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아름다움을 추구하라 – ‘조나단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아름다움’

아름다운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혹여 타인의 아름다움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그 아름다움을 자신이 소유하고 싶은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사실 아름다움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가까이하고 싶어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누리고 싶어합니다.

아름다움은 살아갈 힘을 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영양분은 충분하지만 맛은 전혀 없는 알약만 먹고 산다면 삶의 낙의 큰 부분을 잃어버린 느낌이 들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 즉 영양분이 아니라 그 음식의 아름다움이 우리 영혼에 주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은 아름다움을 소유하기 위해, 누리기 위해, 경험하기 위해, 맛보기 위해 살아가며 그것을 통해 마음의 만족과 힘을 얻습니다. 어떤 면에서 아름다움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가면서 아름다움을 손에 넣으려고 합니다. 강남역 주변에 수없이 많은 성형외과와 광고들이 증거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현대인들과 이 사회에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요? 트리니티 신학교의 더글라스 스위니 교수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던 신앙의 선배에 대해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그는 아름다움의 본질과 근원을 탐구했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경험하기를 원했으며, 아름다움의 총체이신 하나님을 알아가고 사랑하는 삶을 살기를 힘썼습니다. 단지 감정적으로만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다 사용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탐구하고 사랑했습니다.

edwards

스위니의 책 『조나단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에드워즈가 추구하고 경험하길 원했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소개합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지 ‘하나님의 아름다움’ 자체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파생된 모든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원래 제목이 On Beauty, 즉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하는 ‘아름다움에 관하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삶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줍니다.

하나님: 아름다움의 근원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1]

신적인 영광, 최고의 영광은 하나님의 성품 안에 있다. 다른 것들과 비교할 때 종류에 있어서 지극히 높고, 본질에 있어서 훨씬 더 숭고한 신적 탁월함이 존재한다.

하나님은 아름다움의 원천이실 뿐더러, 그 어떤 아름다움보다 더욱 더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가장 사랑해야 마땅한 아름다움이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에드워즈는 그런 하나님의 다음에 나오는 하나님의 일곱가지 속성에서 탁월하게 드러난다고 소개합니다. 바로 1) 영원성과 자존성, 2) 위대성(크심), 3) 사랑스러움, 4) 능력, 5) 지혜, 6) 거룩함, 7) 선하심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경험하는 모든 아름다움은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들이 아름답게 펼쳐진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아름다움보다 하나님의 이런 속성들의 아름다움이 훨씬 탁월하고 뛰어납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이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원하시며, 그런 하나님을 알아가고 기뻐하고 예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사실 마땅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탁월한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신자에게 엄청난 유익과 기쁨을 줍니다. 그래서 스위니 교수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2]

하나님의 속성을 아는 것은 신자가 매일을 사는 데 무한한 연료가 된다. 대부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교리는 메마르고 따분한 것이 아니라, 신자의 삶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영적인 양식으로 꽉 차 있다.

창조: 아름다움이 펼쳐지는 무대

도시에서 살다가 아름답고 광활한 자연을 마주하게 되면, 인간의 노력으로 어떻게 따라 할 수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압도되고 감탄하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종종 우울한 영혼에 새로운 활력을 줍니다. 이런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펼쳐진 무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속성을 따라 지혜롭게 설계 되었으며 그 조화와 균형과 비율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놀랍게 펼쳐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그것들의 아름다움의 근원이자 목적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주어졌습니다. 스위니는 이렇게 말합니다.[3]

창조 세계는 하나님이 정한 목적(가장 주된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다)을 위해 창조된 종속적인 영역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내면서 하나님을 자연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는 심각한 신성모독이다. 세상은 여러 모로 아름답지만 이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우뚝 솟은 네온사인처럼 번쩍인다. 에드워즈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아름다운 것을 설계한 분의 성품을 외면하고서는 그 어떤 아름다운 광경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아름다움은 사실 하나님과 연관되는 것이며,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펼치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아름다움을 하나님께로 연결시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죠. 그리고 이 세상에는 아름다움 뿐만이 아니라 추하고 더러운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왜 창조 세계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죄와 타락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위니는 이렇게 설명합니다.[4]

에드워즈는… 세상의 훼손이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창조 세계에는 놀라운 아름다움이 있지만 동시에 엄청난 추함과 부패도 존재한다. 여기서 타락으로 말미암아 창조가 훼손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를 뒤엎으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창조주의 아름다움과는 달리 피조물의 아름다움은 타락 이후에 약화되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려는 것이다.

창조 세계에서 아름다움과 추함이 공존하는 이유는 타락 때문입니다. 타락은 창조 세계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충만히 누리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찬양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회복, 그리고 더 큰 아름다움

죄와 타락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름다움에서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더 크게 나타내셨습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이죠. 스위니는 이렇게 말합니다.[5]

에드워즈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기 위해 세상에 보냄 받은 아름다운 그릇으로 생각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우리에게 아름다움에 관련된 두 가지 측면의 일을 행하십니다.

