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알파고에서 바빙크까지

알파고가 놀라운 실력을 드러내면서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뛰어나져서 우리 삶에 큰 변화 또는 심지어 위기가 찾아오는 것이 아니냐는 고전적인 이야기들도 좀 더 현실감 있게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인간이 담당하는 수많은 일들을 인공지능이 더 잘 수행하게 될 전망이고, 경제와 산업구조에 큰 폭풍이 몰아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넘어서서 인공지능은 결국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관련되기 때문에 한번쯤 생각해보아야 할 주제입니다. 여기서는 이와 관련된 잡담들을 좀 해보겠습니다.

저는 인공지능 분야를 제대로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그저 학부 때 인공지능 수업을 듣고 다중신경망을 프로그래밍으로 구현해본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설명에 정확성이 떨어질 수가 있습니다(지적 환영입니다^^). 그래도 이해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쉽게 글을 풀어내보려고 합니다.

신경망 알고리즘의 “학습”이란?

개인적으로 보기엔 알파고의 능력이 놀라운 것은 사실이지만, 인공지능 분야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사람들이 이에 대해 너무 확대해석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학습”이라는 단어를 인간의 학습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직 무리입니다. 지금의 인공지능이 행하는 학습은 인간 뇌의 구조를 본 딴 알고리즘이긴 하지만 아직은 제한된 범위의 학습입니다. 그것이 컴퓨터의 발전에 의해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긴 했지만 말이죠. 알파고에 사용된 딥러닝의 학습을 단순화시켜서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유수한 기업에 나이가 지긋하고 성미가 까다로운 회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커피를 굉장히 좋아했는데, 입맛이 너무 까다로워서 그때그때 마시고 싶은 커피의 종류가 천차만별이었습니다. 그의 비서는 그가 원하는대로 다양한 커피를 만들어 줘야 했습니다. 문제는 회장이 자신이 원하는 커피가 뭔지를 정확히 말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비서는 무척 고생했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문득 회장은 비서가 자신의 얼굴만 보고도 자신의 맘에 쏙 드는 원하는 커피를 만들어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오랜 세월을 회장과 함께 하면서, 비서는 어느덧 회장의 표정과 몸 상태, 그 날의 날씨, 회장의 가정과 회사의 상황 등의 요소에 따라 회장이 무슨 커피를 원하는지를 곧바로 파악할 수 있도록 경험적으로 학습한 것입니다. 비서는 자신이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정보들을 토대로, 회장이 원하는 커피의 종류를 선택했습니다. 처음엔 많이 실수했을 수 있지만 수없이 많은 경험이 비서의 판단을 조정시켜줬고, 어느새 고민조차 하지 않고도 바로 회장이 원하는 커피를 맞추는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이론을 설명하기엔 글이 너무 어려워져서 비유로 예를 든 것이지만, 비서가 보여주는 학습이 바로 딥러닝의 학습입니다. 딥러닝에서 사용하는 신경망 알고리즘은 인간의 뇌의 특징의 일부를 모방해서 만든 신경망 구조의 프로그램입니다. 우리에게는 시각, 미각, 청각, 촉각 등의 다양한 감각을 받아들이는 감각 세포들이 있고, 그것들이 감각된 정보를 뇌로 전달해나가죠. 신경망 알고리즘에도 데이터의 입력을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는 ‘뉴런’들이 있습니다. 그 녀석들이 입력된 다양한 정보를 병렬적으로 받아들이고 자체 연산을 해서 정보의 결과를 다른 뉴런들에게 넘겨줍니다. 넘겨줄 때 각각의 뉴런들마다 자체적으로 ’가중치’라는 것을 곱해서 다음 뉴런에게 넘겨주죠. 그 뉴런들은 연산을 해서 또 다음 뉴런들에게 넘겨줍니다. 그렇게 넘겨주다보면 마지막 목적지에 가서 최종 결과가 나오겠죠? 처음 뉴런이 받아들인 데이터들이 비서가 회장과 주변 상황에서 얻은 정보들이라고 본다면, 뉴런들 사이에 값을 연산하고 넘기고 넘겨서 최종적으로 나온 결과는 바로 ‘회장이 원하는 커피’입니다. 처음에는 회장이 원하는 커피가 안 나올 수 있겠죠. 그러면 각각 뉴런들의 연결 상태를(가중치를 변경하는 것 같은) 재조정해줍니다. 다시 정보를 받아들이고, 결과물이 나오면 평가를 하고 또 조정을 합니다. 다양한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것을 반복하다보면, 이 정보들의 특징을 구별해서 잘 분류할 줄 알게 됩니다. 이 신경망이라는 것이 어느새 “이럴 땐 회장님이 이런 커피를 원해.”라는 것을 점점 잘 맞추게 되는 학습을 하는 것이죠. 참 신기하죠.

