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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배경 이야기

에딘버러에 있는 스코틀랜드 내셔널 포트릿 갤러리(National Portrait Gallery)에서 종교개혁과 관련된 전시가 열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언제 한번 가봐야지 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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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개학을 한 주 앞두고 들릴 기회가 생겼습니다. 종교개혁 말고도 다양한 주제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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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가 멋스럽게 장식되어 있네요. 영국이 이런 것들은 참 잘 꾸미는 것 같습니다. 크리스마스 연휴가 끝난지 얼마 안 되어서 아직 트리 장식이 놓여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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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는 이렇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포스팅에서는 그 중 종교개혁에서 혁명까지를 다루는 첫 번째 전시를 소개해보겠습니다. 아쉽게도 종교개혁가들의 초상화가 여기서 등장하진 않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아마 얼굴을 비추겠지만, 당시에는 이렇게 초상화를 그리는 것도 돈이 드는 일이다보니 지금까지 남아서 전시하는 작품들은 왕족들이 중심입니다. 그래도 영국, 특히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과 관련된 재미있는 배경 지식들을 그림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해설을 번역해서 그림 아래에 놓을 거구요. 필요해 보이는 설명을 괄호 안에 조금 넣었습니다. 그림만 전시된 것이 아니라 배경 이야기가 될만한 글귀도 잘 쓰여있어서 그것도 함께 소개합니다. 작품에 대한 정보는 ‘초상화의 주인공, 생몰연도, 작가 이름, 그린 방식, 제작연도’ 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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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1542–1587), 무명작가, 유화, 1610–15년경

프랑스에서 돌아온 뒤 메리는 고작 6년 동안 스코틀랜드를 통치했다. 반란이 일어나고 그녀는 퇴위를 강요받았으며 잉글랜드로 피신하게 된다. 메리는 구류되었고 후에 그녀의 사촌인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살해 모의 혐의로 처형되기 전까지 거의 20년 동안 억류되었다.

메리의 아들인 제임스 6세(킹 제임스 1세 – 역자주)는 자신의 어머니가 사로잡혀있는 동안 그녀를 거의 돕지 못했고 스스로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편에 서있기를 택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왕좌를 1603년 물려받게 되었을 때, 그는 메리의 명성을 되돌려놓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이 그림과 같이 그녀가 죽은지 20년 뒤에 덧칠된 초상화들은 그 노력의 일부로 보인다. 그림에 적힌 비문은 메리의 혈통을 상기시키며, 십자가들은 그녀의 경건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한 십자가는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진 결백한 여인의 이야기인 수산나와 장로들에 대한 성경의 이야기(외경인 다니엘 13장 – 역자주)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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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즈의 메리 (1515–1560), 코르네이유 드 리옹, 유화, 1537

기즈의 메리는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어머니다. 기즈 가문은 프랑스에서 굉장한 권세를 가졌고, 이 그림은 그들의 세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부로 보인다. 이것은 막 과부가 된 기즈의 메리의 유익한 재혼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그려졌다. 그녀는 두 나라 사이의 ’오랜 동맹Auld Alliance’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왕가의 담보물로서 제임스 5세의 두 번째 아내가 되도록 스코틀랜드로 보내진다. 제임스 5세의 죽음 이후, 그녀는 그녀의 딸의 왕권과 스코틀랜드의 가톨릭 교회 및 친 프랑스주의 유지를 위해 싸웠다.

작은 그림이지만 코르네이유 드 리옹의 초상화들은 모델이 된 그녀의 인물됨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기즈의 메리는 재치와 매력으로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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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1542–1587), 프랑수아 클루에의 작품을 본딴 무명작가의 그림, 유화, 19세기로 추정

스코틀랜드의 메리 1세, 여왕 메리는 그녀의 안전을 위해 어릴적 프랑스로 보내진다. 왕궁에서 자란 그녀는 1559년에 프랑수아 2세로 즉위하는 프랑스 왕세자와 결혼하게 된다. 이 초상화는 1560년 그녀의 남편의 죽음 이후 프랑스 왕궁의 흰색 상복을 입은 18세 때의 그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인 피에르 드 롱사르는 “성스러운 모습과 같이… 당신의 길고 고원 상복의 베일의 굴곡은 미풍 위의 돛처럼 겹겹이 접힙니다”라고 옷을 입은 그녀를 묘사했다. 이와 동일하게, 슬퍼하는 여왕에 의해 감화받은 베네치아 대사는 그녀의 “눈물과 애통함은 큰 연민을 자아냈다”고 말했다.

