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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함이 이류가 되어버린 시대 – 마이클 호튼의 Or.di.nar.y

평범함이 이류가 되어버린 시대

특별한, 탁월한, 비범한, 튀는, 개성 있는, 같지 않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단어들입니다. 어쩌면 너무 쉽게 볼 수 있어서 더 이상 비범해보이지 않는 단어들이기도 합니다. 텔레비전을 틀어도, 인터넷을 켜도, 친구들을 만나도 우리는 언제나 특별하고 탁월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런 사람들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무리에서 주도권을 쥐기도 하고요. 하지만 제가 교회에서 청소년들과 청년들 대상으로 사역하면서 느낀 것은 좌절감이었습니다.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와서 심사위원의 극찬을 받고 탑 텐에 올라가 세간의 주목을 받고 부르는 노래마다 온라인 음원 차트 상위권을 차지하는 동갑내기 친구들을 보는 또래 중고등학생들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요?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좌절감입니다. 하지만 전 묻고 싶었습니다. 대체 너희가 왜 그런 좌절감을 느껴야하는데? 라고요. 청년들이라고, 결혼한 어른들이라고 다를까요? 삼십대에 억대 연봉을 거머쥔 드라마틱한 스토리들은 서점과 스크린을 가득 매우고 있습니다. 은퇴하신 부모님들이라고 다를까요? 은퇴 후의 삶을 멋지게 사는 장년들의 스토리는 평생을 힘겹게 사셨으나 지금은 집에서 다소 무료하게 지내시는 우리 부모님들을 좌절하게 만들지 않을까요? 우리는 성공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특별하지 않으면 존재 가치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무리 중에서 도드라짐’에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평범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그들과 같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좌절과 패배감 뿐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평범한데, 평범한 것은 이류가 되어버렸습니다.

마이클 호튼의 평범함 Ordinary

L캘리포니아에 있는 웨스터민스터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인 마이클 호튼이 이에 대한 글을 냈습니다. 나온지 얼마 안 된 책인데 원서 디자인과 견줄만한 깔끔한 디자인으로 지평서원에서 출간되었습니다. 부흥과개혁사에서 주로 출간했던 그의 이전 책들과 큰 맥락을 함께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서 흘러 나온 은혜로 우리가 그분과 맺은 언약이 그것입니다. 그냥 책 제목만 봐서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다룬 책인 것 같지만, 앞서 제가 가진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가운데 마이클 호튼은 문제의 해결책을 은혜와 언약에서 찾고 있기 때문에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부는 ‘혁신과 불만족’이라는 제목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2부에서는 ‘평범과 만족’이라는 제목으로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장은 저자가 생각하는 핵심 키워드를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됩니다. 1장에서는 전체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2장에서는 탁월함, 3장에서는 불안정함, 4장에서는 전통을 무시하며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가려는 흐름, 5장에서는 미덕이 되어버린 야심, 6장에서는 한 사람 특히 목회자가 영웅이 되어가는 교회에 대해 살펴봅니다. 2부에 속하는 7장에서부터 10장은 앞에서 언급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닌 자기를 부인하기, 인간 영웅이 아닌 단 한 명 그리스도만 바라보기, 교회를 유기체로 생각하게 거하기, 믿음으로 실천하기 등을 제시합니다. 사실 분량과 구체성에 있어서는 2부가 많은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는 있지만, 핵심적인 해결책들은 1부에서 문제를 제기하면서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1부만 봐도 저자의 문제의식과 그가 바라보는 지향점을 파악하기에 큰 무리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특별함을 추구하는 것, 무엇이 문제인가?

호튼 교수가 생각하기에 현대 기독교는 현대 사회에 편승하여 ‘특별함’을 지나치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즉, 평범함의 중요성이 밀려나게 되었다는 것이죠. 물론 특별한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를 그런 특별함으로 몰고가는 무분별한 열정입니다. 그는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며 죄의 근본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우리의 사랑을 쏟는 것임을 지적합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탁월함, 특별함을 추구할 때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스스로 높아지며 무리 중에서 주목받기를 원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자 생각에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탁월함은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입니다. 그리고 이 열매들은 복음이라는 토양에서 자라나는 것이고요. 그런데 복음이라는 토양은 세상이 말하는 탁월함과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복음에 입각한 참된 탁월함은 도통 요새는 인기가 없는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결국 ‘평범함을 되찾자!’는 호튼의 호소는 자기 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왜곡된 탁월함의 종착지를 자기를 비워 끝까지 낮아지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재설정하자는 요구입니다.