딥러닝에서 사용하는 이런 학습의 목적은 쉽게 말하면 데이터의 “분류”입니다. [1] 이게 전부는 아니지만 어떤 면에서 인공신경망은 일단 주어지는 데이터를 잘 구분해내는 구분선을 그려놓는 것이 목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2] 또한 더 나아가서 원하는 결과물을 내어놓는 근사함수를 잘 유추해내는 것이라고도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함수라는 것은 입력값 X가 있으면 함수의 자체 연산을 거쳐서 출력값 Y을 내놓는 자판기 같은 것입니다. 예를들어 “다양한 상황이나 변수(X)에 따라 회장이 원하는 커피가 달라지는 것(Y)”은 함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입력값 X가 회장의 기분, 표정, 상황이라면 출력값 Y는 회장이 원하는 커피죠. 분명 상관관계가 있는데 그것을 논리적으로 알아내기가 쉽지 않죠. 이를 비선형함수라고 지칭합니다.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 아무튼 쉽게 보면 이 함수에 최대한 가까워지게 상관관계에 따라 입력에 대한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것이 곧 근사함수입니다. 회장이 원하는대로 커피를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이 곧 비서가 터득한 근사함수죠. 처음에는 원하는 결과를 잘 못내놓지만, 학습을 통해 최적화를 시키면 시킬수록 결과가 좋아집니다. 아무튼 신경망은 수많은 데이터들을 받아들이는 “경험”을 통해서, 쉽게 말하면 구현된 알고리즘 자체가 잘 길들여져 가면서 데이터 사이의 특징들을 점점 더 잘 구분하여 최적의 분류를 해거나 적절한 결과값을 내놓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사실 복잡한 분류를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워서 신경망에 대한 관심이 뜸해졌는데, 그것을 해결하면서 다시금 이 알고리즘이 관심을 받게 됩니다. 이에 관해서는 여기를 보시면 잘 설명하네요. [3] 아무튼 이 신경망이라는 것이 학습을 하면 구분선도 잘 그리고, 그러다보니 원하는 결과값을 잘 내놓게 됩니다. 그리고 학습을 한 다음에는 과거의 자료들을 다시 검토할 필요없이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결과는 바로 도출해버립니다. 우리가 강아지를 보면 고민하지 않고 바로 강아지라고 판단하는 것과 비슷하죠. 이 신경망은 데이터의 행렬 값을 통해 다차원적으로 표현된 데이터가 그리는 공간 속에서 특정 개체가 갖는 보편적인 특징들을 포착해 개체들을 구분하여 분류하거나 적절한 값을 도출해냅니다. 알파고에서 학습할 때 입력되는 차원은 무려 48차원이라고 하네요. [4]

알파고의 학습이 보여주는 한계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신경망 알고리즘은 기본적인 개념에 여러가지가 응용되서 꽤 어렵습니다. 한 가지 알고리즘만 있는 것도 아니구요. 아무튼 학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알파고의 학습이란 결국 주어진 데이터를 점점 더 잘 분류하거나, 많은 데이터를 경험하는 것을 토대로 어떤 정보가 주어졌을 때 적절한 예측값을 내놓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대단하긴 대단하죠. 그렇지만 이것은 인간의 학습과 비교했을 때 제한된 범주의 학습입니다. 인간의 학습은 좀 더 복잡하고 고차원적입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학습은 무엇을 학습할지에 대해 정해야하고, 그 특정 학습을 위한 프로그래머의 세심한 조율이 필요합니다(그것이 지도학습이든 비지도 학습이든 간에). 일종의 저차원적인 학습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알파고는 ’바둑’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고차원적인 학습을 한 것이 아닙니다. 알파고는 크게 두 가지를 학습했습니다. 하나는 수많은 바둑 대국 데이터에 대한 경험을 토대로 “이 상황에서 어디에 돌을 두는 것이 유리한가?”를 판별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이 상황은 승률이 얼마나 되는가?”라는 것에 대한 판별입니다. 회장님 커피 맞추기랑 비슷하죠? 이 두 가지와 경우의 수를 따져보는 연산 방식의 조합을 통해 최고의 승률을 보이는 곳에 돌을 위치시켜나가는 확률게임을 해서 바둑을 두도록 만든 것이 알파고입니다. 좀 더 설명하자면, 알파고는 크게 정책망, 가치망, 몬테 카를로 탐색 트리라는 구조가 혼합되서 작동합니다. [5] 정책망은 입력된 바둑판의 현재 상황에서 앞으로 놓을 바둑돌의 위치가 어떤 곳이 더 유리한지를 점수를 매기는 역할을 합니다. 가치망은 현재 상황에서 이길 확률이 얼마인지를 판단하고요. 그리고 몬테 카를로 탐색 트리라는(뭔가 멋진 이름의..) 것은 모든 경우의 수를 따질 수는 없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경우의 수를 따져보는 작업을 수행합니다. 알파고의 정책망은 현재까지 이루어진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의 바둑 기보들을 입력하여 학습시켜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수를 놓는 것이 좋은 것인지 결과를 내어놓는 역할을 합니다(즉 회장님 기분에 가장 적절한 커피를 내놓는 거죠.). 그리고 알파고 내에서 자기들끼리 수없이(다른 할 일은 없으므로..) 대국을 해서 정책망이 더 정교해지도록 강화발전시킵니다. 가치망은 정책망의 데이터들을 학습시켜서 각 상황의 승률을 보다 정밀하게 예측합니다.

