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인간관(2): 인공지능, 뇌과학, 그리고 환원주의

지난 포스팅에서는 기독교와 과학이 필연적으로 부딪쳐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그 과학적 주장 뒤에 숨어있는 자연주의적 전제가 기독교 사상과 부딪치는 것이라는 것을 간략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자연주의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가 있는대요. 자연주의는 여러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과학에 있어서 방법론적인 자연주의와 철학적인 자연주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방법론적인 자연주의란 과학적 물음에 대한 답변과 탐구를 하나님의 개입 같은 개념을 배제하고 자연적인 것만으로 설명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며, 철학적인 자연주의는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자연 세계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며, 신과 천사와 그 비슷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철학적 주장”입니다.1 그러므로 지금 이 글에서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일단 철학적인 자연주의를 전제하고 진행되는 과학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공격받는 인간관

이러한 철학적 자연주의를 전제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학을 무기로 사용하여 전통적 인간관을 공격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른 동/식물들과 구분되는 고유의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런 생각의 근거 자체가 흔들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인간의 고유한 독특성이 위협을 받게 되는 것이죠. 영혼이 있고 지성적인 존재이며, 또한 기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라는 인식들이 공격을 받게 됩니다.

진화심리학이라는 분야에서는 “자연선택이 인간의 몸을 산출했다면 그것이 인간의 믿음 및 행위의 모든 측면도 설명”할 수 있다고 인간에 대해 전제합니다.2 그것에 따르면 인간의 자아, 의지, 도덕적 가치란 그저 자연적이고 우연적인 진화의 산물이 된다는 거죠. 그런 면에서 윤리는 하나의 속임수입니다. 윤리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라고 말할 근거가 없습니다. 혹은 그냥 실용적으로 상정된 것이 윤리일 뿐인거죠. 어떤 것이 더 숭고하고 위대한 가치를 지닌 도덕적 행동인지에 대해서 말할 수가 없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해 종교 영역에서만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간의 가치관에 대한 근본적인 위협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과학이라는 무기 자체가 현 시대에 매우 강력한 힘을 갖고 있고, 반론을 제기하려는 자들의 상당수조차 이미 자연주의적인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사실 적절한 반론을 주장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3

사실 이러한 인간이해는 생명과학의 발전과 맞물려서 뇌 과학인지과학 같은 분야의 발전을 촉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인간의 모든 부분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있었죠. 열심히 탐구하다보면 모든 비밀이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고 응용이 가능하도록 낱낱히 밝혀질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성과 의지, 인간의 영혼과 마음을 물질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인해서 자연스럽게 기계로 그것을 구현할 수도 있다는 발상을 갖고 인공지능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마음

인공지능하면 무엇이 생각나시나요? 일반적으로 인공지능에 대해서는 두 종류의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과 같은 종류의 마음을 구현하는 것이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가능하다는 견해가 있는데 이것을 “강한 인공지능”이라고 부르며, 다른 하나는 사람과 같은 마음 구현은 불가능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연구하는데 인공지능 연구가 유익하다는 견해로 이것을 “약한 인공지능”이라고 부릅니다.4

강한 인공지능을 주장하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마음이 유물론적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자연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마음을 설명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기능주의’란 것을 말합니다. 기능주의란, “심적 상태는 기능 상태와 동일하므로, 인간 두뇌 이외의 어떤 것(예, 컴퓨터나 인공지능체계)이 동일한 기능 상태에 있다면 그것들은 또한 동일한 심적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5 다시 말하자면, 컴퓨터가 ‘인간과 같은 기능’을 갖는다면 그것은 곧 인간과 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 기능주의의 견해입니다. 즉 인간의 마음의 기능과 동일하게 컴퓨터가 기능을 수행하면 된다는 것이죠.

이런 견해와 함께 등장한 것이 바로 “튜링 테스트”란 것입니다. 얼마 전에 튜링에 대한 이야기가 ’이미테이션 게임’이란 제목의 영화로도 나왔었죠? 이 테스트가 무엇인지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런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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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있는지 볼 수 없는 방 두 개에 컴퓨터 A와 사람 B가 각각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 컴퓨터 A와 사람 B가 사람 C에게 서로 자신이 진짜 사람임을 주장합니다. 이 때 사람 C가 일정 비율 이상으로 컴퓨터 A가 진짜 사람이라고 판단한다면, 이 컴퓨터 A는 사고능력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 튜링테스트입니다. 이 테스트를 통과한 컴퓨터는 인간의 인지와 심리상태와 동일한 혹은 심지어 더 뛰어난 ‘기능’을 가지기 때문에 마음이나 인지체계로 간주할 수 있다는 주장인 것이죠.6

