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에서 퍼즐 맞추기

 

신학교에 들어와서 3년 동안 정신없이 공부하다 보면 문득 이런 질문을 던지거나 듣게 됩니다.

“뭔가 엄청 배운 것 같은데, 뭘 배운거지?”

“왜 이 과목들을 배운거지? 어떻게 써먹어야하는거지?” 

“배운게 정리가 왜 안될까?”  

등의 질문들입니다.


통합 – 그 어려움

이런 질문과 회의를 하게 되는 이유는 배우는 과목들이 통합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운 것들이 하나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이죠. 왜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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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배우는 과목이 참 많은 것이 그 이유죠. 고등학교나 대학교보다 빡센 과정입니다. 그런데 사실 과목의 수를 줄일 수는 없어요. (커리큘럼의 수정은 어느 정도 필요할지 모르지만) 배워야 할 것들이 정말 많거든요. 아무튼 이렇게 배우는게 많다보니 하나로 통합하기가 어렵습니다.

둘째 우리가 배우는 과목들이 각각 굉장히 전문화 되었다는 것도 한 몫합니다. 일반 학문이 전문화되는 추세와 함께 신학도 전문화되어갔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문화가 장점도 있긴 하지만, 단점이 꽤 큽니다. 그 중 하나가 신학이 전문화되어서 각 분과별로 깊이 들어가다보니깐, 통합이 어려워졌다는 것이죠. 예를들어, 우리는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이 서로 부딪치는 것을 경험한다거나, 또한 실천신학을 배우는데 그것들이 조직신학이나 성경신학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도무지 알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전문화되다보니까 각 분과별로 자신들의 분야를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다보니 서로 간에 균형이 안맞게 되거나, 대화나 이해의 부족으로 서로가 연결되지 못하고 독자적인 길을 가는 듯한 모습도 있습니다.

셋째로, 그런 흐름 속에서 현실적으로 수업에서 배우는 각 과목에서 강조점들이 조금씩 다를 수 있는데, 이것도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요소들이 우리에게는 통합이 어려워지는 요인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통합에 실패하게 되면, 결국 내가 관심 있는 분야만 알고 졸업해버리게 됩니다. 목회자로서 알아야 할 것을 일부만 알고 나가게 되는 꼴인거죠. 그래서 불균형적인 배움으로 끝나버릴 수 있습니다.   신학 이론과 모순되는 실천이 나오거나, 역사적인 오류를 반복하는 등으로 말이죠.

이런 통합의 실패는 영적 메마름을 가속화시키는 또 하나의 요소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이론에서 실천까지 통합이 안되니까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어서 점점 메말라 가는 거죠.

 

M.div. 의 목표

이런 문제를 대비하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신학교에 온 ‘목표’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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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div. 의 목표는 목회를 하는데 필요한 큰 틀을 형성하고, 방법을 익히고 도구를 갖추는 것이 목표입니다. 즉, 목회를 하는데 필요한 모든 부분들을 접하면서 이런 것들을 형성하고 갖춰야 한다는 거죠. 이 과정은 어떤 한 분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그건 나중에 Th.M이나 Ph.D 같은 추가 과정에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학교에서의 3년 동안엔 퍼즐은 완성할 수 없습니다. 그건 우리가 평생 맞춰가는 겁니다. 단지 이 3년 동안에는, 이 퍼즐의 틀과 희미한 모양만 만들어나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래서 존 파이퍼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신학교에서의 기간이 여러분이 사역하는데 알아야 할 것들을 배우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그런다면, 졸업 후 남은 생애 동안 여러분이 얻지 못한 것에 대해서 신학교를 향해 계속 불만을 터뜨리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신학교의 과정은 틀과 기본원리와 전제를 철저하게 익히는, 기반을 탄탄하게 다지는 과정인거죠. 틀, 원리, 방법, 도구, 전제. 이것들이 진짜 중요합니다.

그럼 우리가 배우는 신학의 틀이란 뭘까요? 기본적으로 우리가 배우는 과목은 학교에서 크게 6가지로 나누는데, 좀 더 좁혀서 4가지 분과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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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이죠. 이것이 신학의 4분과입니다. 이 4분과가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지 그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신학의 틀을 익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4분과의 연결관계를 말하기 전에, 이 모든 것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신학의 ‘서론’입니다.

