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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왜 라합은 되고, 난 안돼?

쿠엔틴 타란티노 (Quentin Tarantino) 감독의 영화 <바스터스: 거친 녀석들>의 첫 장면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대인 사냥꾼’으로 불린 한스 란다 대령은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한 농가를 찾습니다. 이미 란다는 여기에 유대인 가족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눈치입니다. 우유 한 잔을 얻어 마신 한스 란다는 파이프에 불을 붙이며, 집 주인 라파디뜨를 협박합니다. 내용은 분명 협박인데, 란다의 어조가 너무 태연해서 더 무섭게 느껴집니다.
“국가의 적을 숨겨 주고 있죠?”
“… 네.”
“이 마룻바닥 밑에 숨겨놓고 있죠?”
“… 네.”
“위치를 손으로 가리켜요.”
위치를 가리키는 라파디뜨의 눈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동요가 없는걸 봐선, 모두 영어를 못하나 보군.”
영어로 대화했던 란다는 천연덕스럽게 다시 불어로 말합니다.
“라파디뜨 씨! 맛있는 우유 잘 마셨소! … 안녕히. ‘아듀!’”
란다의 신호와 함께, 그의 부하들이 마룻바닥을 향해 일시에 총을 갈겼습니다. 너무 몰입했던 저는 한 일가족의 죽음에 마음이 착잡해졌습니다.

정직했으니 잘했다?

“그래도 정직하게 말했으니 잘 했지, 뭐.”
혹시, 제가 당신의 옆에서 이렇게 말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말이야? 방귀야?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당신의 말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누가 이 상황에서 적어도 라파디뜨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칭찬할까요? 일가족이 몰살 당한 상황에서 말입니다.
“없소! 나는 유대인을 숨기지 않았소!”
라파디뜨가 이렇게 말했다고 칩시다. 그 결과, 그가 결국 처형을 당했다고 칩시다. 누가 그의 죽음을 두고 거짓말 때문이라고 비난하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적어도 이 영화의 첫 장면의 주제가 ‘거짓말을 했냐, 안 했냐’는 아닐 겁니다. 아마 이 영화를 본 대부분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거짓말했으니 못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성경도 있습니다. 바로 기생 라합의 이야기입니다. 여리고 왕은 이스라엘 정탐꾼이 왔다는 제보를 받고 라합의 집에 사람을 보냅니다. 아마 ‘유대인 사냥꾼’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정탐하러 왔다는 자들을 끌어 내라!”(수 2:3)
그러나 이미 라합은 두 정탐꾼을 집 옥상 천장으로 만들어 놓은 짚 더미 속에 숨겨 뒀습니다.
“그들이 내 집에 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서 왔는지 몰랐어요!”(수 2:4)
라합은 계속 말했습니다.
“날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나갔는데… 글쎄, 어디로 갔을까요? 하지만 지금이라도 얼른 추격하면 잡을 수 있을 거예요!”(수 2:5)
두 정탐꾼은 라합의 기지 덕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래도 라합은 거짓말을 했잖아! 그건 잘못이야!”
만약 제가 라합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렇게 반응한다면, 아마 당신은 또 이렇게 말할 겁니다.
“말이야? 방귀야?”
왜 그럴까요? 라합 이야기의 주제는 (라파디뜨의 경우처럼) ‘그래서 거짓말을 했냐, 안 했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라합의 행위를 거짓말로 단순화하여, 자신의 거짓말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해선 안 됩니다.

행위보다 의도

우리는 항상 모든 행위 속에 어떤 의도가 들어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의도를 걷어내고 행위 자체만 놓고 본다면, 죄를 죄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아담의 경우를 예를 들어 볼까요. 행위만 놓고 보면 아담이 한 일이라고는 고작 나무 열매 하나를 따 먹은 게 다입니다. 그게 그렇게 큰 잘못입니까? 그러나 아담이 나무 열매를 따 먹은 그 행위에 담긴 의도는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내가 신(神)이 되어, 선과 악을 내가 스스로 판단하겠다!”라는 발칙한 의도가 숨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언제나 행위의 껍데기 속 중심(의도)을 보시지 않습니까(삼상 16:7).
의도에 초점을 맞춰 라합의 이야기를 재조명해 봅시다. 라합 이야기의 주제가 ‘거짓말’이 아니라면, 대체 뭘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인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했던 말은 그녀가 거짓말을 했던 의도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나는 당신들의 하나님이 이 땅을 이미 당신들에게 주신 줄로 압니다.”(수 2:9)
라합은 하나님이 약속의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실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라합에게 이런 믿음이 생겼을까요? 라합은 자신의 믿음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전 당신들이 이집트를 탈출해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당신들 앞에서 홍해 물을 말리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전 당신들이 요단 동쪽에 있는 두 아모리 왕, 시혼과 옥을 어떻게 처지 했는지도 다 들었지요. 그런 말을 듣는 순간 당신들이 무서워서 정신을 잃고 말았답니다.”(수 2:10-11)
그리고 라합은 그들 앞에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믿음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정말 당신들의 하나님 여호와야말로 천하에서 제일가는 신(神)이십니다!”(수 2:11)
라합의 거짓말 속에 들어 있는 진짜 의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그분을 향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신약은 라합의 행위를 어떻게 다룰까?

