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전도사님, 중력파가 신앙이랑 무슨 상관이 있나요?

“별로 상관없어.”라고 대답하면 간단한 문제를 굳이 고민하고 길게 풀어써보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을 동의한다면, 중력파의 검출은 하나님의 영광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고민해봐야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과학과 신앙의 조화 문제는 어렵고도 논쟁적인 주제입니다. 그렇기에 저 같은 비전공자가 과학을 논한다는 것이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다소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래도 이야기를 풀어나가려는 것은 저 스스로도 공부를 하기 위해서 입니다. 과학은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세계를 이해하려는 학문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도출된 과학 모델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과학적”으로 잘 설명해주죠. 물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해줄 거라고 기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현재 가장 정설로 굳어진 과학 이론이라고 할지라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거리를 두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학이 창조 세계를 탐구하는 학문인 이상, 과학적인 발견의 어떤 부분들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속성의 일부를 우리에게 비춰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뿌리 박으면서, 과학이 비춰주는 의미들을 숙고하고 탐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참고로 이 글은 과학과 신앙에 있어서 가장 뜨거운 이슈인 창조와 진화, 창세기의 해석문제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습니다. 이 주제에서 굳이 확장해서 다룰 필요도 없거니와, 어떤 의견을 이야기하기엔 지식이 부족한 거 같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최근 중력파가 발견되었다는 것이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에 어떤 의미를 전해줄까요?

중력파가 뭐지?

중력파 검출에 성공했다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도출되는 시공간에 대한 이해를 지지하는 또 하나의 추가적인 증거가 되기 때문에 이것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반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경험하는 중력은 질량이 시공간을 왜곡시키는 것으로 인해 발생한 중력장의 세기에 의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중력파는 개념 상 그 시공간의 왜곡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인해 생기는 파동이기 때문이죠. 중력파가 시공간의 왜곡으로 생긴다면, 시공간은 왜 왜곡되는 것일까요?

질량이 시공간을 왜곡시킨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원리로 설명됩니다. (그리고 어려우면 이 단락은 넘기셔도 됩니다. 저도 어렵거든요) 뉴턴 역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상대적인 시간과 공간을 논의했었습니다. 그러나 특수상대성 이론은 절대적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이론에서는 불변하고 절대적인 기준값이 되는 것이 시간과 공간이 아니라 “빛”이며, 이에 따라 공간의 크기와 시간의 흐름은 “사건이 성립하는 물리적 조건에 의해 상대적으로 결정”된다는 결론을 도출합니다.[1] 그래서 이전에는 절대적인 것이 시간과 공간이었지만, 이제는 빛의 속도가 절대적이며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지 않은 것이 되었습니다. 즉, 이에 따르면, “모든 관성계, 모든 사건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2] 그리고 일반상대성 이론은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특수상대성 이론이 관성계에[3] 제한된 것이라면, 일반상대성 이론은 거기서 더 나아가 “가속운동이 이루어지는 비관성계, 즉 중력장 안에서의 운동현상”까지 다루는 것으로, 여기서 “좌표계의 가속운동에 의한 상대적인 힘, 관성력”은 중력으로 치환이 가능하다는 등가원리를 전제로 합니다.[4] 즉, 관성력을 중력장의 세기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며, 아인슈타인은 이 중력장의 세기를 시공간의 곡률로 설명합니다.[5]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 이론에 따르면 질량은 시공간을 휘게 하며, 중력은 시공간의 휘어짐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하는 중력을 시공간의 왜곡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중력파는 이런 원리를 기초로 할 때 시공간의 왜곡의 변화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되는 것이었는데, 이번에 그것이 검출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일반상대성 원리가 세계를 과학적으로 잘 설명해주는 원리라는 하나의 추가적인 증거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중력파 검출은 결국 일반상대성 원리가 주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고찰해보게 합니다. 일반상대성 원리는 기존에 뉴턴 역학에서 지배적인 개념을 차지했던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에 대한 개념을 바꿔놓았습니다. 시간 자체를 절대적인 기준값이 아닌 왜곡되고 변화되는 변수로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공간은 물질과 운동에 의존적이며 상대적”이고, “나아가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질은 뗄 수 없는 하나의 단일체를 이루며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6] 그래서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해서 우리가 경험하는 “시제”와 “시간적 생성”이 객관적 실제가 아니라 주관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과학철학자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의 견해를 “정적 시간이론”, “무시제 시간이론”, “B 시간 이론” 등으로 명명합니다.[7] 이와 관련된 내용을 마크 해리스 교수는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8]