 

서론

신학 서론, ‘프롤레고메나’라고 불리는 이것은 신학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신학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신학을 함에 있어 우리가 먼저 세워놓아야 할 전제가 뭔지를 다루는 학문입니다.  개혁신학이 뭔지, 그 원리가 뭔지 기초를 다지는 거죠. 이 신학서론은 다들 1학년 때 배우는 과목인데, 진짜 이걸 잘 정리해야합니다. 어찌보면 제일 중요한 수업 중 하나에요. 예를 들어, 우리가 신학을 한다고 할 때,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개혁신학의 외적원리와 내적원리가 진짜 중요합니다. 그게 뭘까요?

신학의 외적원리는 ‘계시’, 즉 ‘성경’입니다. 성경만이 신학함에 있어 우리의 유일한 외적원리입니다. 그래서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이란 말을 하는거죠. 그리고 신학의 내적원리는 우리 마음을 조명하셔서 깨닫게 하시는 ‘성령’입니다. 그래서 이 개혁신학의 원리를 가리켜(총신 신대원 조직신학을 가르치시는 최홍석 교수님의 표현을 따르면), “성령으로 말미암는 특별계시 의존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학함의 하나의 원리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원리와 전제들이 탄탄해야 그 위에 신학의 틀을 잘 쌓을 수 있습니다. 잘 쌓을 뿐만 아니라 이게 있어야 온갖 사상과 이단의 공격에서 굳게 설 수 있으며, 우리가 왜 개혁신학을 하는지를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개혁주의라는 용어가 얼마나 잘못되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종종 목격하곤 합니다.  왜 개혁신학을 하는지, 왜 이것이 가장 하나님 앞에 우리의 합당한 신학의 길이라고 여기는지를 이 서론 과목에서 고민하고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서론을 확고히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이 기초 위에서 신학의 4분과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4분과의 전체적인 연결관계만 잡아놓는 거라서 너무 일반화시키거나 다루지 않는 부분도 있긴하지만, 일단 중요한 연결점만 찍어보겠습니다.

 

신학의 틀 익히기

1. 성경신학

성경신학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성경의 메시지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를 공부하는 학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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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의 기본적 전제가 되는 해석학을 배우고,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 성경을 바르게 주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특별히 지금은 바른 성경론에 입각한 해석학과 그것을 기반으로 한 주해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고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 성경의 내용들이 성경의 계시가 주어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한 덩어리로 합쳐지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는 구원의 계시가  큰 흐름을 따라가면서 아주 복잡하고 풍성하게 얽혀있거든요.

 그러므로 성경신학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성경 전체가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를 아는 것을 다룹니다.

 

2. 조직신학

조직신학은 이렇게 풍성한 의미의 흐름과 덩어리를 형성하고 있는 성경신학의 내용들을 뽑아내어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공식화하는 작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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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걸 해야하냐면, 우리가 믿는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알아야 성도들이 겪는 문제에 대해 바른 가르침을 줄 수 있고, 이단들을 물리칠 수 있죠.  또한 성경을 균형있게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도 조직신학은 필요합니다. 즉, 성경을 편향되게 치우치지 않고 볼 수 있게하는 도우미의 역할도 합니다. 

조직신학은 성경신학에서 뽑아내지만 다시 성경을 보는 눈을 열어주는거죠.  성경신학에서 조직신학의 교리들을 뽑아내고, 그 교리가 다시 성경을 보는 눈을 열어주는 성경신학과의 끊임없는 해석의 순환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신학은 조직신학을 향하고, 조직신학이 내용들을 성경신학이 풍성하게 해줍니다. 성경신학의 내용들이 조직신학과 부딪치는 것처럼 보일 때, 서로가 서로를 교정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조직신학이 성경을 보는 눈을 열어주기도하고, 성경신학이 조직신학에서 놓쳤던 부분을 교정해주기도 하면서요. 이 둘은 모순이거나 서로 반대되는 영역이 아니라, 해석학적 나선순환을 그려나가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낫습니다.


