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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시대, 들여다보기

종교개혁하면 뭐가 생각나시나요? 아마도 면죄부나 루터가 떠오르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데 500년 전의 시대에 유럽에서 일어났던 이 종교개혁을 우리가 알아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나라, 우리 시대와 상관없어 보이지 않나요?

사실 종교개혁은 단순히 교회 내부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접하는 서양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죠. 그런 것들을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개신교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들에게는 종교개혁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특별히 교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종교개혁에 대해서 아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추구한 이들은 올바른 교회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부분들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에 종교개혁 속에서 싸웠던 문제들은 주로 신앙의 핵심 요소들을 놓고 싸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면죄부 판매나 도덕적 타락 같은 것들도 문제였지만, 보다 핵심에는 신앙에 관련된 중대한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배우면서 우리 신앙에 대해서 돌아볼 수 있겠죠.

이런 내용들에 대해 잘 설명하는 책들이 많이 나왔고 나오고 있습니다. 진짜배기 블로그에서도 기회가 되면 종교개혁가들에 대해 다루면서 이런 것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먼저 이 글에서는 종교개혁 시대와 그 이전 시대에 대해 가볍게 들여다 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를 잘 이해하는 것이 종교개혁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종교개혁 이전의 시대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지, 무슨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것인지, 그리고 종교개혁이 일어나도록 도운 역사적인 배경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를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그들이 살던 세상

중세는 지금과는 너무나도 달랐기에, 우리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 세계는 강력한 하나의 세계관으로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세계관에 의해 모든 면에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질서가 잡혀있는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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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사상과 가톨릭 교회의 통일된 권력 체계가 이런 질서로 짜여진 세계관을 제공했습니다. 중세는 모든 것이 신분 또는 질서(ordo)라는 개념으로 체계적으로 짜여져 있었습니다. 직업도 신분이었고, 하나님이 정해지신 신성한 질서 속에서 자신의 위치에 맞게 살아간다는 확신을 갖고 있던 시대였습니다.[1] 수직적인 신분 계급의 구분이 명확했고, 그 커다란 질서 체계 아래에서 빠져나올 구멍이 없었습니다. 이렇듯 단 하나의 세계관과 실제의 현실이 분리되지 않는 사회는 현 시대에 살아 가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세상일 것입니다. 한 사람이 태어나고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모든 것은 그 체계 안에 정해진 위치가 있었습니다. 우리처럼 진로에 대한 고민을 ‘크게’ 할 필요는 없는 세상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당시는 아직 개인을 중요시 여기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더 큰 것의 일부로서, 사람들은 그 질서에 순응해야 했습니다. 마이클 리브스는 “우리 삶의 중심은 자아를 살찌우고, 풍성히 만들고, 떠받드는 것이지만, 중세 사람들은 모든 경우에 자아를 죽이고 낮추려 했다”라고 묘사합니다.[2]

당연히 신분에 따라서 하는 일이나 입는 의복이 달랐습니다. 심지어 먹는 음식들도 신분 별로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신분에 걸맞는 음식이 있다고 여겼고, 그들에게 맞지 않는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난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3] 사람들 뿐아니라 음식 자체에도 위계 질서가 있었습니다. 귀족들에게 있어서 최고급 고기는 날짐승류로, 꿩이나 자고새 요리 같은 것이었고, 이것을 지적인 사람들이 먹는 요리로 간주했습니다. 새들은 하늘에 속한 동물들이고, 그렇기에 동물들의 세계에서 가장 위쪽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죠.[4] 그리고 돼지보다는 소가 우선시되었으며, 가난한 이들은 돼지보다는 양이나 염소를 더 고급스럽게 여기고 선호했습니다. 이러한 질서는 채소류에도 적용되었죠. 그래서 뿌리채소보다 높게 달린 열매를 상위의 것으로 여겼고, 소화도 더 잘된다고 생각했습니다.[5] 고기의 부위에도 위계가 있었습니다. 내장이나 찌꺼기는 질이 낮은 부위로 취급되고, 이런 것을 이용한 음식은 쓰레기 재활용 요리였던 셈이죠.[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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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계급차이를 음식으로 강조했습니다. 계급의 질서를 먹는 것에 적용시켜서 농민들이 먹는 음식과 귀족들의 음식을 엄격히 구분했습니다.[7] 과거에는 많이 먹는 능력을 갖는 것이 귀족의 힘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음식을 화려하게 만들고 그것을 부러워하게 해서 신분의 차이를 인식시켰죠. 예를 들어, 1487년 볼로냐에서 벤티볼리오 조반니 2세는 자기 아들의 결혼식을 위해 베푼 연회 때는 음식을 미리 사람들 앞에, 성 앞 광장에서 음식을!!! 행진시켜서 그것에 감탄하게 만들었습니다.[8] 그러나 주민들은 그 음식을 못 먹었죠. 심지어 귀족들 안에서도 함께 식사를 할 때 신분의 고하에 따른 차별이 있었습니다. 물론 귀족들이 먹던 음식이라고 해서 지금 생각하는 맛있는 음식을 떠올려서는 안 됩니다. 향신료는 귀족의 것이었죠. 귀족들은 재료의 맛을 살리기 보다는 그 맛을 없앴습니다. 그래서 향신료를 많이 넣고, “모든 요리가 달콤하고 시고, 짜고 양념이 강하며, 매우 강한 후추 맛이 나고, 노란 색의 샤프란 맛이 나는 비슷한 맛이었”으며, “고기도 끓이고 굽고 썰고 찧고 갈아서 퓌레로 만들고 거기에 여러 첨가물을 넣어서 완자모양으로 만들거나 파이에 넣어서 먹었다”고 합니다.[9] 당시에는 포크가 없던 시대라서 음식을 손으로 집어먹어야 했거든요.[10] 포크는 11세기에 베네치아에 들어왔지만, 프랑스로 들어온 것도1533년이 되어서였고, 독일에는 17세기에 들어왔다고 합니다.[11]