상대성 이론은 단지 시간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상식’에 많은 도전을 제기한다. 특히 지구에서 인간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지금(now)’이라는 중요한 개념은 세계를 설명하는 확실한 과학적 속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관찰자의 준거 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우리의 현재 경험은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환상에 불과하다. 이런 이유에서, ‘블록 타임(block time)’이란 개념이 보다 유용한 시각을 제공하는데, 이것은 태초부터 종말까지의 모든 시간이 ‘한번에’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만약 과거, 현재, 미래를 구별하는 우리와 같은 사고방식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단일한 독립체로 존재하는 4차원의 시공간 우주가 되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시간이 흐른다(flowing time)’라는 개념, 즉 우리가 열린 미래로 이동할 때 과거가 직선적으로 계속해서 늘어난다는 개념은 우리 인간 의식의 주관적인 착각이다.

물론 이것이 우리의 시간 경험이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입증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 이론이 가리키는 것들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고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이 그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시간-공간이 서로 긴밀하게 연관성을 가지며 서로 안에서 상대성을 지니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죠. 일반상대성 이론은 우주의 팽창을 잘 설명해주며, 이 이론에서 유래한 수학적 개념인 초기 특이점(initial singularity)은 빅뱅을 통해 우주,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이 생겨났다는 이론과도 연결됩니다.[9] 우리는 시공간 속에서 살아가지만 이 시공간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시간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설명하는 어거스틴의 개념과도 잘 조화됩니다.[10] 또한 어거스틴은 시간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기보다는 영혼이 어떤 변화를 경험하여 느낌으로 시간을 측정한다고 보았습니다.[11]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12]

하오면 ’시간’이란 무엇이니이까? 아무도 내게 묻는 자가 없을 때는 아는 것 같다가도, 막상 묻는 자가 있어 그에게 설명하려 하면 나는 알 수가 없나이다. 하오나 내가 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약 아무것도 흘러지나가지 않을 때는 과거의 시간이란 없고, 만약 아무것도 다가오지 않을 때는 미래의 시간이 없을 것이며, 만약 아무것도 현존하지 않을 때는 현재의 시간이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니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인식은 한계가 있고 절대적이지 않으며, 그저 우리는 변화를 통해서 시간을 감지할 뿐입니다. 시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은 시간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것과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는 분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듯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시간을 초월하는 분이시라는 것이 다소 이신론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기 때문에, 마크 해리스는 시간과 관계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초월성은 영원에 관계되는 한편, 하나님의 내재성은 시간에 관계된다.”라고 말합니다.[13] 하나님은 영원에 계신 초월적인 분인 동시에 시간 속에서 우리와 관계하는 분이시라는 것이죠.

이렇듯 중력파를 검출했다는 것은 일반상대성 이론이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의 일부인 시공간의 한계에 대해 생각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며, 그것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 위에서 설명한 ‘블록 타임’이라는 개념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온 세계를 직시하시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해 조금이나마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예가 됩니다. 시공간에 제한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4차원의 시공간 우주를 하나의 단일체로 바라보시며 모든 것을 아신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14] 비록 시공간에 제한된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어떠한 것인지는 경험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정리하자면 중력파를 실제로 실험에서 검출 발견했다는 사실은 이런 하나님의 크심과 시공간 속의 우리의 한계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합니다.