물론 아직까지 이 테스트를 통과한 컴퓨터는 없습니다. 최근에 튜링테스트를 통과한 컴퓨터가 나왔다고 뉴스가 떠들석하게 났었지만 여러가지로 부실한 점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이 테스트를 통과하면 정말 이 컴퓨터는 인간과 같은 마음을 가진 것일까요? 써얼이란 사람은 이에 대해서 “중국어 방”이라는 예를 들어 반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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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를 못하는 사람 A가 방 안에 있고, 그 방에는 중국어로 질문이 들어왔을 때 적절히 대답할 수 있도록 하는 지침들이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 B가 밖에서 A에게 질문을 합니다. 이 때 A가 중국어를 전혀 모름에도 불구하고 방 안에 있는 지침들에 따라 적절하게 B에게 대답했다면, B는 A가 중국어를 할 줄 안다고 생각하겠죠. 그러나 과연 A는 중국어를 이해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A는 방 안에서 주어지는 규칙에 따라 행동하지만, 그 규칙에 대한 주관적 이해를 결여하고 있습니다. 즉 이것은 “컴퓨터의 통사적-기능적 ‘이해’ 만으로는 이해의 능력/자격에 미치지 못한다.”는 반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7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능주의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주관적 이해의 영역도 기능으로 구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견해를 두 종류로 나누면, 심적 표상이 물리 기호체계를 통해 구현 가능하다는 “계산주의”, 그리고 물리 기호체계만으론 불가능하기에 신경망 모델 같은 병렬적 처리 과정을 통해 계산적 단계와 표상적 단계를 구분함으로써 의식의 구현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연결주의” 같은 견해가 있습니다.8 신경망 모델 같은 경우는 대학생 때 장애인을 보조해주는 인공지능 기구를 프로그래밍할 때 다루어보았었는데, 한 때 주춤했다가 다시금 활발한 연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쪽 전문가가 구글에 채용되었다고도 하네요. 아무튼 계산주의든 연결주의든 견해가 다르더라도 결국 이들의 입장은 자유의지마저도 물리적 실체이며, 하나의 기능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9 그리고 구현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실제로 인공지능 관련 분야는 엄청나게 연구가 되고 있습니다. 중요한 IT기업들이 뛰어들고 있으며, 애플의 시리(siri) 같은 경우도 이미 상당한 정도의 음성 인식을 수행하며 적절한 대답을 구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에 대해 이러한 논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결국 인간의 의식이나 주관-이해가 무엇이냐는 주제가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는데, 그것을 완전히 물리적 실체이자 기능으로 보는 사람들과 의식은 그것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라는 입장이 나뉘어져있는 상황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은 전자에 해당하겠네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리차드 도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10

나는 의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논할 만큼 훌륭한 철학자는 아니지만, 다행히 목적에 따라 동기가 주어지는 것과 같이 행동하는 기계의 일을 말하는 것으로 그에 대한 의미는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도킨스의 입장은 기능주의의 입장과 연결됩니다. 그에게 인간의 의식이란 과학으로 해명될 수 있는 것이지 그리 특별하고 신비한 어떤 것이 아닙니다. 어쨌든, 자연주의 위에 세워진 “과학적 입장”이 참된 과학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의식이란 기능으로 구현될 수 있다는 생각은 당연하며, 지금으로써는 이들의 입장이 우세한 것이 현실입니다.

뇌 과학과 인간의 마음

인공지능과 마찬가지로, 뇌 과학에서도 의식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을 생존기계로 묘사하며 “유전자는 일차적 방침 결정자이고 뇌는 집행자”라고 주장합니다.11 그에게 뇌는 복잡하게 진화된 기계에 불과합니다.

인지 과학자 처칠랜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심리 과정은 뇌과정”이며 “신경계의 구조와 구성에 대해 상세하게 알지 않고서 마음-뇌에 대한 올바른 이론을 고안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뇌 과학이 통속적 인간 심리에 대한 이해를 상당부분 수정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인간 심리에 대한 이해는 마치 천동설을 믿고 있는 것과 같다는 생각입니다.12 그는 신비한 미지의 영역으로 여겼던 인간 심리에 대한 인식이 큰 변혁을 겪을 것이라고 봅니다.

