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과 성경해석학

 

여기 개혁신학의 중요한 두 가지 명제가 있습니다.

1) 개혁신학의 두 가지 원리는 계시의 말씀이라는 외적 원리, 그리고 내적 원리인 성령입니다.

2) 그리고 개혁신학은 성령의 감동을 통한 유기적 완전축자영감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왜 중요할까요?

해석학에 있어서 해체주의는 저자의 죽음을 선언합니다. 즉, 저자의 의도는 텍스트에 완전히 ‘현전’하지 못합니다.

화자가 말을 할 때, 그 말은 화자가 목소리를 낼 때 그 시공에서 함께하면서 현전성을 갖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글에 담기면 글이라는 기호의 한계가 현전성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저자의 의도를 텍스트에서 완벽하게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텍스트를 나타내는 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나뉩니다. 예를 들어 ‘아이스크림’에서 아이스크림이라는 글자는 기표고, 그것이 가리키는 것이 기의입니다.

그런데 해체주의에 따르면 저자가 의도와 기의는 언어의 한계로 일치하지 못하기 때문에, 즉 저자의 의도가 언어의 한계에 부딪쳐서 기호 안에 완전히 담길 수 없기 때문에, 이런 한계 속에서 텍스트에서 저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런 시각에서는 우리가 성경 저자의 의도를 성경 텍스트에서 읽어낸다는 것이 불가능해져버리죠.

그러나 여기서 1)의 명제가 중요합니다. 성경 텍스트만이 신학의 원리가 아닙니다.  내적 원리가 되시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조명하시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접할 때 그 텍스트는 지금 살아있는 저자가 말하는 ‘현전성’을 생생하게 갖습니다. 마치 성령께서 지금 우리에게 살아있는 말씀을 목소리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잘못하면 바르트적인 생각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기록된 문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존적으로 와닿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거죠.

그러나 여기서 2)의 명제가 중요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통한 유기적 완전축자영감이죠. 무슨 말이냐면, 기록된 문자는 중요하단거죠. 왜냐면 성령께서 그 단어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선택하셔서 영감하셔서 기록된 말씀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해석에 있어서 완전축자영감은 성경 텍스트를 실존적으로 또는 자의적으로 파악하려는 위험에서 보호해줍니다. 성경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 그 자체이며, 그 자체로 신학의 외적 원리이며, 또한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해 우리에게 바르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린 이 명제들을 붙들고, 이것을 고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학함은 정말로 하나님께 의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닫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바르게 기록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신학함을 이끌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의 신학함은 철저히 하나님께 무릎꿇고 나아가는 예배이며, 그것이 우리가 붙드는 해석학이기도 합니다.

나를, 우리를, 참된 개혁신학을 할 수 있게 하소서.

Over de auteur

재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 17세기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의 교회론을 연구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의들, 특히 교회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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