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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학과 연합을 고민하는 유니우스의 39가지 논제

프란키스쿠스 유니우스(1545–1602)는 16세기 후반에 신앙고백서들이 작성되는 가운데 일어나는 신학적 논쟁들 속에서 교회의 연합과 평화를 추구한 개혁파 신학자입니다.[1] 그는 칼빈이 있던 제네바에서 신학을 공부했었고, 노이슈타트에서 교수로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저자인 자키리아스 우르시누스와 함께 가르치기도 했습니다.[2] 유니우스의 저서 중 하나인 『참된 신학에 관한 논문(A Treatise on True Theology』은 당시 서로 다른 신앙고백을 하는 이들 간의 갈등을 바라보며 이를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는 가운데 저술된 책입니다.[3] 참된 신학과 거짓 신학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이 땅에서 우리가 탐구해나가는 신학의 한계가 어떤 것인지 등을 다루면서 우리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니우스가 말하는 참된 신학과, 신학을 하는 우리들의 한계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이 책은 39가지의 논제를 제시하고 그것을 해설합니다. 이 논제들이 어떤 것들인지 간략하게 소개해보겠습니다.

논제 1–4: 신학과 신학의 두 가지 종류

논제 1에서부터 4까지는 신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의를 내리며, 신학의 존재 유무와 큰 범주에서의 신학의 종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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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유니우스는 신학이란 “하나님에 대한 담론” 또는 “하나님에 관한 일들에 대한 담론”이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에 관련된 모든 일들에 대한 담론이 신학이라면, 사실 모든 주제가 신학의 범주에 포함될 것입니다. 하지만 논제를 계속 따라가다보면 이 범주가 좀 더 좁아지게 됩니다. 논제 2에서는 신학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신앙 이전에 이미 그리스 문화권에서 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며 그분이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는 점, 모든 사람들은 본성의 빛으로 말미암아 신학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점이 신학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증거라고 유니우스는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신학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유니우스는 이야기합니다(물론 이후에 점점 더 많은 종류로 나눠갑니다). “참된 신학”과 “거짓되고 주관적인 신학”이 바로 그것이죠. 참된 신학이 있다면, 그 반대는 거짓 신학일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 신학에는 또 다시 두 가지 종류가 있는대요. 그것은 “통상적인 신학”과 “철학적인 신학”으로 나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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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적인 신학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신에 대해 갖는 어떤 관념이나 생각들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본성이 가진 불완전함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관념과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죠. 반면 철학적인 신학은 이러한 통상적인 신학에 인간의 이성과 추론이 개입되는 것인데, 오류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기에 결국 잘못된 결론에 다다르게 되는 신학입니다. 유니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을(신국론, 6.5.1) 따와서 이런 철학적인 신학이 바로 신화 신학, 자연 신학, 민간 신학이라고 말합니다.[4]

논제 5–10: 참된 신학, 원형 신학과 모형 신학

이제 논제 5에서부터 10까지는 참된 신학에 대해 설명하고 그것을 분류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원형 신학과 모형 신학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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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신학이 나왔으니 참된 신학도 나와야겠죠? 유니우스는 참된 신학은 “하나님의 일들에 관한 지혜”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또 다시 두 종류로 나뉩니다. 바로 “원형 신학”과 “모형 신학”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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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 신학은 하나님 자신에 대해 가지시는 하나님의 지혜 또는 지식으로, 그것이 어떤 형태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지식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유니우스는 “우리는 경외할 뿐 이를 추구하려고 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5] 이와는 반대로 모형 신학은 “원형 신학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빚어진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원형 신학과는 달리 모형 신학은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지식, 우리에게 하나님이 전달하시는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 모형 신학도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모형 신학”과 “상대적인 모형 신학”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의 모형 신학은 피조물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빚어진 것이긴 하지만, 하나님 자신이 가지신 모형 신학으로서 완전한 지혜입니다. 반면 상대적인 모형 신학은 이 하나님의 모형 신학이 전달되어 피조물들이 갖게 되는 모형 신학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전달을 위해 빚으신 모형 신학에 비해 상대적이며, 피조물들의 역량에 따라서 그 상대적인 정도가 나뉘게 됩니다. 즉, 모형 신학을 전달받는 이들이 누군지에 따라서 “연합의 신학”, “바라봄의 신학”, “계시의 신학”으로 나뉘게 됩니다.