좀 더 생각해보면, 중력파의 발견은 우리가 신앙에서 마주하게 되는 역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만듭니다. 사실 중력파의 검출이 매우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중력파가 시공간의 왜곡이기에, 중력파가 발생할 때 그것을 관찰하고자 하는 사람도 함께 왜곡되기 때문입니다. 즉 “중력파는 시공간 자체의 기하학적 요동이며, 관측자도 중력파를 따라 같이 흔들린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죠.[15] 시공간은 왜곡되었는데, 그것을 관찰하고 싶은 사람인 나조차도 함께 왜곡되어서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관측자의 한계가 더 높은 차원의 인식을 방해합니다. 비록 과학 기술의 발달이 중력파 검출에 공헌했지만, 시공간 속에서 관측자도 함께 왜곡되는 것으로 말미암는 관측의 어려움은 신앙에서 마주하는 역설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 생각하게 해줍니다. 시공간 안에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개념들을 마주할 때 혼란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정과 복음 전파의 문제, 인간의 자유의지와 주권적인 하나님의 작정의 문제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영원에 속한 초월적인 하나님이 동시에 시간에 관계하시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우리는 시간 안에서 살아가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력파 자체를 직접적으로 보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 검출하는 것처럼, 우리는 다 알 수는 없으나 신앙을 통해 모든 것을 미리 아시고 정하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고백합니다. 비약적인 비유이긴 하지만, 과학자들이 상대성이론을 통해 중력파의 존재를 말했듯이 우리는 성경을 의지하여 시공간을 초월하며 그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해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언젠가 보다 더 직접적으로 그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경험할 날이 오겠죠. 아무튼 중력파의 검출은 이런 사실에 대해 생각해볼 단초를 제공해줍니다.

추가적으로, 여러 곳에서 소개하듯이 중력파의 발견은 세상을 살펴볼 새로운 관측 도구를 얻었다는 의미를 준다고 합니다. 실제로 중력파를 검출한 연구소는 이제 관측소로 사용될 것이라고 하네요.[16] 가시광선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던 인류가 적외선과 자외선을 사용하고 더 나아가 다양한 도구를 통해 세상을 파악하고 바라보는 범위를 넓혀왔듯이, 중력파를 통해서 우리는 여전히 제한적이겠지만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다 더 풍성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주의할 점

물론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세계에 대한 좋은 과학적 설명으로서 이 이론을 인정하고 그 의미를 고찰할 수 있지만, 이것을 너무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의미에 대한 논의를 종결지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완전히 폐기해버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죠. 사실 검증주의를 따르는 아인슈타인에게 있어서 절대 시간과 공간은 사람이 감각적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즉 형이상학적인 것이었기에 논의가 무의미한 것이었습니다.[17] 그러나 이 개념이 상대성이론에서는 논의가 무의미하다 하더라도, 로렌츠와 같은 경우 “뉴턴의 절대시간과 절대공간 개념을 여전히 전제하며, 에터(또는 에테르) 등의 존재를 가정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18] 물론 마이컬슨-몰리 실험을 통해 에테르가 부정되기는 하는데, 이것의 존재를 계속 가정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또한 상대성 이론으로 인해 뉴턴의 상대 시간의 의미는 수정되겠지만 절대시간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는 견해가 존재합니다.[19] 예를 들어 상대성 이론에서 시간개념을 논의할 때 중요한 것이 동시성에 대한 것인데, 이것은 빛을 통해 정의내립니다. 그렇지만 “상대성이론적 시공간 개념은 실질적인 경험적 사실에 근거하여 고전적 시간 개념을 재고한 것에 불과”하며 “뿌앙까레가 말한 것처럼 만일 더 빠른 사건 전달 방법이 있다면 동시성은 다시 정의될 것”이라는 견해가 있음을 생각한다면,[20] 절대시간을 폐기해버릴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모어랜드와 크레이그는 이렇게 말하죠.[21]

동시성 관계에 대한 앎은 하나님 자신만이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시각 동기화를 얻는 데 빛 신호를 쓰는 것은 유한하고 무지한 피조물이 채택할 수밖에 없는 규약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아는, 살아 있고 능동적인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의존적이지 않다. 하나님의 시간 경험 속에서는, 시계로 시간을 재든 말든, 절대시간 안에 현재하는 한 순간이 존재할 것이다.