아무튼 질서가 이렇게 사방에서 강조되었지만, 이 세계관은 결코 완벽한 것이 아니었고, 그렇기 때문에 많은 폐해와 억압과 고통이 수반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도 이 질서가 완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라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최소한 몸은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먹는 음식의 종류에 대한 불평이 있었고, 어떤 중세의 이야기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가 먹어야 하는 음식에 대해서 다투는 일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죽과 귀리를 먹는 것이 자신들의 신분에 맞다고 이야기하고, 아들은 자기는 고기와 빵을 먹겠다고 화를 냅니다.[12] 하지만, 사람들에게 있어서 제도 자체는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 모든 제도는 신에 의해 세워졌으므로 선했다. 다만 인간들의 죄가 세계를 비참함에 빠뜨린 것이다. 그러니 정치적‧사회적 제도를 개선하고 개혁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의 개념이 존재할 수가 없었다.”[13]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 그 질서와 제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체제 개혁은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죄’ 때문이므로 체제의 개혁이 아니라 스스로들이 감내해야할 대상으로 인식한 것이죠.

중세에는 이러한 질서의 문제로 인해서 현실로부터 무의식적인 탈출하려는 몸부림으로서 여러가지 일탈의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비참한 현실에서 환상으로 도피하려는 것이었죠.[14] 호이징가의 말에 따르면, 이상한 스타일의 옷, 헤어 스타일들을 통해서 그들은 그것에 상징을 부여하고 멋있다고 여겼고, 당시 유행한 기사도와 같은 것들도 그런 환상으로의 도피의 일부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어떤 기사단은 일정 거리 이상 뒤로 물러서면 안된다는 기사도의 규칙 때문에 전쟁에서 패하고 죽기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무엇이 문제였는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질서가 있다는 생각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여한 질서에는 어찌보면 성경은 큰 관련이 없었고, 시대적 관습과 관념, 그리고 욕망이 더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질서들은 굉장히 체계적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만들어 냈을 그들의 질서와 전통과 관습은 사람들의 신앙에 걸림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요?

첫째로,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길을 막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교황을 머리로 하는 사제들을 통해서 그들은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가르쳤다. 말 그대로 교황은 은혜의 통로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인이었고, 성직자들은 사람들에게 은혜의 통로를 열어주는 권위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15]

