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카슨 – 나사로 (요11:1~53)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자주 우리를 놀래키신다. 모세는 젊은 날 자신은 혁명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40대에 광야 생활을 시작해 80이 되어서야 사용받았다. 하박국은 하나님이 놀라운 능력을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더 부패하고 폭력적이며 파괴된 나라를 사용하시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바울도 놀랐다. 하나님은 그가 없애주시기를 간구했던 육체의 가시를 해결해주지 않으셨고 대신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족함을 깨달았다. 아브라함도 놀랐다. 이삭이 드디어 약속대로 나타났는데 그를 죽이라고 명령하신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놀라운 복음이 있음을 알게 된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리라고 누가 예상했는가? 거기 찾아간 여인들도 아니었다. 사도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다락방에 숨어 있었다. 복음은 놀라움의 복음이다. 구약에서 메시야를 고대하는 내용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곳을 외에도 수많은 예표들이 있다. 하지만 대체로 이를 보지 못한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째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다.

지연을 통해 보이시는 사랑

예수님은 때로 지연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보이시며 절망적인 간구를 들으신다. 예수님은 4절에서 나사로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셨다. 물론 말씀대로 죽음으로 끝날 것은 물론 아니었으나 통과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그가 이렇게 병이 든 이유였다. 예수님은 그가 병들었다는 사실을 듣고 이틀을 더 유하셨다. 대체 어떻게 이것이 사랑의 표현일 수 있는가?

이 이야기 속에서 타이밍은 계속 어긋난다. 예수님은 이틀이 지난 후 다시 유대로 가자고 하신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그 사이에 죽었다는 사실을 아셨다.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3일 정도 걸렸다.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이미 무덤에 묻힌지 나흘이 지나 있었다. 즉 이틀을 더 유하지 않으셨더라도 나사로는 이미 죽어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대체 왜 굳이 이틀을 기다리셨는가? 그곳은 더운 지방이었기 때문에 시체를 부유한 집안 출신이어서 처리를 바로 하지 않는 한 24시간 안에 부패가 진행되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렇게 냄새가 진동하는 상황까지 기다리셨던 것이다.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전혀 다른 여지를 두지 않고 당신의 능력으로 그가 살아나는 것을 보이고자 하셨다. 어린 아이가 10분도 기다리지 못하고 ‘지금요 지금요’라고 떼쓰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지금 당장 얻기 원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더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을 위해 현재를 미루시고 그 안에 신실함으로 끝까지 견고하기를 원하신다.

절망적 상황에 오셔서 자기 자신을 가리키신다

예수님은 절망적 상실에게 오셔서 자기 자신을 가리키신다. 서구가 아닌 많은 문화에서 사람이 죽으면 곡하고 운다. 심지어 연주자를 불러 슬픈 노래를 연주하게 시키기도 한다. 예수님은 시간을 지연하사 그들이 충분히 상실에 대해 슬퍼할 때까지 기다리셨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부르짖는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하지만 이는 예수님을 원망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본인도 예수님이 들으시기에 그렇게 들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뒤에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나 이제라도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돌을 굴리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오빠가 묻힌 지 너무 오래되었다고 말한다. 정통 유대인이었던 마르다는 부활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 날에 부활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부활하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아날 것이라 말씀하시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 네가 믿느냐”라고 물으신다. “불쌍한 여인이여 안아주마”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기도하고 있다”라고 하지도 않으셨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셔”라고 하지 않으셨다. 이 순간 하신 것은 당신 자신을 보게 하신 것이었다. “내가 부활이다. 이것을 믿느냐?”

요한복음 5:21에서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를 부활이며 생명이라고 하신다. 부활이라고 하신 것은 자신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라는 것이며 생명이라는 것은 지금 믿는 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존재론적으로 루이 14세가 “짐이 곧 국가다”라고 말했지만 루이가 정말 곧 국가였던 것이 아니다. 당시에는 국가가 너무나 왕의 권위에 묶여 있었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도 그런 의미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부활과 생명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그런 나를 믿느냐? 라고 물으시는 것이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그리스도가 스스로를 가리키신 것이 얼마나 우리가 슬픔을 위로하는 방식과 다른가 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자신은 쇠하여야 하며 그리스도가 흥하여야하리라며 그를 가리켰다. 세례 요한은 그와 비교될 수 없으며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설명하실 때는 세례 요한에게 사양하신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이 여인에게서 난 자들 중 가장 큰 자인데 이는 당신이 오는 길을 준비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요한이 말한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은 진리였다. 그가 한 일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것이 가장 큰 것이다.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위로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가장 큰 놀라움 – 스스로 죽으심

가장 큰 놀라움은 스스로 죽으신 것이다. 가야바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한 말은 순수한 정치적 발언이다. 진리에 대한 어떤 고려도 없다. 나사로가 살아났으나 그를 살리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가야바는 한 사람이 온 민족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말한다. 역설적으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말을 한 지 40년 뒤에 실제로 나라가 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한은 더 깊은 것을 보았다. 가야바는 사실상 예언을 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정말로 온 민족을 위해 죽을 것이다. 물론 가야바의 말이 발람의 당나귀가 말한 것과 같은 의미라는 것은 아니다. 당나귀는 하나님이 넣어주신 말을 한 것이지 자신이 생각한 것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가야바는 자신의 의견을 말한 것이었다. 그가 말한 내용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성경에서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 이상의 것을 말하곤 한다. 예수님은 실제 온 민족을 위해 죽으실 것이다. 예수님은 죽으시며 다시 사실 것이다. 그분은 부활이자 생명이시다. 하지만 이 말을 예수님이 하실 때 사도들마저도 정확한 이해를 가지지 못했다. 베드로가 정말 사탄에 먹혔거나 사탄 자체였던 것은 아니다. 가야바처럼 그는 자신의 의견을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어째서 대속죄일의 그 모든 일이 있어야 했는가? 왜 그 피들이 뿌려져야 했으며 왜 그 대속이 있어야 했는가? 대체 그렇게 준수한 것들은 다 어디로 가는가? 선지자들은, 백성들은 알지 못했다. 복음서는 이를 놀라운 복음으로 설명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들었으나 믿지 못한다. 성령이 임하시고 그들은 마침내 보게 된다. 믿게 된다. 놀라움이 걷힌다. 베드로가 구약 선지자들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자 하며 그 글들을 썼다고 말했는지 알 만하다. 우리는 볼 수 있다. 우리가 빈 무덤 건너편에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우리는 볼 수 있다.

Over de auteur

영광

선교사 부모님 덕에 어린 시절 잦은 이사와 해외생활을 하고,귀국하여 겪은 정서적 충격과 신앙적 회의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개혁주의를 만나고 유레카를 외쳤다. 그렇게 코가 끼어 총신대를 졸업하고 현재는 미국 시카고 근교에 위치한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조직신학 석사 과정 재학 중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며 세상 귀여운 딸래미의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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