뉴턴은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이 하나님과 독립하여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적인 것이며 곧 하나님의 영원성과 편재성의 효과라고 여겼습니다.[22] 이 견해가 옳은지에 대해서는 숙고가 필요하지만, 이 또한 유신론적 세계관에 깊이 뿌리를 내린 개념으로 볼 수 있으며,[23] 그렇기에 절대시간과 공간이 우리의 감각으로 경험될 수 없다는 것으로 인해(그것만이 이유라면) 폐기해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과학적 연구 결과들을 포괄하면서 더 풍성한 설명을 해줄 수 있는 이론이 나타난다면, 뉴턴의 절대시간과 절대공간 개념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이해에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해줄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과학이 주는 선물을 통해 그 안에서 의미를 숙고하여 창조세계를 풍성하게 이해해나가면서도, 인간 지성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한 자세가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자세일 것입니다. 아무튼 이 글에서 시작한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할 수 있겠네요. “중력파는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크심을 보여줘.”라고 말이죠.


  1. 김국태,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적 시간과 공간 개념”, 「과학철학: 흐름과 쟁점, 그리고 확장」 (파주: 창비, 2011), 253–254.  ↩

  2. 김국태,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적 시간과 공간 개념”, 256.  ↩

  3. “관성계는 상대공간인데 이 속에서 정지한 물체는 그대로 정지해 있고, 운동하는 물체는 같은 속력, 같은 방향으로 그대로 운동한다.” – J. P. 모어랜드 & W. L. 크레이그, 『과학철학』 (서울: CLC, 2013), 146.  ↩

  4. 김국태,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적 시간과 공간 개념”, 258–260.  ↩

  5. 곽영직, “일반 상대성 이론”,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0&contents_id=296  ↩

  6. 김국태,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적 시간과 공간 개념”, 260.  ↩

  7. J. P. 모어랜드 & W. L. 크레이그, 『과학철학』, 164.  ↩

  8. 마크 해리스, 『창조의 본성』 (서울: 두리반, 2016), 38–39.  ↩

  9. 마크 해리스, 『창조의 본성』 , 48.  ↩

  10. 어거스틴, 『고백록』 (CLC, 2004), XI.14.17.  ↩

  11. 어거스틴, 『고백록』, XI.27.36.  ↩

  12. 어거스틴, 『고백록』, XI.14.17.  ↩

  13. 마크 해리스, 『창조의 본성』 , 161.  ↩

  14. 마크 해리스는 이렇게 소개한다. “하나님의 시간 경험은 종종 과학-종교 대화에서 제기되는 과학적인 ‘블록(block)’ 시간과 유사한데, 여기에서 모든 시간은 상대론적 물리학에서 말하는 4차원의 ‘시공 연속체(spacetime continnum)’로써 동시에 경험된다.” – 마크 해리스, 『창조의 본성』 , 156.  ↩

  15. https://namu.wiki/w/중력파  ↩

  16. http://www.dongascience.com/news/view/10299  ↩

  17. J. P. 모어랜드 & W. L. 크레이그, 『과학철학』, 150.  ↩

  18. 김국태,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적 시간과 공간 개념”, 263.  ↩

  19. J. P. 모어랜드 & W. L. 크레이그, 『과학철학』, 157.  ↩

  20. 김국태,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적 시간과 공간 개념”, 271.  ↩

  21. J. P. 모어랜드 & W. L. 크레이그, 『과학철학』, 161–162.  ↩

  22. J. P. 모어랜드 & W. L. 크레이그, 『과학철학』, 155–156.  ↩

  23. J. P. 모어랜드 & W. L. 크레이그, 『과학철학』, 157.  ↩

Over de auteur

재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 17세기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의 교회론을 연구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의들, 특히 교회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Comments 13

    1. Post
      Author
  1. 1.’절대적 시공간’ 의 개념이 상대성이론에서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상대성이론에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는데, 그 중에는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Neo-Lorenzian 해석도 있습니다. 이 해석에서는 절대적 동시성을 정의할 수 있고, 따라서 절대적 시간의 개념도 부활 가능합니다.
    (Willian Lang Craig가 이 해석을 옹호하는 것으로 유명하죠.)

    그러나 Neo-Lorenzian 해석은 양자장역학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2. 시간에 관한 B 이론, 혹은 ‘world-block theory’가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상대성이론과 가장 잘 부합하는 시간에 대한 철학적 견해이기는 하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상대성이론을 Neo-Lorenzian 으로 해석하게 되면 B-이론을 받아들일 이유는 적어집니다.

