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품격: 폭군들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갑질”은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용어지만, 힘 있는 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괴롭히는 모습은 인간 역사만큼 오래된 것이고 늘 있어왔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갑질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사회일수록, 그 사회가 부패하고 비윤리적일 것임은 자명합니다. 우리는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부당한 요구를 강요한다거나, 심지어 백화점에서 고객이 점원을 무릎 꿇게 하는 일, 또는 그 이상으로 우리를 경악시키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사회의 모습을 봅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서 갑질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약자에게 자신의 지위나 힘을 남용하는 모습들에 대해 듣노라면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은혜받는 표현 중의 하나는 바로 “왕 같은 제사장”일 것입니다. 이것의 성경적인 의미가 무엇인지와는 별개로, “무익한 종”이나 “그리스도의 청지기”라는 표현보다 더 선호되고 마음에 와 닿을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한 때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실행할 능력을 갖춘 “왕” 같은 존재가 되길 꿈꿔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힘이 주어졌을 때, 갑질을 통해서 자신의 왕 됨을 누리려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남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에서 쾌락을 얻는 것이죠. 사실 다른 사람 위에 왕으로서 군림하려는 욕구는 죄가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미치는 영향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와에게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원한다는 것은 “조종하기를 원한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1] 사람은 가장 친밀하고 가까운 부부 사이에서조차 자신의 뜻대로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해” 선악과를 선택한 결과가 아닐까요.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말이죠.

폭군들의 시대

그렇기에 세상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라도 하듯이 조금이라도 힘이 있으면 왕처럼 자신의 법을 세우고 다른 이들에게 그 법을 강요합니다. 불법적으로 그런 일들을 하는 것도 마땅히 지탄받을 일이지만, 합법이라는 틀 안에서 그런 부당한 갑질을 하는 경우도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열정 페이도 그 예 중 하나입니다. 젊다는 이유로, 아직 배워야 한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최소한의 시급조차 받지 못한 채 매일 야근에 시달리는 청년들이 수두룩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당연하다고 합리화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들 자신이 이런 위치에서 일하면 결코 당연하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엄청난 규모로 경제적 가치를 갖고 성장하는 커피 산업 같은 경우, 정작 커피 농장에서 노동하는 이들에게 돌아가는 이익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공정무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죠. 아무튼, 합법이라는 이름 아래 적은 급여를 주고 부당하게 노동을 착취하는 것은 그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의 기업이나 대학에서도 그런 논리 아래 움직이는 것이 이 시대에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 합법이라는 명목 아래 부당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외에도 권력의 부당한 남용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왕이 되길 원하는 시대, 더불어 폭군처럼 그 권력을 휘두르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왕

이 세상에서 왕이란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존재와도 같습니다(물론 그 나라의 문화와 사상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행사하는 방식은 그 왕의 품격을 결정지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성군”, “폭군” 같은 표현들이 있었죠. 아무튼 이렇게 모두가 왕이 되어 살길 원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숙고해봐야 할 성경 말씀이 있는데, 바로 이스라엘의 “왕”은 어떠해야하는지를 다루는 신명기 17장의 말씀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14-17절)

이스라엘의 왕은 자신들이 뭘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뭘 하면 안 되는지를 먼저 알아야 했습니다. 그는 군사력을 기르기 위해 전투를 위한 말들을 많이 두어서는 안 되었으며, 말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은 더더욱 안 되었습니다. 모든 왕의 로망(?)이라고 할 수 있을 왕비를 많이 거느리는 것도 안 되었으며, 자신의 힘을 사용해서 많은 재물을 쌓는 것조차 금지되었습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해야 하는 이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셨고, 왕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세움 받은 자입니다.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힘쓰는 것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에서 멀어지는 것이며, 그 군사력 강화를 위해 애굽으로 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강대국 애굽을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를 많이 두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다른 나라와 동맹을 할 때 정략결혼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이방종교들이 유입될 수 있었기 때문이며, 아내를 많이 두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기보다는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은금을 비롯한 재물을 쌓는 것은 그 자체로 자신이 의존할 부를 쌓는 것이니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힘이 있는 자였지만, 그만큼 절제해야 할 것들이 많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금지를 넘어서서 해야할 의무들이 더 있었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18-20절)

이스라엘의 왕은 마치 “서기관”처럼 성경을 필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평생 곁에 두고 읽고 그 말씀대로 행해야 했습니다. 왕은 다름 아닌 말씀의 시행자여야 했습니다. 그가 가진 모든 지위, 힘, 권세는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행하기 바르게 위해, 위에 언급된 것들은 금지되어야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20절에 따르면 왕은 다른 이들보다 “교만”해서도 안 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왕이 아닌 백성들과 같은 “형제의 신분”이었습니다. 존재적 위치 자체가 다른 이들에 비해 존귀하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직은 그에게 마음껏 자기 권력을 누리라고, 교만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절제하고 겸손히 말씀을 시행하라고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왕의 “품격”은 그가 얼마나 이런 것들을 실천하느냐에 달려있었습니다. 비록 이렇게 완벽한 왕이 이스라엘 왕국 역사상 존재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성경이 평가하는 “성군”은 어김없이 이런 부분들을 실천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왕도 보여주지 못한 진정한 왕의 품격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신 분께서 스스로를 비우셔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의존하는 모습을 보여주셨기 때문이죠. 그분의 삶은 고난의 삶이었지만, 그 고난 속에서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기 위해 수많은 것들을 절제하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을 넘어서 말씀 자체인 분이셨고, 삶으로 살아내는 분이셨습니다.

또한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구원한 죄인들을 “형제”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신 분이, 왕이신 분이 다른 이들과 같은 위치로 겸손히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으나, 여전히 그분은 인간의 몸을 입으셨으며 그들을 형제라 부르시며 그들을 위해 중보하시는 분이십니다. 왕이신 그리스도의 품격은 여기서 드러납니다.

품격 있게 삽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힘과 지위와 권세를 폭군처럼 휘두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우리를 빛내는 품격은 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기를 추구하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마음껏 자유롭게 사용하고 뽐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절제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시행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자신의 힘을 사용해서 스스로를 높이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모습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낮추어 자신의 백성들을 형제라고 부르셨다면, 우리는 결코 자신을 남들보다 “높다고” 여겨서는 안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저 형제 중 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가진 것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형제들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는 자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이 가진 것이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가 왕이 되어 갑질을 하려는 이들이 많은 사회에서, 오히려 참된 왕의 품격을 보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패한 사회에서 악한 제도와 시스템을 마주하면서, 어떻게 이것들에 저항하면서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우선적으로 추구해야할 마땅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1. 원어 해석에 관하여는 W. Hall Harris, ed., The NET Bible Notes를 참고.  ↩

Over de auteur

재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 17세기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의 교회론을 연구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의들, 특히 교회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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