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QT를 하는가?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외국에 나갔고, 오랜 시간 후에 돌아올 예정이었습니다. 아이가 말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을만큼 자랐을 무렵, 아이의 아버지는 편지를 써보내기 시작했습니다. 편지 외의 소통 수단은 없었습니다. 아이는 편지를 읽기 위해 글을 배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글 공부를 하는 것을 너무 싫어했고, 그렇게 대충 배운 상태로 편지를 맘대로 해석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편지에서 아버지가 쓰신 내용을 잘못 이해해서 아버지가 가난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라면서 돈을 아껴쓰면서 아버지에게 가끔씩 돈도 부쳤습니다. 마침내, 아버지가 돌아올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초라한 차림의 아버지를 상상했었는데, 억만장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나는 너에게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그리고 너에게 사용하라고 예비한 돈들을 어떻게 쓸 수 있는지를 편지에 써서 보내줬는데, 왜 내 편지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니? 너는 내가 예비한 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없는 돈을 부족함이 없는 나에게 보내기까지 했구나.”

 

I. Q.T ,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글을 시작할까 고민하는데, 이런 이야기가 머릿 속에서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이 어떻게 의도했는지를 파악하지 않고 마음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 이천원을 줄테니 가게에서 계란 좀 사오렴.” 이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셨을 때, 아이가 ‘이천원을 줄테니’라는 것만 생각하고 자기가 돈을 가지고 다른것을 사먹어버린다면, 그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는 심각한 의사소통의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아버지 되시는 성부 하나님, 그리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단절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소통하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들었던 예화처럼, 우리는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에서 심각한 장애를 가진 채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Q.T를 할겁니다. 하루 하루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실천하려는 것은 매우 귀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이런 Q.T를 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바로 ‘자의적 해석’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대로 이해하고 묵상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이해해버리는 것 입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잘못된 인식 중 하나는 ‘성경을 일관성있게 구성된 하나님의 뜻이 담긴 말씀’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담으신 의도가 있으며 그 전체적인 틀 안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묵상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결국 예화로 든 아이처럼 아버지를 잘못 이해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잘못된 인식은 ‘성경을 통해 내 상황에 꼭 맞는 말씀을 주실 것을 지나치게 기대하는 자세’입니다. 그것은 축산업을 할지, 농업을 할지 고민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구하면서 성경을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내 양을 먹이라”라는 말씀을 보고서 ‘이것이 주님의 음성이구나!’하고 축산업을 택하는 행동이라고 비유할 수 있을겁니다. 예수님은 결코 그런 의미로 그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점괘에서 제비 뽑듯이 성경을 대하는 것은 잘못된 자세입니다. 본문의 의미와 상관없이 성경을 문장의 집합으로 여기고 그날 필요한 내용을 뽑아내려는 태도는 성경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자의적 해석은 신앙의 뿌리를 뒤흔들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낳을 수 있고,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모습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고 살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비관계적 묵상’입니다. 종종 우리는 지금 당장 실천해야할 말씀이 무엇이 있는지를 찾습니다. 전도하는 것, 용서하는 것, 구제하는 것, 열심히 일하는 것 등 이런 실천적인 말씀들만 찾아서 적용하기 급급하면서 외적으로 변화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만족하거나 또는 자신의 성경적 지식을 넓히기 위해서 성경의 역사적 내용이나 배경들을 공부만 하는 태도들은 원래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성경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의 편지에서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문장들을 읽고 감동과 기쁨에 젖는 것이 아니라, 그냥 뭐 시킨 것이 있는지만 빨리 찾아서 처리해놓고 거기서 만족을 얻는 것이며, 또한 아버지의 편지 내용을 분석하면서 문학적 비평을 하려는 태도와 같습니다. 그것은 원래 하나님이 성경을 우리와 ‘소통하시기 위해’ 주셨다는 것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관계의 충만에서 나오고, 지식은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쌓는 것입니다.

  Q.T를 할 때 이러한 문제들을 스스로 안고 있지 않는지 돌아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참된 동행을 하는데 있어 큰 장애물을 두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것은 우리를 영적침체로 이어지게 합니다. 핵심은, 우리는 하나님과 소통하기 위해, 인격적 관계를 맺기위해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II. 하나님과의 소통하는 말씀 묵상

  그렇다면, 하나님과 ‘소통, 즉 인격적 관계를 맺는 묵상’이라는 건 대체 뭘까요? 그것은 바로 성경의 진리를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깨닫게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결코 단순한 지식적 앎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주관적인 앎을 말하는 것입니다. 친한 친구들은 서로를 잘 ‘압’니다. 그 ‘앎’은 마음 속에 지식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으나 그 지식은 상대방에 대해 시험공부 하듯이 공부해서 얻은 지식과는 다릅니다. 서로 간의 대화나 행동 등의 의사소통 수단에 의해 경험되어진 주관적인 ‘앎’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성경이라는 의사소통 수단을 통해 주시는 ‘지식’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셔서 마음 속에서 ‘주관적인 앎’이 되게끔 하실 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차적으로 그 ‘주관적인 앎’이 삶에서 다른 형태로 경험되어지면서 더 풍성하게 될 때 더 깊은 하나님과의 동행함이 됩니다.)