    3. ‘시간의 흐름’ 이 현대과학에서 설 자리가 없다는 주관적 인식의 생산물이라는 생각은 과학계에 널리 퍼진 오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전혀 엄밀하게 검토되지 않은 생각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쉽게 나오는 이유는 근본 물리법칙이 시간에 대해 대칭적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대충 말해, 기본 물리법칙에 t 대신 -t 를 대입해도 결과가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Leonard Susskind 같은 저명한 물리학자들은 시공간에 특정한 비대칭적 구조 (프랙탈 구조)를 상정하여 시간의 비대칭성을 근본적 수준에서 되살리려고 시도하고 있기도 하고, 또 양자역학이 시간에 대해 비대칭적이라는 논의도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근본 물리법칙’ 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열역학 같은 경우엔 명백하게 시간에 비대칭적인데, 이것을 근본물리법칙에서 제거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열역학을 양자역학 등으로 환원하는 것 이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 혹은 현재성이 현대과학 내에서 발견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현재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문제이고 이렇다 저렇다 쉽게 결론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4.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중력파가 하나님의 크심을 보여준다는 말에 별 다른 거부감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의 크심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중력파 보다는 차라리 날아가는 참새가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중력파만 작동하는 우주가 자연적으로 존재할 확률보다, 참새가 날아다니는 우주가 자연적으로 존재할 확률이 앞도적으로 낮기 때문입니다.

    중력파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지는 사실 현재로서 굉장히 불확실합니다. 중력파가 실제로 시공간의 물결인지, 아니면 중력장의 움직임인지도 명확하지 않고, 시공간이 정말로 장이나 입자와 같은 물리적 대상으로 취급될 수 있는지도 전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단순히 과학 이론으로부터 바로 답이 도출될 수 있는 질문들이 아니라, 그에 대한 해석을 필요로 합니다. 그 해석을 또 다시 신학과 연결시키는 것은 매우 난해한 일이 되겠지요.

    상당히 분명한 메시지가 있지 않는 한, 굳이 과학적 발견이나 이론을 신앙과 연결시켜야 할 이유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어떤 과학적 발견이건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발견이고, 이러한 당연한 의미에서 하나님과 연관되어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글이 말하는 중력파와 신앙사이의 관계도 특별히 그 이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1. Post
      Author

      상세한 댓글 감사합니다. 써주신 것에서 많이 배웠네요. 알려주신 것들에 대해서도 좀 더 공부해보아야겠어요. 참새가 하나님의 크심을 더 드러낸다는 것에 대해서도 동의합니다. 아마도 평소에 그것이 잘 와닿지 않는 이유는 익숙함 때문이겠죠. 과학적 발견이나 이론을 굳이 신앙과 연결시킬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동의합니다.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는 언급했는데, 진리와 연결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묵상 정도의 글이라고 보시면 좋을거 같네요. 아무튼 전 진짜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인터넷 상에서 익명이셔서 어떤 분이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1. 다시 읽어보니 오타와 비문이 넘치네요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딱히 비판하려고 쓴 것은 아닌데 너무 비판조로 쓴 것 같네요. 저 역시 재국님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이라고 제가 느끼는 것)에 공감합니다. 세상이 새로운 발견에 열광하고 떠들석한데, 과연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이에 대해 무어라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참 어려운 문제일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고민하시는 모습 자체가 멋지고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정확히 이 부분에 관해 William Craig가 얼마전에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력파 발견은 일반상대성이론의 신뢰도를 조금이라도 더 높여주었고, 일반상대성이론과 천문학적 관측 결과를 종합하면 시공간에는 반드시 시작이 존재해야 하고, 이는 그가 제시한 신 존재에 대한 논변인 Kalam Cosmological Argument (시공간에 시작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존재하게 해준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이 원인은 그 자체가 시공간적(=물리적) 존재일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비시공간적, 초월적 존재가 있어야만 한다) 의 설득력을 조금이라도 더 높여준다, 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1. Post
          Author

          격려 감사합니다^^ 저도 비판이라고 느끼기 보단 좋은 조언이라고 생각했어요. Craig의 이야기도 흥미롭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1. Post
      Author
  2. [영과 영원에 대하여…] 나름 생각을 정리해본 것인데 도움이 될까하여…~^^

    [시간과 공간과 영원의 상관관계 3D모델링]

