 보지요. 첫째, 두 본문 다 무대는 동산입니다. 둘째, 선악과를 먹는 것과 같이 아가서 여러 곳(2:3; 4:16; 5:1)에서도 과일을 먹는 은유가 등장하지요. 셋째, 에덴의 불순종은 죽음을 낳았지만, 아가서에서 말하는 사랑은 죽음보다 강력합니다(8:6). 넷째,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 발생한 성적인 수치심(창 3:10)은 아가서에 나타난 부부에게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서로 성적으로 부끄러움 없이 하나됩니다.

무엇보다, 창세기 3장의 커플과는 달리 이들의 욕망은 회심했습니다. 범죄의 결과로 아담과 하와는 서로를 지배하고 다스리려는 욕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3:16은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고 말하지요. 이후 긴 역사 가운데 커플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싸우며, 서로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주기는커녕 서로를 지배하려고만 합니다.[19] 그러나 여기 이 구원받은 사랑스러운 커플이 무엇이라 말하는지 보십시오.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아 2:16)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아 7:10)

이들은 자신을 상대에게 내어줍니다. 이들은 상대를 지배하려고 하지 않고 상대를 섬기려고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려고 하고, 아내는 남편을 사모하며 순복하고 기대합니다. 이들의 결혼은 구원받았습니다. 그래서 필리스 트리블은 아가를 ‘구속받은 사랑의 노래’(Love’s Lyrics Redeemed)라고 부릅니다.

실로 우리의 연애와 결혼은 죄에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죄악된 우리는 구원이 필요하며, 우리의 죄는 연애와 결혼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를 가장 상처 입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연애와 결혼입니다! 이별과 이혼 뒤에는 우리의 죄가 있으며, 그것은 때로 주변 사람들까지도 엄청난 고통에 빠뜨리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이 필요합니다. 감사하게도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으며, 능히 우리를 악한 죄로부터 건지실 수 있습니다. 존 파이퍼의 말을 들어봅시다.

(남편의 의무에 대하여) 아내의 유익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당하려는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이런 자세는 외부의 침해로부터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 어려움을 감수하는 것뿐 아니라, 심지어 아내로부터 받는 실망과 오해와 모욕을 견디는 것까지도 포함됩니다. 이러한 사랑이 가능한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남편과 아내 모두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가 사해졌습니다. 남편과 아내 어느 쪽도 죄로 인해 서로에게 고통을 끼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 고통을 짊어지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용서받은 두 죄인으로서 악을 선으로 갚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20]

아가서는 이렇듯 ‘구속받은 자들의 결혼’을 묘사하는 사랑시입니다. 이 시를 읽고 이해함으로 우리는 구속받은 연애와 결혼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으며, 또한 어떻게 연인과 배우자를 대해야 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실로 이 책은 우리의 결혼을 “구원하는 지혜”(딤후 3:15)를 주는 것입니다!

3.우리 주 그리스도의 사랑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이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눅 24:27). 즉 모든 성경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며, 모든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밝히 드러나십니다. 이는 아가도 예외가 될 수 없지요. 성경은 여러 곳에서 결혼이 주님과 그의 사랑하시는 백성의 연합에 대한 상징이라고 말합니다(사54; 61:10; 62:5; 겔16:1–63; 호2:1–23; 마22;1–2; 고후11:1–4; 엡5:22–33; 계 19:7–8; 21:9).

또한 신약 성경 여러 곳은 은근히 아가서를 암시하거나 인용합니다. 예를 들면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2:1)와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백합화)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9)를 생각해 보십시오.[21] 이러한 암시는 여러 곳에 퍼져 있어서, 이 책이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랑하는 교회의 관계를 말하는 것임을 알게 합니다(예를 들면, 마 25:1–10과 아 3:6–11의 병행이나 계 3:20과 아 5:1–2의 병행을 보십시오).

따라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아가서를 사랑, 성, 결혼, 데이트에 대한 구원의 지혜로 받아들이지만, 더 나아가 이 시가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본문에 없는 의미를 끼워 넣는 알레고리적 해석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신약성경의 빛 아래에서 아가서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문자적인 해석으로 시작하여 진정한 사랑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갑니다. 즉, 솔로몬으로 시작하여 솔로몬이 진정으로 예표하고 있는 원형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적용을 ‘모형론적 해석’에 근거한 적용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해석을 적용한 설교의 좋은 예로써, 저는 마크 데버(Mark Dever)의 아가서에 대한 설교를 예를 들고 싶습니다. 데버는 이렇게 말합니다.