3. 역사신학

여기에 역사신학이 더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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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신학은 신학의 역사와 그와 관련한 교회의 역사를 다루는데, 특별히 역사 속에 등장한 신학의 오류들과 여러 교리적 논쟁들을 살펴보면서 어떻게 우리가 신학하고 나아가야하는지를 알려주죠. 그래서 역사신학은 역사 속의 성경해석의 오류들을 알려주면서 성경신학에게 성경을 바르게 보는 법도 알려주고, 성경에서 뽑아낸 의미들을 조직신학으로 체계화 시킬 때, 균형을 잡아주고 길을 알려주는 거울이자 방향지시등의 역할을 해주는거죠. 그리고 거기서 영향받은 성경-조직신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역사가 되기 때문에 다시 역사신학의 일부로서 다음 세대의 성경-조직신학에 영향을 줍니다. 

이렇게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이 서로 얽힙니다.

 

4. 실천신학

그리고나서 비로소 이 세 분과의 상호작용을 바탕으로 실천신학이 나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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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3분과의 상호작용 위에서 형성된 신학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세상과 맞닿을 때, 어떻게 우리가 살고 실천해야하는지를 다루는 학문이 실천신학입니다. 여기에는 선교나 예배와 설교 등의 여러가지 논의들이 포함됩니다.

그런데 실천신학 또한 세상에서 부딪치는 문제들, 시대와 세상과 맞닿을 때 생기는 반작용들로 인해, 다시금 나머지 3분과의 신학에 질문을 던집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그럼 다시 성경, 조직, 역사 신학으로 돌아가 고민을 하게 만드는거죠.

이렇게 4분과는 서로 서로에게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입니다.

 

신학의 틀의 중요성

그러므로 정리하자면, 성경신학에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조직신학에서 그것을 체계화시키고, 역사를 거울과 지침으로 삼고, 그게 실천으로 이어지고, 다시 실천에서 부딪치는 문제들로 인해 이 순환이 반복되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공부하는 신학의 큰 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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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학의 틀이 중요한 이유는, 이렇게 신학을 해야 성경에서 실천까지 이어지는 진정 솔라 스크립투라, 오직 성경의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진리가 우리 삶의 실천까지 균형있게 이어지려면 이런 과정이 필요합니다.

사실 이 틀을 형성하고 통합하지 못했다는 것은, 내가 가진 생각이나 행동에 성경 외적인 어떤 것이 개입할 여지가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큰 틀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보고 살아야 하고 해석하고 실천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바른 기독교 사상, 세계관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사상 속에서 세상의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고, 목회를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바른 해답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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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3년 동안 공부할 때, 이 4분과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기억하면서 공부해야 합니다. 비록 지금 배우는 것들이 바로 이어지지는 않더라도, 크게 보고 서로 연결짓는 작업들이 필요한거죠.  배우면서 이것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끊임없이 고민해야합니다. 또한 이 틀을 받쳐주는 신학 원리와 방법론을 다루는 서론을 잘 다져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각 과목을 연결할 때 뭔가 모순되는 것을 발견하면, 서로가 서로를 교정하고 보완해주는 건설적 고민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는 성경의 진리는 하나의 통일체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져야 하는거죠.

배우는 것들에 대해 서로 대화하면서 토론하는 시간도 중요합니다. 이게 통합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전 신대원 기간 동안 그런 시간들 속에서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런 길을 이끌어줄 멘토를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수님이든 선배든, 혹은 책의 저자든 간에 말이죠. 서로 대화하고 멘토를 만나는 건 신대원에서 누릴 수 있는 큰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동아리 가입도 좋은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P&S라는 동아리에서 독서와 토론을 통해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있어요. 다른 동아리에서도 이런 부분에서 배우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통합을 위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진리이자, 사랑이자, 영원이시라는 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오 영원한 진리요, 참된 사랑이시요, 사랑이신 영원이시여!(O, aeterna veritas et vera caritas et cara aeternitas !)”라는 아름다운 찬양을 했습니다. 이것은 통합된 신학에서 흘러나오는 신앙의 고백이 찬양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함으로서의 신학함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통합된 신학은 자연스럽게 삶으로 이어집니다. 통합된 하나의 신학은 자연스럽게 그 틀을 따라 경건을 찍어냅니다. 신앙고백을 낳고, 찬양을 노래하게 합니다. 그래서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였던 마스트리흐트는 이론-실천 신학(TPT)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신학의 이론은 실천과 분리되지 않으며 하나를 이룬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신학은 단지 이론인 것이 아니며, 경건을 향하고,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학함이 참 힘들지만, 저도 이 길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Over de auteur

재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 17세기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의 교회론을 연구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의들, 특히 교회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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