이러한 정책망, 가치망, 몬테 카를로 탐색 트리가 서로 멋진 상호 작용을 통해서 바둑 대결을 수행하게 됩니다.[6] 그래서 제가 보기에 사실 진짜 기가 막힌 것은 이런 신경망을 가지고 바둑을 두고 이길 수 있는 전체 알고리즘 구조를 구현해 낸 개발자들의 능력입니다. 상황이 주어지면 정책망을 통해 유리한 수가 될 곳만을 뽑아서, 몬테 카를로를 통해 경우의 수를 따져보면서 가치망으로 승률을 계산합니다. 그리고 유리한 곳을 택해서 다음 수를 두는거죠. 말 그대로 수많은 학습을 통해 도출된 결과물을 가지고 현 상황의 최적의 수를 판단하고 수행하는 것이죠. 방대한 데이터를 토대로 만들어진 ’유리한 지점을 판단하는 능력’과 ’승률을 판단하는 능력’과 ’정확한 경우의 수 연산 능력’의 조합은 바둑의 프로 9단을 이길 정도의 무시무시함을 보여줍니다. 심리전 따위에 흔들릴 일도 없습니다. 그런 것은 프로그램 자체에 구현이 안 되어 있거든요.

아무튼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딥러닝에 구현된 인공지능의 학습이란 것이 대단하긴 하지만. “무엇을 분류하는, 혹은 결과로 내놓는 학습을 하게 할지 방향성을 정하는 것(유리함과 승률을 각각 결과로 내놓았죠)”과 “게임을 이기기 위해 필요한 연산 과정은 무엇인지”를 판단하고 만들어낸 개발자들에 더 경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둑이라는 최소한의 규칙도 결국 개발자가 준 것이고, 알파고는 개발자가 짜놓은 정교한 틀 안에서 학습하고 결과를 도출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 학습하는 알파고의 무서움보다는 그 알고리즘을 가지고서 알파고를 구현한 “설계자의 능력”이 더 대단한 것 같습니다. 이런 알고리즘을 개발해내는 것도 대단해보이구요. 물론 이 학습이 점차 더 고차원적으로 어떻게 발전할지에, 그것이 어디까지 가능할지는 지켜보아야 할 영역입니다.

학습과 빅데이터

곁다리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러한 알파고의 학습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 바로 빅데이터라는 것입니다. 16만 개의 바둑 기보라는 데이터가 있으니까, 그것을 토대로 상황에 따른 수의 유리함이나 승률을 결과로 내놓을 수 있게 학습시킬 수가 있는거죠. 네이버 영어 사전 같은 곳을 보면 영어 문장에 따라 한글로 번역된 자료들이 점점 더 쌓이고 있는데, 이 데이터들이 수없이 쌓이면 그 자체가 번역을 학습시킬 수 있는 빅데이터가 됩니다. 아마도 학습시키는 방식이나 구조가 알파고보단 더 복잡하겠지만요. 무서운 것은 우리가 무의식 중에 이런 빅데이터를 많이 제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같은 곳에는 우리 사진이나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 사진들을 많이 올리죠. 이걸 잘 활용해서 페이스북이 식당을 열면 어떨까요?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얼굴 인식을 해서 우리가 누군지 파악하고, 페이스북의 사진들을 토대로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파악해서 맞춤형으로 음식을 내놓는 서비스를 제공할지도 모릅니다. 이미 페이스북에서 사람들이 심심하면 해보는 비슷한 연예인 찾기라던가, 자주쓰는 단어들을 태그 클라우드로 보여준다든가 하는 것들은 그런 데이터들을 활용한 예겠죠. 그런면에서 페이스북은 공짜가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데이터들을 자진해서 그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인공지능과 자의식