    ^^저도 그냥 성경에 나온 것을 알 뿐입니다. 영에 대해서는

    예수님 말씀이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ㅋㅋ

    그리고 영원과 시간에 대한 개념은 나름 연구하여 지금까지 보아온 개념들과 견주었을때 아직 흐트러지지 않은 개념을 입체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동시에 창조되었다고 성경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영원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그냥 있었던 것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과 공간을 모두 포함하며 또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공간을 현재 처럼 넘나들 수 있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추가적으로 빛의 속도론과 인식의 반응속도론을 통해 인식의 한계인 마치 화학평형이나 에너지 평형으로 미시세계를 거시세계의 관점에서는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상대적 인식의 한계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죠. 이것은 마치 고전 뉴턴의 물리학과 아인슈타인의 현대 물리학의 상존을 상호 인정해야하는 차원에서와 같이…)

    그래서 영원을 다르게 표현할 때 영원한 현재라는 표현도 하더군요.(맞나? ㅋㅋ)

    하여튼 이 개념을 입체적으로 설명을 하지면 이렇게 해보시면 됩니다.

    시간과 공간은 처음과 마지막이 존재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즉 영원이라는 전체집합에 입체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삶은 달걀(투명)이나 식빵(투명하게 속이 보이는)을 식탁위에 올려 놓고 젓가락 하나를 들고서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뚫고 지나가는 것이 시간의 과거 현재 미래라고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즉 태초에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마치 3D프린트 처럼 누적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태초에가 식빵의 왼쪽 끝이구요 그때 동시에 젓가락을 폭 찌르는 순간과 같이요.

    그리고 오늘이라는 시간이 식빵의 가운데쯤이라고 생각해보는거죠.

    그런데 지금 이 실험을 하는 목사님의 관찰자 시점이 바로 하나님의 시점입니다. 왼쪽 끝이던 중간이던 오른쪽 끝이던 그 하나님의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는 항상 현재로 보이는 것이죠. 그 관찰자 시점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싶은 시점에 남아있는 젓가락으로 식빵에서 지나가는 젓가락 맨 앞 부분을 위에서 푹 찔러서 마주치게해보세요. 그것이 구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현현(천사 등등)의 사건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기드온 사건이니 엘리야나 사무엘 이사야 등등에서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 사건들.

    뭐 대충 이렇게 식빵을 공간으로 왼쪽의 끝을 태초에로 오른쪽 끝을 종말로 새하늘 새땅이 시작되는 시점으로 이해한다면…식빵을 둘러싼 그 주위의 공간은 식빵과 식빵의 안을 통과하는 시간을 즉 창조된 시공간을 모두 포함하며 내재할 수 있는 영원이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름 시간과 공간과 영원에 대한 모델링에 대한 썰을 풀어봤습니다^^

    그리고 이 개념이 궁극적으로
    왜 필요한 것인지에 대하여 덧붙이자면
    현재라는 오늘이 전부라는 현재적종말론을 지각으로 내재화 시키는 것이 곧 코람데오의 여호와 경외의 지름길인 인식으로 수렴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또한 인식론과 경험론에 대한 관점과
    오늘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미분적 개념과 적분적 개념을 활용해서 오늘이라는 것이 찰라적인 시작과 종말이라는 것을 인식 할 수 있는 이해의 지평이 열린다면

    오늘이라는 현재의 지금 순간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지극히 작은 일에
    주께하듯하라는 것이

    오직 새계명을 마음에 새기고 지켜행하는 자의
    여호와 경외함의
    참된 제자의 표지임을 생각해봅니다.

    1. Post
      Author
  3. 영원한 현재(영원이라는 범주에서 창조된 시간과 공간에 영원의 세계에서 빛의 반응 속도로 침투해 들어와 상대적으로 거시세계인 우리의 현실에서 인식을 하지를 못하는 현재에 내재된 상태)?

    매개체는…말(word)
    인식 반응 검지판…마음의 생각

    로 현재 인식하면서 계속 묵상중이랍니다.

    요8:31~32절

  4. 귀한 글 감사합니다.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큰 틀에서 개념은 잡았습니다. 목회에도 도움이 되는 글이었습니다. 앞으로 멋진 사역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시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으실 것이라 믿고 기대합니다~ ^^

    1. Post
      Author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