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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에 관하여

 

*이 글은 코넬리스 프롱크의 저서 『No Other Foundation than Jesus Christ』의 일부에 대한 리뷰임을 밝힙니다.

  “구원의 확신(Assurance of Salvation)”은 상당히 논란이 되어왔던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이들은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필수적/필연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또 다른 이들은 구원의 확신이란 개인이 가질 수도 없고 필요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것은 신앙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의 확신이 없으므로 자신은 구원 받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은 믿음이 진실된 것이 아님에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다가 비참한 결말을 맞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코넬리스 프롱크 목사님은 자신의 책 『No Other Foundation than Jesus Christ』에서 이 문제를 다룹니다(‘그책의사람들’에서 번역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개혁신앙의 흐름 안에서 다른 입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칼빈을 비롯한 초기 개혁가들은 구원의 확신이 믿는 자에게 필연적이라는 입장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후 청교도들의 입장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드러나는 입장은 구원의 확신은 중요하지만 필연적이지는 않다는 것으로 차이가 나타납니다. 

  그 이유에 프롱크 목사님이 제시하는 견해가 흥미로운데요.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종교개혁자들은 당시 자신들에게 주어진 막대한 소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남들보다 더 강력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종교개혁 시대는 교회 밖에서 개인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도 가질 필요도 없다는 가톨릭에 맞서는 상황이었습니다. 셋째로 종교개혁 시대는 은혜의 교리를 재발견한 기쁨이 강렬했던 시대였으며, 이 발견의 기쁨은 점차 시들어가서 세월이 흐른 후에는 다시 약해졌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차이들은 있었지만, 그리고 구원의 확신이 절대적으로 믿는 자에게 필연적인 것은 아니며 종교개혁자들의 견해는 그들의 상황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지만, 그럼에도 구원의 확신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브룩스는 “기초가 튼튼한 확신은 지상 위의 천국”이라고 말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믿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가치 있는 것이고 그것을 얻기 위해 갈망해 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으로 프롱크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실천적인 삼단논법을 제시합니다.

1.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2.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다.

3. 그러므로 나는 영생을 얻었다. 

  대전제에 해당하는 1번은 성경에 근거하여 객관적이고 언제나 옳습니다. 문제는 소전제인 2번이 옳으냐 그르냐에 따라 결론이 참인지 거짓인지가 나뉘게 되는 것이고, 여기서 은혜의 증표들(Marks of Grace)과 자기평가(Self-Examination)이 들어설 여지가 생깁니다. 즉 나는 죄를 회개하고 있는지, 하나님과 의를 갈망하고 있는지 등의 평가 기준을 통해 소전제의 진위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은혜의 증표들에 너무 강조점을 두고 집착할 경우,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보다 체험과 경험에 위안을 두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주의는 하되 아예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경적이기 때문이며, 여러 신앙고백들을 통해서도 그것이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최우선에 두면서도 이런 은혜의 증표들을 가지고 자신을 잘 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경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 소망의 외적이고 객관적인 근거이면서 또한 내적이며 주관적인 시험의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말씀을 단지 소망의 객관적인 근거로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믿음의 주관적인 평가의 도구로도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이 주는 확신 이상의 어떠한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다만 성경의 모든 것을 필요로 합니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우리에게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방법을 보여주며 어떤 것이 참된지를 알려주는 바로 그 성경이, 우리는 단순하게 “믿고 구원을 얻어”야 한다고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 p.25

  우리에게는 객관적인 근거와 주관적 근거가 다 필요한데 그것은 모두 말씀으로부터 나옵니다. 또한 그것의 최종적 인장은 성령께서 찍어주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 매우 중요한 것으로 – 성화의 삶 가운데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프롱크 목사님은 토마스 왓슨의 글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이다”. 이것은 대전제입니다. 그리고 양심은 소전제를 이렇게 형성해줍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한다”. 그러면 성령께서 결론을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이다”. 왓슨은 이 성령의 증거가 필연적으로 적극적인 환경이나 정서적인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며, 성령의 성화시키시는 힘으로 우리 마음 속에 그가 신적 본성을 주입하시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성화는 확신의 열쇠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에 가깝게 살면 살수록, 우리는 믿음의 확신을 더 잘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p.28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은 성화의 삶과 동떨어져서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없으면 구원이 없는 것이다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동떨어진 확신의 말은 그의 소전제가 얼마나 빈약한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누군가가 “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하나요?”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그것이 구원에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라면, 우리는 왜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말해주어야 할까요? 

  물론 그 이유는 먼저 그것이 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부르심을 굳게하라고 말하며 우리 믿음을 시험해보라고 말합니다. 또한 사람의 마음은 간사해서 자신이 잘 믿고 있고 천국에 갈 것이라고 잘못된 확신에 가득찬 사람이 분명 있기 때문입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크리스찬과 무지의 대화”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자세한 내용은 『천로역정』이나 『No Other Foundation than Jesus Christ』를 보세요^^) 잘못된 확신보다는 조심스러운 자세가 훨씬 낫습니다. 마지막으로, 구원의 확신이 성화의 상태, 그리스도와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그 안에서 얻는 것이라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은 분명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차 있을 것이며,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사람, 즉 지상에서 천국을 누리고 있는 사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은 그리스도인인 마땅히 소망해야 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마땅히 권하고, 그것을 또한 바라며 주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점점 어두워져가는 것 같은 이 시대에 참된 기초로 바른 확신을 가지고, 지상에서의 천국을 누리는 성도들이 점점 더 많아지길 소망합니다.

 

덧글. 블로그 수정하면서 이 글을 다시 보는데, 빨리 책이 나왔으면 좋겠네요^^

나왔습니다요, 나왔어! 이제 그냥 사서 보시면…

 

Over de auteur

재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 17세기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의 교회론을 연구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의들, 특히 교회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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