겉으로 보기에 알파고는 바둑을 둘 때 마치 사람이, 그것도 프로가 두는 것처럼 바둑을 둡니다. 인터넷으로만 보면 사람이랑 두는 줄 알겠죠. 그러나 알파고는 바둑에서 이겼다고 카타르시스를 느끼진 않습니다. 졌다고 우울해하지도 않죠. 사실 자신이 두는 것이 ’바둑’인 줄도 모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알파고는 ’자의식’이 없습니다.

여기서 과연 “의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떠오릅니다. 인공지능과 의식에 대한 주제는 이전에 한 번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인간의 의식이란 복잡한 물리/화학/생물학적 작용으로 구현된다고 여깁니다. 그런 면에서 지금의 인공지능이 발전하면 인간이 행하는 것과 동일한 의식이 구현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그러나 현재의 인공지능 개발은 약인공지능(Weak AI)으로 주어진 조건 아래서만 결정을 내리는 제한된 인공지능입니다. [7] 자아를 가지고 의식이 있어야 비로소 우리가 상상하는 인공지능, 즉 강인공지능(Strong AI)이 되는 것인데, 이것을 개발해내기에는 아직 회의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약인공지능이 발전하면 강인공지능이 될거라고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지만,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한 이론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의식이 복잡한 물리/화학/생물학적 작용으로 환원이 가능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멀더라도 언젠가 도달할 미래로 여겨지겠죠. 저는 좀 부정적으로 봅니다만, 설사 인간의 기능을 완벽히 모방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정말 의식과 자아가 있는 거라고 볼 수 있을까요? 알파고가 바둑을 잘 두지만 본인이 뭘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의식이나 마음이라는 것은 그저 기능에 불과하다는 견해 등의 복잡한 논의가 있긴 하지만 말이죠.

만약 과학과 기술이 더 발전해서 인간의 뇌의 신비가 다 밝혀지고, 그것을 통해 강인공지능이 완전히 구현된다면, 어떤 면에서 인간의 마음이나 자아나 의식은 물질적인것으로 다 환원된다고 여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영혼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영혼이란 사실 없는 것일까요?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하는데 말이죠. 만약 육체로, 물리적인 부분으로 인간의 모든 것이 설명된다면 영혼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육체와 정신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견해들

사실 철학적인 면에서 인간을 물질적인 존재로 보는 입장은 최근의 것이 아닙니다.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 철학자들 중 데모크리토스가 이런 입장을 갖고 있었죠. [8] 물론 이 때는 담론사적으로 물질/비물질의 구분이 뚜렷해지지 않았을 때지만 말입니다.[9] 이런 입장은 계몽주의와 함께 더 뚜렷한 형태로 등장합니다. 18세기에 라 메트리라는 사람은 『영혼론』과 『인간기계론』에서 감각혼과 신경, 뇌의 관계를 설명하고 기계로서의 인체에 대해 논합니다. [10] 그리고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을 물질적 기계로 파악하는 것에 대한 강력한 원동력을 부여했죠.

그렇지만 그럼에도 육체와 정신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견해에는 여러 입장이 있습니다. 열거해보자면 크게 일원론적 관점과 이원론적 관점이 있으며, 전자에는 극단적 유물론, 동일성이론, 관념주의, 양면론 등이 있고, 후자에는 상호작용론, 평행론, 예정조화론, 우인론, 수반현상론 등이 있습니다. [11] 복잡하죠. 이런 관점들을 간단하게 말하지면 정신과 육체의 한 측면으로 나머지가 환원될 수 있는가(일원론)와 그것들이 환원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서로 작용하느냐(이원론)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다. 이 부분에는 많은 논의와 반론들이 있지만 명확한 해결은 쉽지 않은 상황이며, 과학이 발전했지만 아직도 철학적인 해석의 여지는 많이 있는 상황입니다. 간단하게 물질로 환원될 수 있어!라는 말로 해결되는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바빙크를 통해 살펴본 신학적 관점