논제 11–14: 연합/바라봄/계시의 신학

논제 11에서 14까지는 모형 신학을 전달받는 이들에 따라 나뉘는 세 종류의 신학, 즉 연합의 신학과 바라봄의 신학, 그리고 계시의 신학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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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자신에 관한 지식을 피조물들에게 전달하시기 위해 모형 신학을 빚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형 신학은 전달되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서 상대적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좀 더 분명하고 완전하며, 그리고 어떤 이에게는 흐리고 부분적입니다. 이 중 첫 번째는 “연합의 신학”으로, 쉽게 표현하자면 신성과 인성이 연합된 예수 그리스도께 전달되는 신학입니다. 즉 이 신학을 소유하고 아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육신이 되신 말씀이신 그분의 인성에 주어지는 모형 신학, 즉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서 가지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스스로에 대해 가지시는 원형 신학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다른 두 종류의 상대적인 모형 신학과 비교했을 때 가장 뛰어나고 온전한 지식입니다. 두 번째는 “바라봄의 신학”으로 하늘에 있는 지복자들의 신학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천사들과, 하늘에 있는 거룩해지고 완전해진 성도들의 영들에게 전달되는 모형 신학입니다. 천국에서 하나님을 아는 방식은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식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 모형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지식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 땅 위에서 살아가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자들의 지식이 비해서는 훨씬 뛰어납니다. 마지막으로 “계시의 신학”은 이 땅에서 인류에게 전달되는 신학, 또는 순례자의 신학이라고도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야 비로소 유니우스는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종류의 참된 신학을 소개합니다. 그것이 바로 계시의 신학, 순례자의 신학이죠. 우리들이 알 수 있는 종류의 신학은 하나님의 신학인 원형 신학과 질적으로 다르며, 예수님이 가지신 연합의 신학과도 비교할 수 없으며, 하늘에 있는 천사와 성도들이 가진 바라봄의 신학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굉장히 제한적이죠.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라는 수단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종류의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 신학은 전달 방식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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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본성이며, 또 하나는 은혜입니다. 전자에서 나오는 것을 자연 신학이라고 부르며, 후자에서 나오는 것을 초자연 신학이라고 부릅니다.

논제 15–22: 자연 신학과 초자연 신학

논제 15에서 22까지 유니우스는 자연 신학과 초자연 신학에 대해 상세히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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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에 따라 신학에 대해 많은 분류를 하기는 했지만, 유니우스는 계시의 신학을 분류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전에 나온 것들과는 달리 계시의 신학은 이 땅에서 우리가 접근 가능한 신학이기 때문입니다. 계시의 신학, 즉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이루어지는 신학 중에서 자연 신학은 본성과 관련해서 알려지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들을 자연적인 본성의 빛을 통해서 알아가는 것입니다. 유니우스는 자연 신학이 일반적인 것들을 다루는 신학이며, 본질상 감추어지고 불완전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초자연 신학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죠. 그렇기에 타락하기 전 아담이 가진 자연 신학은 우리가 자연 계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보다 더 분명하고 온전했지만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니우스는 타락하기 전에 아담이 가진 자연 신학이라고 할지라도 양육되어야 하고, 추론에 의해 자라가야 하는 것이며, 은혜를 통해서 완전해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합니다. 더욱이 타락으로 인해서 자연 신학은 좀 더 불완전한 것이 되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본성을 통해 알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원리들이 사람들에게 남아있고,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알려주기는 하지만, 더욱 감추어지고 불완전한 것이 되었습니다. 원리들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는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니우스는 논제 19에서 자연 신학의 한계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 신학 자체로는, 그 신학 안에서는, 은혜로 인해 더해지는 완전함을 소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이야기합니다.[6] 그래서 유니우스는 영감된 신학, 초자연 신학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연 신학을 가능하게 하는 효과인이 인간의 본성과 본성의 빛이라면, 초자연 신학의 효과인은 “초월적인 지식의 빛을 주입하시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여기까지 유니우스의 설명을 따라오다보면, 우리가 참된 신학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본성의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초자연 신학을 주시고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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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유니우스는 이런 초자연 신학도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신학을 전달하시는 하나님의 전달 방식을 따라서는 절대적이고, 전달을 받는 사람들의 연약한 분량에 따라서는 상대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논제 23–33: 절대적으로 언명된 우리의 신학과 그 원인들

하나님이 전달하신다는 측면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초자연 신학은 “절대적으로 언명된 것”입니다. 논제 23-33까지는 이것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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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자연 신학을 전달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계시하시고 전달하신다는 측면에서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유니우스는 “하나님의 일들에 관한 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선포된 말씀들을 통해 하나님의 종들에게 위탁되었는데, 선지자와 사도와 복음 전도자들을 통해 신약과 구약에 확정되었다.”라고 이야기합니다.[7] 이제 우리는 유니우스가 드디어 성경에 관해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야기하면서 유니우스는 논제 24부터 31까지 하나님이 전달하시는 절대적인 측면에서의 이 신학을 자세히 살펴보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을 사용해서 질료인, 형상인, 효과인, 목적인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스콜라적인 방식의 특징이죠. 하지만 사변에 치우친다기 보다는, 이것을 통해 유니우스는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언명해서 주시는 초자연 신학의 다양한 측면들을 살펴보게 합니다. 유니우스는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언명하신 이 초자연 신학의 질료인은 “하나님에 관한 일들”로 하나님께서 교훈하기에 적절하게 배열하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형상인은 “하나님의 진리”인데, 하나님의 진리는 거룩하고 의롭고 완전하기 때문에 불경건하거나 불의하거나 불완전한 것을 가르치지 않으며, 거룩하고 의롭고 완전한 것을 가르치는 것에 실패하지 않으며, 우리를 거룩하게하고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공의롭게 하고 모든 것 안에서 완전해지도록 인도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어서 논제 27에서는 이러한 형상인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전달하시는 이러한 언명된 신학은 유일하고, 영원하고, 불변한다고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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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학을 가능하게 하는 효과인에 대해서 유니우스는 2가지 효과인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는 제일 효과인이자 절대적인 원인이며, 또 하나는 2차적인 효과인이자 도구인입니다. 전자는 “신학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시며, 후자는 영적으로 또는 육체적으로 진술되는 “하나님의 언명된 담화”라고 설명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서 언명하신 성경 말씀을 통해서 신학을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제일 효과인이신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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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목적인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제일되고 최고인 목적이며, 또 하나는 이차적이고 종속적인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우리의 신학의 최고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고, 이차적이고 종속적인 목적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현재와 미래의 선, 즉 그들의 행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학을 하게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며, 또한 인간의 참된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논제 34–39: 신학하는 주체 안에서의 상대적인 신학, 결론