첫 번째는 죄와 타락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접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는 빛이십니다. 그래서 죄로 죽은 영혼을 빛으로 비추셔서, 어둠 속에 가려 보이지 않던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하시고, 그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 있게 하십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하죠.[6]

그러나 그리스도가 사람의 영혼에 해같이 솟아오르면 모든 것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의지와 감정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영혼의 모든 기능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기 시작한다. 영혼은 이제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 전에는 침묵했으나 이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하고 영혼이 죽은 자를 깨워서 하나님을 보게 하시고,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게 하시고, 그리고 고통 가운데 있는 신자를 위로하셔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하십니다. 참 아름다움에서 멀어진 사람들에게 참된 아름다움을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심으로써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 직접적으로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더 직접적으로, 더 크게 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의 모습과 행하신 일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아름다운 속성이 더욱 생생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합니다.[7]

… 반석은 그리스도의 신적인 완전성과 거룩함, 전능성, 영원성, 불변성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속성이 충만하게 드러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충만하게 드러냅니다. 이 모든 것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더 직접적으로 더 크게 경험하게 됩니다.

교회: 충만해져가는 아름다움의 장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것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더욱 더 경험되게 하셨는데, 그러기 위해 세워진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바라보고 경험하도록 영혼이 소생한 이들의 모임이자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래서 스위니는 이렇게 말합니다.[8]

주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맛보는 것은 언제나 교회의 특권이고 낯설고 적대적인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리고 확장하는 것은 언제나 교회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그들만이 이 땅에서 누구보다도 더 탁월하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충만히 나타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스위니는 이렇게 설명합니다.[9]

에드워즈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에 빛을 비추는 태양이고 성도들은 공기 중의 미세한 수증기 ‘물방울’이다. … 그리스도의 빛은 모든 사람을 아름답게 하고 이것은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움을 반사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런데 물방울 하나하나의 아름다움보다 이 물방울이 하나로 결합되어 드러내는 무지개의 아름다움이 더 크다. 왜냐하면 ‘함께 결합하여 전체를 이룰 때 훨씬 더 아름답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집단적으로 함께 세상에 빛을 비출 때 특별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맛보고 나타내는 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세상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 중 하나임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과 삼위일체: 궁극의 아름다움

창조, 그리스도, 교회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는 천국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충만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시면서 무한한 행복을 누리십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우리는 그런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무한한 행복에 참여하게 됩니다. 스위니는 이렇게 말합니다.[10]

따라서 구원이란 신자가 신적인 사랑과 아름다움의 강물을 타고 삼위일체의 행복이라는 무한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해하기는 쉽지 않지만 신자들은 천국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함을 끊임없이 마시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사귀는 영원한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천국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무한히 커지는 사랑과 행복을 누리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부터 그것을 소망하며 경험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천국을 소망해야 합니다. 그래서 스위니는 이렇게 말합니다.[11]

오늘날 세상은 사랑을 흔히 혼외의 성적 만족이나 갑작스런 감정의 쇄도와 동일시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기르지 않는다면 순간적인 만족을 주는 ‘사랑’의 유혹에 취약해질 것이다. 그 대신 지금 맛보고 있고 영원무궁토록 맛볼 사랑의 거대한 홍수를 거듭 기억한다면 이 세상의 순간적인 쾌락을 능히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으로의 초대

조나단 에드워즈는 정말 전인격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한 사람이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경험하길 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아름다움을 탐구하기를 원했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세상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연구했습니다. 그는 아름다움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창조, 그리스도, 교회, 천국까지 나아가 아름다움을 탐구합니다. 이렇게 에드워즈가 가진 아름다움에 대한 견해를 소개하면서 스위니는 이렇게 말합니다.[12]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지나치게 크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 가운데 대부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너무 작게 생각한다.

스위니는 우리가 너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작게 생각한다고 지적합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길 원한다면(이미 사람들은 그렇게 살고 있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을 열렬히 추구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래서 스위니는 이렇게 말합니다.[13]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아름다움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초월자를 완전히 배제한 채 초월성을 담고 있는 주제를 연구할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 우리 하나님이 아름다운 분이시라면 에드워즈가 보여 준 것처럼 당연히 우리도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복음은 우리의 상상력이나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사랑을 정지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것들에 연료를 공급하고 불타오르게 하며 가장 아름다운 분이신 하나님에게 향하도록 만든다. 어떤 비유, 이미지, 묘사도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담아내는 데 결코 충분하지 못하다.

이 시대는 아름다워지려고 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려고 열심을 다하는 이들이 수두룩한 때입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참된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헛된 아름다움에 중독된 이 사회를 향해 기독교 신앙은 진정한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오라고 초대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갈 바를 모르고 위기 속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교회에게, 세상에 답을 주기는 커녕 문제 투성이인 것처럼 보이는 이 시대의 교회에게,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그것을 나타내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의 특권이자 마땅히 추구해야 할 기쁨입니다.


  1. 더글라스 스위니 & 오웬 스트라첸, 『조나단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아름다움』 (부흥과개혁사, 2012), 30; 에드워즈 전집 17, 413에서 재인용.  ↩

  2. 같은 책, 54.  ↩

  3. 같은 책, 69.  ↩

  4. 같은 책, 73.  ↩

  5. 같은 책, 88.  ↩

  6. 같은 책, 91–92; 전집 10, 540에서 재인용.  ↩

  7. 같은 책, 94; 전집 10, 137–138에서 재인용.  ↩

  8. 같은 책, 121.  ↩

  9. 같은 책, 131–132.  ↩

  10. 같은 책, 153.  ↩

  11. 같은 책, 167.  ↩

  12. 같은 책, 94.  ↩

  13. 같은 책, 172.  ↩

Over de auteur

재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 17세기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의 교회론을 연구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의들, 특히 교회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