그렇다면 신학적인 관점으로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며, 영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이 영적인 존재이며 물리화학적 요소만으로 환원될 수 없음은 성경적으로 명확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영이라는 용어를 다시 정의해야죠. 하지만 발전되는 뇌 과학을 통해 마음 현상이 물리적 현상으로 설명이 되는 부분들이 많아지고, 인공지능을 통해 컴퓨터가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된 기능들을 수행하는 현실 속에서, 언젠가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아직 우리에게 밝혀지지 않은 모든 빈틈을 매울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여기서 우린 바빙크의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빙크에게 있어 인간은 영적 존재이지만, “인간의 영적인 요소는 처음부터 몸에 적응되고 몸을 위해 조직”되었다고 말합니다.[12]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게 있어서 물리적인 육체의 중요성은 단순히 영혼이 거하는 좌소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즉 영혼만 하나님의 형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도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13]

인간의 육체 역시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다. 신적 계시를 알지 못하거나 부정하는 철학은 언제나 다시금 경험론이나 관념론, 유물론이나 유심론에 빠진다. 하지만 성경은 이 둘을 조화시킨다. 인간은 영을 지니는데, 이 영은 정신적으로 통합되었고, 그 본성에 의해 반드시 몸에 거주해야만 한다. 육체적으로, 감각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다.

그리고 바빙크는 또한 정신과 육체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관점들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14]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 갖는 속성은 이해될 수는 없으나, 우인론이나 예정 조화, 또는 영향 체계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긴밀하다. 그것은 윤리적이 아니라 물리적이다. 그것은 아주 친밀하여 단일 본성, 단일 인격, 단일 자아가 그 둘과 그 모든 활동의 주체다. 눈으로 보고, 두뇌로 생각하고, 손으로 잡고, 발로 걷는 것은 항상 동일한 영혼이다.

그러므로 육체는 영혼의 도구인 동시에, 인간의 영혼은 육체를 통해 나타나고 활동합니다.[15] 육체는 영혼과의 긴밀한 결합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영혼의 작용은 육체를 통해 드러납니다.

그래서 설사 과학 연구를 통해 인간의 마음의 활동이 육체적 현상으로 어떻게 설명되는지 상세히 밝혀지더라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영혼과 육체는 아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전인적 존재인 인간의 영혼의 작용이 육체의 작용을 통해 상세히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런 면에서 죄에 중독되는 마음의 현상이 뇌의 중독 현상과 상당부분 흡사한 것은 당연한 것일 수 있습니다.)

육체는 영혼이 사용하는 단순한 인형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이 드러나고 기능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과학의 발달로 얻은 인간 육체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인간을 모델로 해서 연구하는 인공지능의 발달은 영혼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이 육체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알게 해주며,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정교하고 놀랍게 창조하셨는지를 드러내줍니다. 더불어서 또한 바빙크가 설명하는 이런 인간관은 육체를 하찮게 보고 영혼만 따로 귀한 것으로 여기는 견해 또한 잘못된 것임을 잘 알려줍니다. 영혼과 육체, 둘 다 우리의 인간됨의 필수적인 요소이며, 둘 다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바빙크에게 있어서 육체는 아무 의미가 없고 영혼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여 인간됨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다 하나님의 형상에 속합니다. 영혼은 긴밀하게 연결된 육체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외부로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회복되는 부활 이후에도 사람은 육체를 가질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런 관점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은 단지 영적인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로도 영광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이겠죠.

나가는 말

이야기가 알파고에서 시작해서 산으로 온 기분이 드네요. 정리하자면 1) 알파고의 학습이 대단하긴 하지만 너무 대단하게 여길 필요는 아직 없다는 것, 2) 알파고를 만든 개발자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는 것, 3) 아직은 약인공지능의 단계이며 강인공지능으로 가는 길이 탄탄대로는 아니라는 것, 4) 이 분야에서 인간의 자아와 의식이 기능으로 환원될 수 있는가가 논점이 된다는 것, 5)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 대해서 바빙크는 둘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이며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1. 이에 관하여는 여기서 쉽게 설명하네요. http://www.bloter.net/archives/201445  ↩

  2. 이에 관해, 딥러닝에 대해서 여기서 잘 소개합니다. http://t-robotics.blogspot.kr/2015/05/deep-learning.html?m=1  ↩