결혼생활의 육체적 사랑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즐거움, 관계적 친밀감, 우리 자신에 대한 더 깊은 지식,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신뢰 등을 생각해 보십시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하나님과 신뢰하고 사랑하는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깊이 알려주고자 하십니다.[22]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노래

아가서는 사랑시이며, 사랑의 노래입니다. 사랑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감정이며, 따라서 이 책은 모든 사람이 읽고 은혜를 받으며 적용할 수 있는 책입니다. 성관계를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고 해서 자녀들에게 이 책 읽기를 금지시켜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학교에서 배우는 세속적이고 반성경적인 성교육에 맞서서, 이 책을 교회와 가정의 지도를 받아 읽힘으로 하나님 중심적인 사랑과 성을 배우도록 해야 하지요.

이 책이 데이트와 결혼을 다룬다고 해서 싱글인 형제자매들과 상관없는 책인 것도 결코 아닙니다. 성과 결혼, 데이트와 사랑에 대하여는 싱글일 때 배워두어야 하고, 아가서의 많은 부분은 연인이나 부부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형제사랑에도 적용할만한 지혜를 말해줍니다. 아가서는 바르고 지혜로우며 현명한 사랑을 가르쳐주기에,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아가서를 읽고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내와 연인을 사랑하는 사람들, 더 나아가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사람들, 더 나아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아가서를 통해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니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조심스레 권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아내와 연인을 사랑하고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칭찬해 주십시오. 그리고 더불어 겪는 모든 어려움과 관계의 실패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내려놓으십시오. 어떠한 관계의 고통이 있더라도 사랑하기를 멈추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이 책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당신을 더욱 잘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마지막으로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를 인용하겠습니다.

“아가서 모든 구절에서 말하는 자는 오로지 사랑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이 읽고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고 싶다면, 그로 하여금 사랑하게 하십시오. 반면에 사랑하고 있지 않은 누군가는 이 사랑의 노래를 아무리 듣고 읽어도 헛될 것입니다.”[23]

참고문헌

1.아가서 주석

김구원, 가장 아름다운 노래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1)

앤드류 황-사무엘 고, 이상훈역, 아가서: 아시아성서주석 (서울: 하늘기획, 2013)

잔니 바르비에로, 안소근역, 아가: 가톨릭문화총서 37, (서울: 가톨릭출판사, 2014)

Bernard of Clairvaux. On the Song of Songs, Trans. Kilian Walsh, Works, Vol 4. (Kalamazoo, MI: Cistercian Publications, 1981)

Carl Friedrich Keil and Franz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 6 (Peabody, MA: Hendrickson, 1996)

Duane Garrett, Song of Songs/Lamentation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23B, (Dallas, TX: Word, Incorporated, 2004)

Marvin H. Pope, Song of Songs, Anchor Yale Bible Vol 7C,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8)

Iain Provan, Ecclesiastes, Song of Song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G. Lloyd Carr, Song of Solomon: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yndale Old Testament Commentaries vol. 19,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84)

Othmar Keel, A Continental Commentary: The Song of Songs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1994)

Richard S. Hess, Song of Songs, Baker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Wisdom and Psalms, (Grand Rapids, MI : Baker Academic, 2005)

Roland Edmund Murphy, The Song of Songs: A Commentary on the Book of Canticles or the Song of Songs, ed. S. Dean McBride, Hermeneia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1990)

Tom Gledhill, The Message of the Song of Songs, BS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4)

Tremper Longman, Song of Songs, NICO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1)

2.관련논문

Barry Webb, Five Festal Garments: Christian Reflections on Song of Songs, Ruth, Lamentations, Ecclesiastes and Esther (Downers Grove, IL: IVP Academic, 2000)

Michael V. Fox, The Song of Songs and the Ancient Egyptian Love Songs (Madison: University of Wisconsin, 1985) 

M. Goulder, The Song of Fourteen Songs, JSOTSup Vol. 36 (Sheffield; JSOT Press, 1986)

3.기타 단행본

존 파이퍼, 이길상역, 더 패션 오브 지저스 크라이스트, 예수가 못박힌 50가지 이유 (서울:규장, 2004)

존 파이퍼, 이은이역, 결혼신학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0)

마크 데버, 김귀탁 역, 구약 성경의 핵심 메시지 2 (서울:부흥과개혁사, 2009)

Jacob Neusner Tr., The Mishnah : A New Translation, Yadayim 3:5 Q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1988)

Karl Barth, Thomas F. Torrance and Geoffrey Bromiley(Trans.), Church Dogmatics, Volume 3: The Doctrine of Creation Part one (Edinburgh: T&T Clark, 1958)

Phyllis Trible, God and the Rhetoric of Sexuality, ed. Walter Brueggemann et al., Overtures to Biblical Theology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8)  


  1. Jacob Neusner Tr.,The Mishnah : A New Translation, Yadayim 3:5 Q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1988), p. 1127  ↩