이 초상화의 원본이 그려진 직후, 메리는 새롭게 개신교 국가가 되었으나 왕조는 가톨릭인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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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이야기: 종교개혁

“그리스도 예수와 그분의 영원한 진리를 고백하는 백성들을 다스리도록 왕을 세우는 것은 출생만으로, 또는 혈통의 가까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 존 녹스, 두 번째 나팔, 1558

16세기 중반, 스코틀랜드에는 유럽 대륙 전역으로 뻗어나가는 개혁파 교회의 이상에 대한 공감이 증대되고 있었다.

개신교 설교자인 조지 위샤트는 이단으로 몰려 1546년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화형을 당했는데, 이는 그곳의 주교들의 성이 포위당하고 가톨릭 대주교가 살해당하는 사건을 초래했다. 왕은 이들을 진압하도록 프랑스 군대를 고용했고, 종교개혁가 존 녹스는 이들에게 사로잡혀간 사람들 중 하나였다. 아직 아기인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는 안전을 위해 프랑스로 보내졌는데, 이는 잉글랜드가 자신들의 어린 개신교 왕 에드워드 6세와 메리를 강제로 결혼시키길 원했기 때문이다. 여왕의 부재 속에서 그녀의 어머니이자 프랑스인이며 가톨릭 신자인 기즈의 메리가 스코틀랜드의 섭정이 되었다.

많은 영향력있는 친 잉글랜드파인 개신교 귀족들은 자신들을 회중의 귀족들이라고 칭하면서 군대를 모아 섭정에 맞섰다. 두 파의 싸움은 기즈의 마리가 1560년 죽으면서 개신교도들이 권력을 차지하고 정부를 재편할 수 있게 되기까지 계속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는 1561년 가톨릭 미사가 금지되고 교황의 권위는 폐지된 개신교 국가로 귀국했다. 그녀의 아들 제임스 6세는 개신교도로 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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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6세 (1566–1625), 아놀드 브롱코르스트의 작품으로 여겨짐, 유화, 1574년

제임스 6세는 자신의 어머니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강제 퇴위 이후, 태어난지 13개월 만에 왕이 되었다. 이 그림에서 네덜란드 작가 아놀드 브롱코르스트는 관례대로 제임스 6세를 어른처럼 묘사했다. 제임스 6세는 당시 유행하는 윗옷과 모자를 입고 있으며, 장갑을 낀 왼손은 새매sparrow-hawk를 붙들고 있다.

제임스 6세의 어린시절 스코틀랜드는 4명의 섭정들이 연속해서 다스렸다. 정치적 불명확함으로 가득한 시대였으며, 이런 종류의 초상화의 목적은 어린 왕이 활발하고 건강하다는 것을 당시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서 그들을 안심시키려는 것이었다. 매 사냥은 그의 나이의 고귀한 지위에 걸맞는 실외 오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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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1세(1600–1649) 요크와 알바니의 공작이던 시절, 로버트 피크, 유화, 1610년 경

훗날 찰스 1세가 되는 그는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에는 왕위 계승 서열 2위였다. 피크는 제임스 6세이자 1세의 궁정 화가Sergeant-Painter였으며, 이것은 초상화와 같은 그림을 작업 하는 것을 포함하는 행정직이었다. 그러나 그는 찰스가 따르는 형이자 웨일즈의 군주인 헨리의 궁정에 가장 긴밀하게 일했다.

