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근교에 있는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살고 있습니다. 공부를 새로 시작하게 되었거든요. 제 페친이 아니신 분들은 모르실 것 같아 개인 소식으로 뜬금포를 날려봅니다. 여하튼 여긴 참 공기가 깨끗합니다. 공항에서 내리자말자 알 수 있었죠. 그러다보니 하늘이 어쩜 그렇게 깨끗한지 모르겠습니다. 10년 전 처음 미국에 방문했을 때 봤던 로스엔젤레스의 하늘, 지금 아내에게 구애하러 날아갔던 시드니에서 봤던 하늘, 학부 전공 관련해서 언어 조사한다고 꼬박 이틀이나 걸려 도착했던 중국의 알타이 지역의 하늘, 무엇보다 도움 닫기만으로 손을 뻗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구름이 너스레떨며 느릿느릿 지나가던 해발 5–6천미터에서 보았던 중국 ‘야띵’의 하늘… 모든 하늘은 각자의 이야기를 가집니다. 물론 하늘은 항상 거기 있었습니다. 어느 땅에 어느 시간에도 여전했습니다. 땅은 참 울퉁불퉁한데, 변화도 참 많은데, 모든 것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하늘은 여상한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니 제가 기억하는 하늘 이야기는 사실 변화무쌍한 이 땅에서 살아가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때 생긴 이야기인 것 같네요. 땅의 이야기인듯하나 하늘의 이야기이기도 한, 하늘의 이야기인듯하나 땅의 이야기이기도 한… 그게 인간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2천 년 전 여상하던 하늘에 비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생전 본 적이 없는 별이 나타난 것이죠. 모르긴 몰라도 모든 사람의 눈에 보였을 텐데, 아는 사람만 보았던… 보이지만 보이지 않고, 들리지만 들리지 않는 진리의 특성을 닮은 별이 나타났습니다. 이 아는 사람들은 과거부터 이어져 온 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이교 선지자 발람의 이야기를 기억했습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 민 24:17.
그들은 나라들이 왕들이 굴복하게 될, 최고 권위자의 빛을 기억했습니다.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 사60:3
오래 전부터 별은 권위자를 의미해왔습니다. 또는 뛰어난 운동선수나 가수들에게 오늘날 ‘스타’라는 이름을 붙여주듯이 고대 그리스에서도 그런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곤 했습니다.[1] 별은 높았고, 별은 밝았고, 별은 컸고, 별은 어디서나 보였으나, 그대로 있지 않고 이 땅을 비추었습니다. 범상치 않았고, 그 일은 실제 일어났습니다. 한 별이 하늘로부터 이 땅으로 내려와 하늘과 땅을 잇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별은 어느 한 군데 우리를 닮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어느 한 군데 우리를 닮은 곳도 없었습니다. 그 별은 먹고 마시고 잤습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하면서도 당돌하고 담대했으며, 초라해보였으나 왕들의 기도 눌러버릴 카리스마가 있었고,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과 거했으나 그 입에서 뿜어져나오는 말은 세상 누구의 권위와도 비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가난했으나 부유했고, 쇠약했으나 강건했으며, 아무 것도 없었으나 모든 것을 지녔고, 낮았으나 높았습니다. 민수기와 이사야와 다른 모든 구약에 통달한 사람들도 이 별이 자기들이 기대해오던 그 별인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 별이 얼마나 특이한지는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 별과 자기들이 기대하는 별을 연결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마 별이 땅으로 내려오는 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하늘은 언제나 땅과 함께하지만 하늘이 땅으로 내려올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땅이 하늘로 올라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인간은 땅에 살며 하늘과 특별한 관계를 누릴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비유적인 의미일 뿐 실제 하늘로 올라가거나 하늘의 시민이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 계22:16
그러나 다윗의 자손이며 뿌리라는 시간적 모순과 하늘이 땅으로 내려왔다는 공간적 모순이 한 인격 안에서 충돌하지 않고 도리어 조화되었습니다. 약속된 메시아인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조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에게는 모순이나 그분에게는 지혜가 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사명을 완수하시고 부활을 통해 인을 치시며 교회를 위해 당신의 영을 보내려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빛 되신 그리스도는 새벽 별이 되어 오늘도 동일하게 교회와 세상을 비추고 계십니다. 그 때 그 별이 나타났을 때와 또 비슷할 겁니다. 그 별을 안다고 모두가 기대한 것은 아니었고, 그 별을 예측했다고 모두가 소망 했던 것은 아니었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그 별을 참으로 알고 참으로 아름답다 여기는 이들은, 낮이 오기 전 밤이 얼마나 괴로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반드시 올 새벽을 기대할 것입니다. 또한, 하늘과 땅의 모순, 다윗의 자손이며 뿌리라는 모순이 그분의 인격 안에서 조화되었듯이, 우리가 그분과 연합될 때 우리 역시 그 모순을 해결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는 이 땅의 모순이 모순으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내 안의 모순이 모순으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인간’은 결코 같은 의미가 아니게 됩니다. 그러니 ‘인생’도 결코 동일하게 다가올 수 없게 됩니다. 종국에 그리스도만 빛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유지되듯이 우리와 그분은 함께 할 것입니다. 우리의 연합은 결코 우리가 그리스도를 집어삼키거나 그리스도가 우리를 집어삼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늘은 땅이 되지 않고, 땅은 하늘이 되지 않으나, 하늘은 여상하고 땅은 변화무쌍하나, 서로의 이야기는 지속될 것입니다, 영원히-
크리스마스입니다. 그 날 목자와 박사들을 베들레헴 마굿간으로 불러 모았던 하늘의 별은 하늘에 떠있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날만 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지금도 밝히 빛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빛이 있으라 하셨던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 우리 새벽 별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그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소망은 선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소망은 생명의 표현형입니다. 우리 소망은 막연한 기대가 아닌 역사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하지만 뒤돌아보는 회고가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지나간 것 같으나 바라보는 것이기도 한 것이죠. 소망은 우리를 갈급하게 합니다. 이미 얻은 것을 소망한다 말하지 않죠.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난 후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기대하며 의아해합니다. ‘왜 난 여전히 목마를까?’ 사실 우리가 목마르지 않을 것은 우리가 전혀 목마르지 않게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더 이상 목마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갈증을 지속적으로 채우시는 생명샘이 그리스도에게서 영원히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요4:13,14). 그리스도인의 크리스마스는, 그래서 기대하며 소망하고 목마름을 채우시기를 갈구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를 잊어버린 크리스마스가 마음 아픕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기억하지만 역사로만 기억하는 크리스마스 역시 못잖게 마음 아픕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이야기가 땅의 이야기가 되고 땅의 이야기가 하늘의 이야기가 되며, 끝나버려 역사가 된 줄 알았던 이야기가 계속되는 이야기가 되며, 마침표로 끝난 줄 알았던 문단이 사실은 다음 문단을 위한 디딤대에 불과했으며, 우리 생명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히 의존적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크리스마스는 회고가 아니라 소망이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예수님이 나셨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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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isés Silva,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4), 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