게다가 일반인들은 성경에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수도사들이라고 해서 성경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던 것도 아니었죠. 게다가 라틴어를 모르는 사제들도 많았습니다. 성경도 라틴어였고, 미사도 라틴어로 드렸는데 말이죠! 그들은 예전 의식들의 말들을 그냥 외웠습니다.[16] 의미는 어짜피 서로 모르니까 틀리게 외워도 알 수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사실 성경을 가르치는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라틴어를 알아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주로 그림이나 형상들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신앙을 가르쳤습니다.[17] 그렇기 때문에 신앙을 가르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아는 길을 막으면, 당연히 하나님을 잘못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그랬습니다.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를 베푸시는 자비로운 분이 아니라, 심판하시는 무서운 분이 되었습니다.[18] 그래서 그 무서운 예수님과 사람들의 사이에서 중보할 수 있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숭배하게 되는데, 그러다가 마리아마저도 점차 사람들 인식에서 두려운 존재로 변하게 되었으며, 그 마리아에게 중보할 수 있는 안나에게 중보를 호소하게 되었고, 점점 더 많은 성인들을 숭배하게 되었습니다.[19] 성인들은 많은 공덕을 쌓았다고 여겨졌고 그들의 유물ㅠ 묘지를 찾아가는 순례자들이 많았습니다.[20] 그래서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도 했죠.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구원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은혜를 강조하긴 했지만, 동시에 구원을 위한 인간의 공로를 요구했습니다. 리브스는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길 마다하시지 않는다는 말은 중세 신학자들이 유쾌하게 외치던 구호였다.”라고 이야기하며, 그 최선의 방편 중 하나가 꾸준한 고해성사였다고 말합니다.[21] 그들의 구원에 대한 이해는 그들이 드리는 예배, 미사에서 잘 드러납니다. 미사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몸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22] 게다가 이 미사는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은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죽고 나서 천국으로 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연옥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 연옥에서 죄를 씻을 기회가 있었으며(물론 지옥으로 직행하는 죄인들도 있었습니다), 현실에서 미사를 드리는 것을 통해서 연옥의 시간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23] 사람들은 미사를 통해 연옥에 있는 죽은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믿었기에 많은 제단이 필요했고, 그래서 9세기 무렵에는 이미 서방의 교회들 안에는 하나가 아닌 많은 제단들이 있었습니다.[24] 게다가 부자들은 소예배당을 세워 사제들로 하여금 미사를 올리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게 했고, 부자가 아닌 이들도 조합을 만들어서 이런 것들을 행했습니다.[25]

게다가 성찬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찬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성찬을 바라보기만 했고, 성찬에 참여할 때도 포도주는 사제들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26]

그리고 구원에 있어서, 교황의 권위는 막강했습니다. 교황에게는 공덕을 나눠줄 열쇠가 있었고, 그는 면죄부를 통해서 그것을 나누어 줬습니다.[27] 면죄부는 종교개혁 직전에 시작된 것은 아니었고, 그전에도 이미 논란이 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돈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요.

물론 이러한 신앙과 교리적인 문제들 뿐만 아니라, 외면적인 부패 또한 있었습니다. 교황은 권력을 추구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고, 성직을 매매했으며, 성적으로도 타락하여 사생아들도 많았다고 합니다.[28] 교황 레오 10세가 쓴 돈은 정말 어마어마하다고 합니다. 교황의 관심은 자신들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에 있었습니다.[29] 개혁을 위한 움직임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공의회도 힘을 상실했고, 지방 성직자들의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30]

하나님의 거시적인 섭리: 역사적인 배경

그리고 이것들에 대한 총제적인 개혁의 노력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 이전에 개혁을 추구했던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이 그들보다 더 철저하게 계획해서 종교개혁을 이루어낸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배경들을 살펴보면 다양한 요소들이 종교개혁에 기여했습니다.

먼저 지리적인 요소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당연히 지금과는 나라의 분포도가 달랐는데, 영국, 프랑스는 대략 비슷하게 있었다고 본다면, 스페인,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의 일부 지역과 오스트리아 지역은 신성로마제국으로 묶여있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당시 카를 5세이자 스페인의 왕)는 거대한 땅을 소유하기는 했지만, 또한 많은 지역은 제후들의 몫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종교개혁이 제대로 일어난 곳은, 교황과 황제로부터 세력이 먼 곳이었습니다. 맥클로흐는 “연옥 사업에 큰 관심이 없던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는 이런 메시지가 크게 관심을 끌지도, 연관성을 갖지도 못했다.”고 말합니다.[31]

교황권이 약화된 것도 종교개혁에 기여했습니다. 아비뇽 유수 이후 교황이 둘이 되고, 셋이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서로 다투는 일들이 생기면서 교황의 세력도 많이 약해졌습니다.[32] 게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날 무렵, 교황은 그 문제에만 신경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과의 권력 다툼 속에서 전쟁을 수행해야 하기도 했고, 황제를 세우는 문제 때문에 루터에 대한 문제를 미뤄두기도 했었습니다.

국제 정세의 역할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카를 5세(카를로스 1세이자, 샤를 5세라고도 불리는)는 이슬람 세력, 즉 오스만 투르크의 위협에 신경을 써야했었고, 프랑스와도 전쟁을 해야하는 복잡한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종교개혁 자체에만 신경을 쓸 수가 없었죠.

게다가 당시에 고전 문헌에 대한 관심이 살아나서, 기독교의 원전인 성경을 봐야 한다는 움직임으로 이어지게 되고 성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됩니다. 거기에 사본학을 통해서 교황의 권위를 보증하던 문서였던 “콘스탄티누스의 기진”이 로렌조 발라에 의해 위조였다는 것을 밝혀내게 되고, 이는 다른 문서들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지게 됩니다.[33] 이와 함께 에라스무스가 헬라어 성경을 편찬하게 되면서 라틴어 성경의 문제점도 대두되게 되죠.