  3. http://egloos.zum.com/greentec/v/4136487  ↩

  4. https://brunch.co.kr/@justinleeanac/2  ↩

  5. https://namu.wiki/w/알파고#s–4.6  ↩

  6. 이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면 좋습니다. http://pgr21.com/pb/pb.php?id=freedom&no=63971&page=2  ↩

  7. 이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조하면 좋습니다. https://namu.wiki/w/인공지능  ↩

  8. 박승찬, “생명의 원리에서 인격의 중심에로: 서양철학적 관점에서 본 영혼론”, 「가톨릭신학과사상」 제67호, (신학과사상학회, 2011.6), 73–74.  ↩

  9. 이정우, 『개념-뿌리들』, 제 2권, (산해, 2010), 22.  ↩

  10. 여인석, “라메트리의 인간기계론과 뇌의 문제”, 「의철학연구」 제7집, (한국의철학회, 2009.6), 92.  ↩

  11. Norman L. Geisler, Paul D. Feinberg, Introduction to Philosophy, (Baker Academic, 1979); 위거찬 역, 『기독교철학개론』, (기독교문서선교회, 1987), 199–213.  ↩

  12. Herman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박태현 역, 『개혁교의학』, 제2권, (부흥과개혁사, 2011), 694.[/footnote]  ↩

  13. Herman Bavinck, 『개혁교의학』, 제2권, 698.  ↩

  14. Herman Bavinck, 『개혁교의학』, 제2권, 698.  ↩

  15. Herman Bavinck, 『개혁교의학』, 제2권, 699.  ↩

Over de auteur

재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 17세기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의 교회론을 연구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의들, 특히 교회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Comments 3

  1. 흥미롭네요. 저는 성경을 보면서 성경의 심신 이론이 기능적으로 볼 때 영, 혼, 육의 삼원론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존재론적으로 본다면 영 vs 혼+육 의 이원론이라 해야 할 것 같고요.

    우리가 흔히 마음이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보더라도 충분히 육체에 속하는 문제일 수 있습니다.
    반면 영은 분명 그렇지 않습니다.
    악한 영이나 천사와 같은 영들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영을 육체 없이 존재할 수있는 존재로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만 생각해보아도, 영과 육은 실체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육체가 없으시니까요.

    반면 혼, 마음, 혹은 정신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최소한, 그렇게 봐야 할 강력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요.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단순히 정신적 측면에서 더 뛰어나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단지 연속적인 차이 밖에는 없겠죠. 그 차이는 분명 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할 수 있느냐 없느냐.

    그런 점에서 저는 인공지능이 정말로 완전한 지능을 갖게되고, 인간과 같은 ‘마음’ 을 갖게 된다고 해서 놀랄 일은 하나도 없다고 봅니다. 강인공지능의 출현은 필연적이지 않나 싶고요.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영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지성이나 감성도 결국은 육의 일부분이라는 걸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그것으로 ‘인간’ 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물론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놀라운 곳이지만,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영적 존재인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1. Post
      Author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면 인간에게 영이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 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이란 어떤 것인지가 고민할 부분이 될 거 같네요. 전통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성이 있는 것과 연결되는 것으로 많은 이들이 생각해왔고, 그것을 영혼과도 관련시켰으니까요. 지성과 감성이 육에만 속하는 것이라면 영은 과연 무엇일까요. 만약 강인공지능이 가능해진다면 이것은 필연적으로 던져지는 질문이 될 것입니다. 가능하든 그렇지 않든, 가능성 자체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문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종의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개혁주의 전통 아래에서는(물론 그 안에서도 다양한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주로 성경에서 영과 혼이 인간에 대해 사용될 때에는 반복되거나 병행되거나 교환되어 사용되기에 영과 혼을 나누기보단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물론 영혼과 육체를 너무 분리하기보다는 부활 이후에 인간은 육체를 갖고 활동한다는 점에서 긴밀한 연관을 가진 것으로 보죠. 이런 관점에 더하여 지성이 영혼에만 속한 것으로 여긴다면, 강인공지능의 가능성은 위협적으로 여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설사 강인공지능이 가능하더라도, 바빙크의 견해가 최소한 그런 두려움(?)을 제거해주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해서 소개한 것이구요. 물론 모든 답을 주진 않을 수 있겠지만 말이죠.

      아무튼 인공지능이 발달할 수록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지는 계기가 될 거 같습니다. 견해를 제시해주셔서 좀 더 생각해보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