생물학자 윌슨 또한 “뇌와 신경계에 대한 물리화학적 지식들로 마음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으며,더 나아가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생물학화시킴으로써 생물학 아래 모든 학문을 통합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13 그래서 그는 그런 내용을 주장하는 『통섭』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러나 뇌 과학이 발전되고 있지만 뇌의 신경작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하고 그것이 ‘마음’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은 추측을 할 뿐이며, “뇌 회로들이 복잡하게 상호 연관되어 마음의 현상이 일어난다”는 정도로 결론짓고 있습니다.14 아직은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는거죠. 물론 그 틈을 과학이 메울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그런 한계 속에서 “관계성 복잡계”라는 고차원적인 복잡성의 개념을 들고 나오면서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견해가 있으며,15 그 외에도 뇌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몸과 주변 환경과의 총체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 마음이라고 보는 “체화된 인지”를 주장하는 견해도 있습니다.16 이 부분은 해석학에서 ‘의미’에 대한 논쟁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입장들은 다 자연주의적 세계관 속에서 인간 의식이 물질로 환원이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뇌과학의 연구와 인간의 행동에 대한 연구 결과들이 많이 나오고는 있지만, 사실 그 연구 결과들이 이런 유물론적인 환원에 대한 가설을 지지하고 입증해준다기보단, 그들이 가진 전제가 그 결과들을 환원주의적인 생각으로 이끌도록 돕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허무 속에서 의미 찾기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학자들은 이것이 진정한 인간성을 발견하는 길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입장은 인간 가치를 붕괴시키는 길이 될 수 있음을 그들도 알기 때문에, 정신 영역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며 이것이 진화로 인한 놀라운 도약의 결과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인간성의 물질적 환원은 인간 행동이 물리화학 법칙에 귀속된다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결정론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인식한 학자들은, 자연주의 세계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자유의지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17 이런 모습들은 인간을 기계로 환원시키지만 그것이 주는 인간관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도약을 시도해서 가치를 부여하려는 움직임입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이 무엇이든, 과학을 도구삼아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자연주의 세계관은 도덕과 가치와 인간관을 필연적으로 왜곡하고 파괴시킵니다. 모든 것은 자연적인 법칙으로 설명이 가능하며, 인간과 인간의 마음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어도 그것을 주장할 힘이 미약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관의 근간이 환원될 위협을 받고 있음에도 그에 대한 반박을 하기 어려운 이유는 과학 기술이 계속 발전해나가고 있기 때문이겠죠. 많은 이들이 과학으로 정신의 영역이 언젠가는 낱낱히 밝혀질 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성경적인 시각으로 이런 것들을 어떻게 바라봐야할까요? 다음 포스팅에서 계속하겠습니다.

각주

1: J. P. Moreland & M. L. Craig, Philosophical Foundations for a Christain Worldview, (IVP, 2003); 김명석 역, 『과학철학』,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21–122.

2: Nancy R. Pearcey, Total Truth, (Crossway, 2005); 홍병룡 역, 『완전한 진리』, (복 있는 사람, 2006), 389.

3: Nancy R. Pearcey, 『완전한 진리』, 397.

4: 이초식, 『인공지능의 철학』,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3), 9–10.

5: 김선희, “인공지능과 이해의 개념”, 「인지과학」 제8권 1호, (한국인지과학회, 1997.4), 3.

6: 김선희, “인공지능의 이해와 개념”, 4.

7: 김선희, “인공지능의 이해와 개념”, 8–9.

8: 손병홍, 송하석, 심철호, “인공지능과 의식”, 「철학적분석」 제5호, (한국분석철학회, 2002.6), 3–6.

9: 모기룡, “결정론의 환상과 기능류어로서의 자유의지”, 「인지과학」 제24권 3호, (한국인지과학회, 2013.9), 240–243.

10: Richard Dawkins, The Selfish Gene, (Oxford, 1976); 홍영남 역,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 1993), 93.

11: Rchard Dawkins, 『이기적 유전자』, 107.

12: Patricia S. Churchland, Neurophilosophy: Toward a Unified Science of the Mind-Brain, ( A Bradford Book, 1989), 박제윤 역, 『뇌과학과 철학: 마음-뇌 통합 과학을 향하여』, (철학과 현실사, 2006), 700.

13: 오용득, “자유의지의 생물학적 해명은 가능한가? : 윌슨의 ‘통섭’ 프로그램에 대한 반성을 위하여”, 「철학논총」 56호, (새한철학회, 2009.4), 88–90.

14: 오용득, “자유의지의 생물학적 해명은 가능한가?”, 91.

15: 박만준∙안호영, “복잡계로서의 물질과 마음”, 「철학논총」 59호, (새한철학회, 2010.1), 133.

16: 신경인문학 연구회, 홍성욱, 장대익, 『뇌과학 경계를 넘다: 신경윤리와 신경인문학의 새 지평』, (바다출판사, 2012), 274–290.

17: 이런 입장에서 쓴 논문의 예로는 모기룡, “결정론의 환상과 기능류어로서의 자유의지”, 241–242를 참고.

Over de auteur

재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 17세기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의 교회론을 연구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의들, 특히 교회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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