여기까지만 봐도, 이미 라합의 이야기가 ‘거짓말’이라는 주제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는 것을 눈치채실 겁니다. 그럼 더 가 볼까요? 신약은 과연 라합의 행위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요?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았다) (마 1:5, 현대인)

우리가 신약을 펼쳤을 때, 가장 처음 만나는 라합의 이름은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라합이 여리고 성 전투 이후에 이스라엘로 귀화했고, 이스라엘 사람 살몬과 만나 결혼했으며, 룻의 남편인 보아스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여리고성을 정탐하러 온 이스라엘 사람들을 친절하게 도와 주어
순종치 않던 사람들이 멸망당할 때 구원을 받았습니다.
(히 11:31, 현대인)

히브리서의 기자는 라합의 거짓말을 ‘친절한 도움’이라고 표현하고, 이는 하나님을 향한 라합의 ‘믿음’이라고 평가합니다.
또 다른 라합의 이야기가 바로 야고보서에 등장합니다.

이와 같이 기생 라합도
이스라엘 정찰병을 숨겼다가 안전하게 보낸 그 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약 2:25, 현대인)

야고보는 라합의 거짓말을 ‘이스라엘 정찰병을 숨겼다가 안전하게 보낸 그 일’이라고 표현하고,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라합의 ‘의로운 행위’라고 평가합니다. 즉, 라합의 행위를 놓고,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이 믿음이었다, 야고보는 그것이 의로운 행위였다며, 입체적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점은 라합의 행위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것과 동일 선에서 다뤄지고 동일한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히 11:17; 약 2:21). 그러므로 신약은, 라합의 행위를 믿음과 의로움으로 다루면서, 그녀를 구속의 역사를 드러내는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시킵니다.

거짓말? 왜 라합은 되고, 난 안돼?

거짓말은 무엇일까요? 사탄은 거짓말쟁이, 거짓의 아비입니다(요 8:44). 거짓말하는 사람은 악행으로 진리를 막는 자(롬 1:18, 25), 속이는 혀를 가진 자(롬 3:13), 무법자(살후 2:9-10)입니다. 사실, 죄인들은 거짓말을 좋아합니다(잠 18:8, 26:22). 무엇보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6)는 아홉째 계명은 법정에서 거짓 진술을 통해 타인의 사유 재산을 빼앗는 일종의 절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거짓말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타인을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행위 자체만 놓고 본다면, 라합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의도’를 놓고 본다면, 하나님만을 두려워했던 한 여인의 담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더하여, 신약은 라합의 그 행위를 믿음과 의로운 행동이었다고 평가하며, 예수님의 구속의 역사가 기록된 족보에 그녀를 등장시킵니다.
만약, 지금 당신이 유대인을 집 창고에 숨겨주고 있고, 나치의 ‘유대인 사냥꾼’ 한스 란다가 당신의 집에 들어와 협박을 하는 상황에서, 제게 거짓말을 해도 되느냐고 카톡으로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장할 겁니다.
“최대한 자연스럽고 능청스럽게 연기하세요. ㅠㅠ 지금 기도할게요! 파이팅!”
그러나 만약 당신이 “거짓말? 왜 라합은 되고, 난 안돼?”라는 식으로 자신의 거짓말을 합리화시키려 한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말이야, 방귀야?”
이것이 당신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 타인을 향한 구두 기만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Over de auteur

기수

김기수 목사는 현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석사(MAR) 과정으로 성경 신학을 배우고 있다. 그는 개혁신학에 뿌리를 둔 성경 신학을 공부하고, 후에 기독교 윤리학을 공부할 계획에 있다. 그는 아내 지은과 딸 로윤과 함께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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