비록 그림 안에는 그가 왕족이라는 구체적 시각적 단서는 없지만, 찰스는 화려한 배경으로 그려지고 은실로 수놓은 값비싼 옷을 입고 큰 장미 장식이 있는 신발을 신고 있다. 뉴기니에서 가져온 그의 모자 위의 극락조 깃털은 찰스의 지위를 강조하는 이국적인 장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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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이야기: 잉글랜드 공화국

“짐이 확언하건데… 우리 조상중 누구도 짐이 하는 것처럼 의회를 존중하지 않는다… 짐은 의회가 왕국을 구성하는 핵심 부분이고 통치에 필수적임을 믿기에 짐은 그들 없이는 군주나 백성 모두 조금도 행복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 찰스 2세, 1660년 망명 상태에서 돌아오기 전.

삼왕국의 전쟁(청교도 혁명 또는 영국 내전을 가리키는 말 – 역자주)에서 왕당파의 패배 후, 스코틀랜드는 국경 남쪽의 연방 공화주의자들의 지도자인 올리버 크롬웰의 군대에 점령되었다. 비록 1649년 찰스 1세의 처형과 함께 왕정이 잉글랜드에서는 폐지되었지만, 1651년 그의 아들 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에서 즉위했다. 새 왕은 크롬웰에게 패배하자 대륙으로 도망갔다. 크롬웰은 스스로를 호국경으로 칭하고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공화국과 호민정치의 일부가 되었다.

1658년 크롬웰이 죽은 후, 호민정치는 군대의 지지를 잃게 되었고, 1660년 찰스 2세는 망명상태에서 돌아와 왕으로 복귀했다. 찰스 2세는 그가 혈통으로 인해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왕정복고는 의회와 군대가 원했고 그를 맞이했기에 가능했음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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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1세 (1600–1649), 웨일즈 공이던 시절, 크리스페인 데 파세, 시몬 데 파세에 의해 발행, 판화, 1622년

이 판화는 찰스 1세가 왕이 아니라 웨일즈 공이던 20대 초기의 젊을 적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정교하게 수놓은 윗옷과 러프를 입고 그가 가터 가시단의 기사라는 것을 상징하는 레서 조지(말 등에 앉아 용을 죽이는 성 조지가 그려진 뱃지)라 불리는 팬던트를 차고 있다. 1612년 그의 형이자 왕좌의 후계자인 헨리 왕자가 죽었을 때 찰스의 운명은 바뀌었다. 이 판화는 스튜어트 왕가를 이어가고 영국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걸출한 장래의 왕으로 이 왕자를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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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2세 (1630–1685), 웨일즈 공이던 시절 이름모를 시종과 함께 있는 모습, 윌리엄 돕슨, 유화, 1643년 경

찰스 2세는 그가 12세로 웨일즈 공이었던 1642년 에지힐의 전투에서 처음으로 전쟁 경험을 했다. 이 초상화는 아마도 찰스 1세가 영국 내전 시기에 왕당파의 대의를 옹호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주문한 것일 것이다. 이 초상화는 돕슨의 작화실이 있는 옥스포드에서 그려졌을 것이다.

찰스 2세는 자신의 갑옷 중에 흉갑을 입었고 지휘관의 봉을 잡고 있다. 왼쪽 아래 구석에는 다툼의 상징인 뱀으로 된 머릿결을 가진 고르곤 메두사의 머리가 놓여있다. 비록 이 초상화는 소년인 왕자를 군사적 영웅으로 보여주도록 구성되어있지만, 에지힐 전투에 그가 참석한 것은 고무적이지 않았음이 드러났으며, 그는 우발적으로 의회파 기병대로 돌진하다가 구조되었다.


네, 전시는 이 정도까지구요. 사실 그림들이 더 있는데 잘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아서 생략했습니다. 여기 나온 인물들과 관련해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이나 영국 종교개혁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다면 『특강 종교개혁사』(황희상 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김중락 저) 같은 책들을 참고하시면 더 좋을 거 같네요.

Over de auteur

재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 17세기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의 교회론을 연구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의들, 특히 교회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Comments 1

  1. 에딘버러까지 와서 1주일이나 머물고도 이걸 직접 못 보고 가는 것이 한스럽지만, 이 글을 다시 읽고 위로받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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