전달하시는 하나님의 측면에서는 “절대적으로 언명된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전달을 받는 자들의 입장에서 신학은 상대적이고 다양해지게 됩니다. 논제 34에서 39까지는 이것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신학을 해야할지 결론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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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전달하시는 계시라는 측면과는 달리, 그 계시를 전달받는 이들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러한 초자연 신학은 상대적인 것이 됩니다. 즉 신학을 탐구하는 인간 주체 안에서의 신학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유니우스는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유니우스는 인간 주체가 신학을 행하는 방식은 제한될 수 없이 다양하다고 설명하면서,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학을 행하는 이중의 원리인 본성과 은혜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가려면 인간 안에서 본성의 원리는 점점 축소되고 은혜의 원리가 증가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신학의 방식을 다양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죠. 이와 연결해서 두 번째 이유가 제시되는데, 그것은 사람들마다 본성이 축소되는 정도와 은혜가 증가되는 정도가 매우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본성과 은혜라는 신학의 이중 원리가 차지하는 정도가 사람들 안에서 다양하기 때문에, 신학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은혜에서 은혜로 자라가면서 하나님을 더 깊고 풍성하게 알아가지만, 다른 사람은 그보다는 덜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땅 위에서는 그 누구도 신학의 형상 전체를 모든 측면에서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고 유니우스는 설명합니다. 심지어 계시를 전달받은 위탁자인 선지자와 사도들도 다 이해한 것은 아니라고 유니우스는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유니우스는 신학은 유일하지만, 우리들 안에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다양한 모습을 띄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믿음과 지식이 일치를 얻을 때까지, 우리가 다 함께 온전히 자라고 그리스도의 충만함인 교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는 이렇게 남아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8]

결론

이렇게 유니우스가 참된 신학에 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봤습니다. 사실 무엇보다도 유니우스의 설명을 듣다보면 우리가 추구하는 신학의 한계가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식인 원형 신학이 무엇인지 영원토록 모를 것이며, 그분이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모형 신학조차도 이 땅에서는 매우 제한적으로 알 수밖에 없습니다. 본성 자체의 한계와 그 타락으로 인해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초자연 신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그조차도 우리가 가진 한계로 인해서 다양한 모습을 띄게 됩니다.

이런 한계를 지적하면서 유니우스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신학을 하는 우리들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겸손한 자세로 성도들의 연합을 이루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일 것입니다. “이 생에서 우리 앞에 놓여진 목표는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지식의 연합이다. 우리는 성도들의 친교 속에서 이 연합으로 모두 함께 나아가야 하며,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해서 이 연합의 열매를 붙잡아야 한다.”라고 그는 이야기합니다.[9] 물론 이것은 참된 신학을 추구하는 것 안에서의 연합이며, 그 참된 신학을 추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그가 제시한 39가지의 논제 속에서 충분히 잘 드러난다고 생각됩니다. 수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가 이야기하는 가르침은 상당히 적절해보입니다. 참된 신학을 추구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그 열정에 너무 도취된 나머지 의견이 다른 모든 이들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들의 한계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겸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것이 모두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기기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죠. 그래서 참된 신학과 거짓 신학이 어떻게 구분되는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또한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유니우스의 말은 들을 가치가 충분히 있어보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학을 하게 하시는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참된 선, 행복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그것이 조금이나마 더 이루어져 가기를 소망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요.


  1. Franciscus Junius, A Treatise on True Theology, xx.  ↩

  2. A Treatise on True Theology, xii-xiii.  ↩

  3. A Treatise on True Theology, xxiii.  ↩

  4. *A Treatise on True Theolog*y, 97.  ↩

  5. A Treatise on True Theology, 107.  ↩

  6. A Treatise on True Theology, 157.  ↩

  7. A Treatise on True Theology, 169.  ↩

  8. A Treatise on True Theology, 231.  ↩

  9. A Treatise on True Theology, 232.  ↩

Over de auteur

재국

디자이너를 꿈꾸던 공대생 출신 신학도.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교회사를 공부 중이다.

Comments 1

  1. 한병수옮김, 참된신학이란 무엇인가, 부흥과 개혁사 출간 과 비슷한 듯하네. 참 어렵고도 유익한 내용으로 참된 신학하기로 동기부여받네…수고했어요.

    백금산 목사님과 평공목에서 황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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