인쇄업의 발달도 종교개혁에 크게 기여했는데, 1450년에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만들어냈고, 책들과 문서들이 퍼지는 것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입니다.[34] 예를 들어 루터의 책 중에 면죄부에 대한 책자는 루터가 요구하지 않아 저작권이 없었기에, 출판업자들이 여기저기서 열심히 책을 찍어내서 2년 만에 22쇄를 찍어냈다고 합니다.[35]

그 외에도 많은 요소들이 있었고, 이런 요소들이 다 종교개혁에 나름의 기여를 했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이 단순히 능력있는 몇몇 사람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고 볼 수 있겠죠.

나가면서

이렇게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의 시대는 어떠했는지와,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어떤 역사적 배경들이 종교개혁에 기여했는지를 살펴봤습니다. 관련된 자료를 읽을수록 단편적으로 종교개혁을 이해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들을 살펴보는 것을 통해 종교개혁을 풍성하게 알아가는 것이 우리 시대에 필요한 적용을 하는 것에 도움이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는 간단하게 정리했지만, 이러한 시대적인 이해를 기초로 올해 나올 책들과 이미 출간된 책들을 통해서 종교개혁 이야기를 풍성히 접해보시길 추천합니다.


  1. 요한 호이징가, 『중세의 가을』, 69–70.  ↩

  2. 마이클 리브스, 『꺼지지 않는 불길』, 15.  ↩

  3. 하이드룬 메르클레 , 『식탁 위의 쾌락』, 156–157.  ↩

  4. 하이드룬 메르클레 , 『식탁 위의 쾌락』, 153.  ↩

  5. 하이드룬 메르클레 , 『식탁 위의 쾌락』  ↩

  6. 하이드룬 메르클레 , 『식탁 위의 쾌락』, 154.  ↩

  7. 맛시모 몬타나리, 『유럽의 음식문화』  ↩

  8. 맛시모 몬타나리, 『유럽의 음식문화』, 146–148.  ↩

  9. 하이드룬 메르클레 , 『식탁 위의 쾌락』, 170–173.  ↩

  10. 하이드룬 메르클레 , 『식탁 위의 쾌락』, 170–173.  ↩

  11. 하이드룬 메르클레 , 『식탁 위의 쾌락』, 217–221.  ↩

  12. 하이드룬 메르클레 , 『식탁 위의 쾌락』, 147.  ↩

  13. 요한 호이징가, 『중세의 가을』, 46.  ↩

  14. 요한 호이징가, 『중세의 가을』, 46.  ↩

  15. 마이클 리브스, 『꺼지지 않는 불길』, 16–17.  ↩

  16. 마이클 리브스, 『꺼지지 않는 불길』, 19.  ↩

  17. 마이클 리브스, 『꺼지지 않는 불길』, 27.  ↩

  18. 마이클 리브스, 『꺼지지 않는 불길』, 25.  ↩

  19. 마이클 리브스, 『꺼지지 않는 불길』, 25.  ↩

  20. 마이클 리브스, 『꺼지지 않는 불길』, 24–25.  ↩

  21. 마이클 리브스, 『꺼지지 않는 불길』, 21.  ↩

  22. 마이클 리브스, 『꺼지지 않는 불길』, 18.  ↩

  23. 마이클 리브스, 『꺼지지 않는 불길』, 23.  ↩

  24. 디아베이드 맥클로흐, 『종교개혁의 역사』, 49.  ↩

  25. 마이클 리브스, 『꺼지지 않는 불길』, 23–24.  ↩

  26. 디아베이드 맥클로흐, 『종교개혁의 역사』, 49.  ↩

  27. 마이클 리브스, 『꺼지지 않는 불길』, 39–40.  ↩

  28. 후스토 L. 곤잘레스, 『종교개혁사』, 13.  ↩

  29. 후스토 L. 곤잘레스, 『종교개혁사』, 13.  ↩

  30. 후스토 L. 곤잘레스, 『종교개혁사』, 13–14.  ↩

  31. 디아베이드 맥클로흐, 『종교개혁의 역사』, 54.  ↩

  32. 후스토 L. 곤잘레스, 『종교개혁사』, 13.  ↩

  33. 마이클 리브스, 『꺼지지 않는 불길』, 43–44.  ↩

  34. 마이클 리브스, 『꺼지지 않는 불길』, 48.  ↩

  35. 헤르만 셀더하위스, 『루터를 말하다』, 166.  ↩

Over de auteur

재국

디자이너를 꿈꾸던 공대생 출신 신학도.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교회사를 공부 중이다.

Comments 4

  1. 목사님. 안녕하세요. 시광교회 성도입니다. 강의는 직접 못 들었지만, 이렇게 글로 정리해주셔서 너무 잘 보고 있습니다. 귀한 글 제 네이버 블로그에 복사해가도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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