  즉 참된 관계 가운데서 말씀을 보고 묵상하는 것에는 두가지 중요한 핵심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1)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2)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 입니다.

 

III.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려고 해야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고 있으며, 하나님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큰 뜻인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전하고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일관성 있고 통일성 있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 그리스도 중심, 십자가 중심, 그리고 종말론적 이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 요 5:39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큰 틀 안에서 구원자로 오시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어느 부분을 보더라도 그리스도와 그 분의 구원의 역사라는 틀 안에서 성경을 보려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려고 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큰 틀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욱 알아갈 때, 성령께서 그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실 때, 우리는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듣게’ 됩니다.

  더욱이 우리는 그 안에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소망하며 성경을 대해야 합니다. 왜냐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묵상한다는 것은 그 분이 필요함을 더욱 깨닫게 하고, 더욱 간절히 사랑하게 하고 그 분이 다시 오시는 것을 바라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종말론적인 성경 이해가 될 것입니다.

2. 구속사역의 틀에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이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그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이루어나가는 것이 삶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왜곡된 이해를 발전시켜나가는 것은 바른 인격적 관계가 아닙니다. [이 것에 대해서는 이태복 교수님의 ‘영성 이렇게 형성하라’ (지평서원)라는 책의 삼위일체에 관한 부분을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묵상할 때 특별히 삼위 하나님이 어떻게 그것을 나타내시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부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하심과 구원의 중심에서 행동하시는 성자 하나님과 그것을 각 사람에게 적용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조화롭게 사역하시는지를 묵상하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

3.  복음 중심적인 이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엡 1:17-19

  특별히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전하시는 큰 뜻인 ‘복음’을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단지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부르심의 엄청난 소망과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의 죄와 타락, 그리고 그 필연적인 심판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구원의 사역을 이루어가시고 완성시키실 하나님의 행하심이 성경 안에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를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사소한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학업, 직장 생활, 마음의 상처, 일상생활에서 치이는 이런저런 문제들을 붙들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생각을 말해달라고 말씀을 보고 기도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쓸데없다는 것이 아니지만, 이런 일상적 문제들에 계속 치여가면서 쳇바퀴 같은 씨름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이유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구원의 기쁜 소식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고 거기에 동참케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간과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 부르심의 소망에 사로잡힐 때, 좀 더 깊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4. 성경을 공부하라

1~3번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주석을 참조하는 것도 필요하고, 바른 성경공부 책자들을 이용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위의 1~3번에 초점을 맞추면서 공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에 시간과 열정을 드리지 않는다면 처음에 다룬 예화에서 글을 대충 배우면서 편지를 읽는 아이처럼 되어버리고, 아무리 마음으로는 바르게 이해하고 싶어하더라도 이해의 한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바른 매일의 묵상을 위해서는 바른 성경공부를 해나가야만 합니다.

 

IV. 깨닫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 시 119:18

  가장 중요한 것은 이렇게 이해를 하려고 성경을 탐구한다고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우리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이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말씀을 대할 때 ‘이 말씀을 대함이 하나님의 나에 대한 인격적인 말씀으로 와닿아 깨닫도록’ 기도해야합니다. 아무리 묵상이 깊더라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소통이 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을까요?

 

V. 그럼 실천은?

  그렇다면, ‘적용’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삶의 실천이 되지 않는 묵상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라는 질문이 생기게 될거 같습니다.

  하나님과의 참된 인격적 관계를 누려나갈 때, 그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과의 소통이 이루어질 때, 그 진리와 섭리 가운데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지도에 따라 우리는 실천을 하게 되고 그것을 소망하면서 기쁨으로 행하게 합니다. 그것을 떠난 실천은 ‘가식적인 것’이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일상의 삶에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너무 추상적인 묵상만 하는 위험이 있지는 않을까?’ 라는 질문이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일상적인 삶에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우리 마음을 움직이시고 함께하십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크고 영광스러운 뜻을 우리가 ‘듣지’ 않으면서,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고만 하는 시도는 과연 바른 것일까요? 오히려 잘못 분별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요?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가운데서 우리 삶을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 삶에서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더욱 깊이 동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Q.T , 합시다!

  이 글은 저의 고민에 대한 내용입니다. 어떻게 QT를 해야하는지, 어떻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지, 그 분과 어떻게 참된 인격적 소통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 가운데 책을 보고 탐구하며 배운 것들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부족한 신자의 부족한 글입니다. 제가 이렇게 되어가기를 소망해가면서 쓴 글입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함께 고민하고 또 하나님 앞에 바르게 나아가 인격적으로 소통해나가길 소망하면서 쓴 글입니다.  

  우리가 그런 참된 인격적 소통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은 경험되어지고, 그 영광에 대한 찬양이 우리 삶에 가득할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 엡 1:3-6

말씀에 충만해진 가운데 이런 찬양이 가득한 매일매일의 삶을 소망하게 됩니다.

 

* 본 글은 ‘영성 이렇게 형성하라’ (이태복, 지평서원)라는 책과 ‘개혁교의학’ (유해무)이라는 책을 읽으며 묵상한 것들을 적은 것입니다.

Over de auteur

재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 17세기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의 교회론을 연구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의들, 특히 교회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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