이런 그의 문제의식은 계속해서 이 시대가 지나치게 젊은이 중심으로 흘러가서 불안정함을 미숙함으로 보지 못한다고 비판하는데로 이어집니다. 또한 그 동안 줄곧 악덕으로 여겨졌던 야심을 미덕으로 여기게 된 것도 언급하고요. 계속해서 새로운 것만 추구하다보니 전통의 가치와 중요성도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이런 비판들을 허공에서 제시하지 않으며 저자의 관찰이 담아낸 근거를 함께 내어 놓습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 미국에서는 베이비붐 세대는 성장주의에 깊이 몸담았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성장주의의 폐해를 우리는 많이 보았습니다. 하지만 베이비붐 세대 후에 등장한 이머징 교회와 같이 ‘새로움’과 ‘개인적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러 움직임들도 호튼 교수의 눈에는 그다지 새로워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새로워보이지만 사실은 역사에 무관심하며 심지어 이미 역사 속에서 자신들과 유사하게 주장했던 선배들에 대해서도 눈을 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들이 새롭다고 말하는 것들은 사실상 또 다른 전통과 정체성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고 일침을 놓습니다. 저자는 개혁주의 진영을 옹호하며 이런 발언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최근 10–20여년 내에 급부상한 개혁주의 진영을 ‘젊고, 들떠 있고, 개혁적인(Young, Relentless, Reformed)’이라고 표현한 콜린 핸슨의 말을 부정적 뉘앙스로 받아들입니다. (콜린 핸슨은 이를 긍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는 미숙함의 표현이라는 것이죠.스크린샷 2015-12-31 오후 4.07.21

다소 예민한 논의도 눈에 띕니다. 바로 부흥에 대한 논의입니다. 일차대각성운동이 미국과 영국에서 일어났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인한 은혜에 우리를 맡기는 운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찰스 피니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차대각성운동에서 인간의 결단과 노력은 한층 더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인간의 노력으로 부흥, 곧 교회의 교인 수 증가와 경제적 부 축적이 가능하게 된다는 생각이 흘러들어오는 것의 결과로 우리는 ‘특별함’에 환호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평범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큰 변화가 없이 그 자리에 있는) 지역 교구를 등한시하게 된 것도 대각성운동의 결과라고 평가합니다. 이제 순회전도자가 인기를 얻게 되었으며, 웨슬리는 ‘온 세상이 나의 교구’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p.192). 자연스럽게 한 개인을 영웅시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하지만 저자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사역을 맡길 때 ‘디모데의 교회’란 말은 없었다고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디모데의 교회’나 ‘디모데의 사역’은 없다. 오직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교회만이 있을 뿐이다.(p.176)” 그는 교회에 있어서도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께 고정시킬 것을 주문합니다.

평범하자. 

결국 우리가 평범함을 비범함으로 대체해버리고 모두가 특별한 인생을 꿈꾸고자 할 때,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예수님께서 가장 경계하셨던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완벽주의적인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소홀하게 여기게 하고, 거룩함과 경건보다 끊없는 목표 달성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게 만듭니다. 그리스도께 눈을 고정시키기보다 한 영웅에 눈을 고정하게 되며, 이미 높아진 그 영웅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부담을 떠안게 됩니다.