  2. Toseph, Sanhedrin XII, 10. 본문은 Duane Garrett, Song of Songs/Lamentation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23B, (Dallas, TX: Word, Incorporated, 2004), p. 60에서 재인용함. 이하 ‘Duane Garrett’으로 표기함.  ↩

  3. 김구원, 가장 아름다운 노래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2011), pp. 206 참조. 이하 ‘김구원’으로 표기함.  ↩

  4. Duane Garrett, p. 73.  ↩

  5. 이 예화는 김구원., p. 45에서 힌트를 얻어 빌어온 것이다.  ↩

  6. Duane Garrett, p. 76.  ↩

  7. Marvin H. Pope, Song of Songs, Anchor Yale Bible Vol 7C,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8) pp. 111–112을 보라.  ↩

  8. Carl Friedrich Keil and Franz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 6 (Peabody, MA: Hendrickson, 1996), 503.  ↩

  9. 자세한 해석을 보고 싶다면, M. Goulder, The Song of Fourteen Songs, JSOTSup Vol. 36 (Sheffield; JSOT Press, 1986)를 참조하라.  ↩

  10. Iain Provan, Ecclesiastes, Song of Song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p. 255.  ↩

  11. Duane Garrett, p. 79.  ↩

  12. G. Lloyd Carr, Song of Solomon: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yndale Old Testament Commentaries vol. 19,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84), p. 36.  ↩

  13. 아가서의 구조적 통일성에 대하여는, Michael V. Fox, The Song of Songs and the Ancient Egyptian Love Songs (Madison: University of Wisconsin: 1985) p. 210–222를 보라.  ↩

  14. Roland Edmund Murphy, The Song of Songs: A Commentary on the Book of Canticles or the Song of Songs, ed. S. Dean McBride, Hermeneia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1990), pp. 159–160.  ↩

  15. Tremper Longman, Song of Songs, NICO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1), p. 111. 이하 ‘Longman’으로 표기.  ↩

  16. Karl Barth, Thomas F. Torrance and Geoffrey Bromiley(Trans.), Church Dogmatics, Volume 3: The Doctrine of Creation Part one (Edinburgh: T&T Clark, 1958) pp. 312–318을 보십시오. 바르트의 통찰은 신선하고 천재적이며 유익이 많지만, 아가와 창세기의 역사성 및 진정성을 대하는 그의 시각은 조심스러운 눈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

  17. Phyllis Trible, God and the Rhetoric of Sexuality, ed. Walter Brueggemann et al., Overtures to Biblical Theology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8) 이하 ‘Trible’로 표기함. Trible의 해석 역시 아가서에 대한 통찰을 풍부하게 해주지만, 아가서 본문에 대한 그의 페미니즘적 해석, 본문 해체적인 수사비평은 읽는데 상당한 분별과 주의가 필요합니다.  ↩

  18. Trible., p. 144.  ↩

  19. Trible., p. 159–460.  ↩

  20. 존 파이퍼, 이길상역, 더 패션 오브 지저스 크라이스트, 예수가 못박힌 50가지 이유 (서울:규장, 2004) p. 157.  ↩

  21. Longman., p. 111.  ↩

  22. 마크 데버, 김귀탁 역, 구약 성경의 핵심 메시지 2 (서울:부흥과개혁사, 2009) p. 187.  ↩

  23. Bernard of Clairvaux. On the Song of Songs, Trans. Kilian Walsh, Works, Vol 4. (Kalamazoo, MI: Cistercian Publications, 1981) p. 79.1.  ↩

Over de auteur

정규

진짜배기 잉여 필자. 다른 필진들과는 다르게 공식적인 '저자'다. 담임 목회자이자 두 딸의 아버지. 잉여롭고 싶은데 찾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 ㅠㅠ

Comments 9

  1. 아가서 8장 6절에 ”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 할때의 사랑은 아가페 사랑인가요 에로스 사랑인가요 ?

  2. 해석을 자기 멋대로 하면 안 되는 것은 맞지만 그렇게 해석을 하는 것이 잘못 됬다고 한다면 성경에서 우리가 꺠달을 것은 몇 가지
    없다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간다면 아무리 주석이라고 해석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해석이 잘 못됬다고 말하시는 것은 조금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모든 지 자기의 영성만큼 깨닫는 법입니다.
    영성이 낮은 사람은 다르게 개달을 것이고 영성이 높은 사람은 똑같은 말씀이라도 다르게 깨달을 것입니다.

    1. 인간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 성경인데 보는 이마다 달리 해석된다면 그것이 무슨 삶의 지표가 될수 있믈까요

  3. 너무 귀하게 읽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질못된 성과 결혼, 연애관이 깨지고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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