이 문제를 위해 우리는 평범함에서 만족함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쯤에서 호튼 교수를 위해 변명을 좀 하고 싶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평범하자고 주장합니다. 단지 평범함에 대해 설명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평범해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추구하는 ’평범함’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평범함은 진짜 무가치하고 작은 것이라는 의미의 평범함이라기보다, 우리 모두가 현재 평범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회심은 평범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까요. 지역 교회는 평범합니다. 지역에 충실하고 큰 선교나 봉사나 다층화된 프로그램을 제공하지 못하니까요. 그리스도는 평범합니다. 사람들을 위트있는 설교로 웃기고 강력한 카리스마로 인도하는 목회자에 비해 그리스도는 너무나 초라합니다. 하지만 저자가 정말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하찮게 여기고 평범하게 여기는 회심의 신비, 지역 교회의 아름다움과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를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이유입니다.

언약은 그 자체로 엄청나보이지 않습니다.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매주 교회를 나가지만 우리의 삶은 참으로 평범합니다. 하지만 회심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는 그 어떤 기적보다 더 놀랍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그 안에서 맺히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 사람은 자신이나 자신의 야심이 아닌 그리스도과 그분의 영광만이 드러나기를 원하는 역설적 삶을 살아갑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언약 관계에서 그는 하나님께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언약적 관계를 현대 계약적 관계와 대조합니다. 계약은 쌍방이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의 이익을 위해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파기가 가능합니다.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언약은 철저하게 하나님 의존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만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평범함의 위대함을 더 많은 이들이 깨닫게 되기를 바라며

2년 동안 중고등부와 청년부를 섬기면서 아이들의 흔들리는 눈빛에서 읽어낸 절망감이 있습니다. 그들은 불안해하고 너무 쉽게 포기하고 절망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절망감의 정체는, 자기들보다 잘나가는 동갑내기들을 향한 부러움과 자기보다 조금 못나보이는 이들을 향한 경멸의 태도에서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아이들의 기쁨은 대부분 기뻐하는 대상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대리만족에 의한 것이었으며, 아이들의 슬픔은 대부분 깊은 사색이 아니라 상대적 박탈감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관찰을 통해 제가 읽어낸 것은 단지 아이들의 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교만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그 교만을 긍정하며 끊임없이 아이들을 부추기는 시대 정신이 아이들 밑에 짙게 깔려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하던 중 마이클 호튼 교수의 오디너리가 번역되어 나와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단숨에 읽어 내려갔습니다. 페이지마다 무릎을 치며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마지막 장을 덮으며 고민은 더 깊어져만 갑니다. 그래서 이 평범함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삶 속에서 이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우리에게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온 세상이 이런 의견에 반대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고민을 혼자만의 고민에서 끝내지 말고 글로 풀어내고 싶어졌습니다. 향후 한두달 간 진짜배기에 이에 관련된 고민들을 구체적으로 풀어낼까 합니다. 영화나 책을 보고 느낀 것도 있고, 제가 사역하면서 고민해왔던 것들도 있습니다. 자유로운 형태로 고민들을 풀어냈을 때 많은 분들의 공감을 얻기를 기대합니다. 평범함의 위대함을 더 많은 이들이 경험하고 깨닫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책에 대해 조금 아쉬움을 표하자면, 글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는 명료한 구조로 짜여져있지는 않아서 각 키워드를 독자 스스로 찾아내야 할 뿐 아니라, 키워드와 키워드 사이의 관계, 또는 키워드와 전체 주제와의 관계를 고민하지 않으면 책 안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 저자의 다른 책에서도 느낀 점이었는데, 아마 저자의 글쓰기 특징이 아닌가 합니다. (아 물론 개혁주의 조직신학이나 순례자들을 위한 조직신학은 매우 조직적이고 구조가 잘 드러납니다. 하지만 심지어 그의 주저 중 하나인 언약신학에서도 저는 그런 명료한 구조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이런 주제로 단행본 하나 분량의 논의를 던져준 저자에게 저는 밥이라도 한끼 대접하고 싶은 심정이네요.

Over de auteur

영광

선교사 부모님 덕에 어린 시절 잦은 이사와 해외생활을 하고,귀국하여 겪은 정서적 충격과 신앙적 회의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개혁주의를 만나고 유레카를 외쳤다. 그렇게 코가 끼어 총신대를 졸업하고 현재는 미국 시카고 근교에 위치한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조직신학 박사 과정 재학 중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며 세상 귀여운 딸래미의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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