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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7장의 ‘나’는 누구인가 – 1 해석의 역사

 

로마서 7:13-25에서 묘사되는 ‘나’는 교회 역사상 오랫동안 신학적 논쟁의 주제였습니다. 이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고(14절), 원하는 것(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죄)을 행하며(15절),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지만(18절), 선을 원하고(18절),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22절), 죄 때문에 곤고해하며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자입니다(24-25절). 논쟁점은, 이 ‘나’가 신자인가 불신자인가에 있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역사상 대단히 오랫동안 논쟁의 주제였고, 아직도 어느 한 의견이 압도적으로 옳다는 증거를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미결의 문제이긴 하지만, 이 문제를 미결 상태로 만족할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Douglas Moo)가 말하듯 “바울이 이 본문에서 묘사하는 정신적 투쟁을 벌이는 사람을 누구로 보느냐가 여러 신학적이고 실제적인 문제들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내적 투쟁을 벌이지 않는 사람일까요? 따라서 여기에서 묘사되는 사람은 거듭나기 전일까요? 아니면 본문은 끊임없이 내적인 갈등을 겪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 주제는 방대하기 때문에, 3부작으로 글을 쓰려고 합니다. 우선은 첫 번째로 긴 교회사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이 문제를 바라보았는지 살펴보고, 그다음에 제가 생각하는 합당한 입장을 진술하는 글을 다음에 쓰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문제에 대한 유용한 통찰을 제공하는 레퍼런스를 3부에 제공하겠습니다. 우선 이번에는 역사적으로 본문의 ‘나’를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지요.

 

1. 본문은 거듭났지만 죄 때문에 갈등하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는 견해

아우구스티누스(후기)부터 해서 루터(Martin Luther), 칼빈(John Calvin), 매튜 풀(Matthew Poole), 오웬(John Owen),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등의 고전 학자들부터 최근의 존 머리(John Murray), 찰스 핫지(Charles Hodge), 제임스 던(James Dunn), 크랜필드(C. E. B. Cranfield), 레온 모리스(Leon Morris), 빌 마운스(Bill Mounce)등의 현대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지지받고 있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 글로 미루겠습니다. 제가 지지하는 견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 다른 견해들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다음 글에서 제가 지지하는 견해를 논증함과 더불어 다른 견해들도 비판해 보겠습니다.

 

2.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견해

고대 교부(아우구스티누스도 초기에는 이 견해를 지지)들, 웨슬리 등의 지지를 받았지만, 비교적 최근에 이 견해가 많이 등장했습니다. 최근 학자들 가운데서는 헤르만 리델보스(Herman Ridderbos), 앤서니 후크마(Anthony Hoekema), 로버트 레이몬드(Robert Raymond), 존 스토트(John Stott), 고든 피(Gordon D. Fee), 핏츠마이어(Fitzmeyer) 등이 이 견해를 지지합니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대강 다음과 같습니다(이 외에도 여러 논거들을 제시하지만 대체로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논거들만 열거해 보았습니다).

첫째, 문맥상 바울은 7:5에서 설명한 비그리스도인, 즉 ‘육신에 있을 때’의 상태를 7-25절에서 부연설명하는 것이다. 또한 8:1-17에서 묘사되는 신자의 상태는 7:6에서 묘사하는 ‘율법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의 묘사와 어울린다. 따라서 문맥과 구조는 본문의 ‘나’가 불신자임을 지지한다. 구조는 다음과 같다.

 

A. 율법 아래: 불신자의 삶(7:5)

B. 성령 아래: 신자의 삶(7:6)

A’: 율법 아래: 불신자의 삶 묘사(7:7-25)

B’: 성령 아래: 신자의 삶 묘사(8:1-17)

 

둘째, 이 단락의 ‘나’는 죄와 열렬히 투쟁하지만, 성령님의 도움과 인도하심이 없다. 거기에 반해 8장에서는 성령님이 등장한다(19회 등장). 그래서 성령님의 도움으로 죄에 대해 승리한다. 따라서 성령 없이 죄와 싸우는 ‘나’는 그리스도인일 리가 없다.

셋째, 이 단락의 ‘나’는 죄 아래 팔렸고(14), 원하는 것(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죄)을 행하며(15절),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지만(18절), 6:2, 11, 18-22절에서 묘사하는 신자는 죄에서의 노예에서 해방된 상태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즉, 7장의 ‘나’가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면 6장과 상충한다.

넷째, 본문에서 말하는 ‘나’는 참된 경건을 갈망하기보다는 오히려 율법 아래에서 외식적 경건을 열망하는 수준이다. 즉,당시 유대교의 경건에 불과하다.

다섯째, 본문의 ‘나’는 죄에 대해 싸우고 있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죄에 패배당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신자의 갈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의 패배를 말한다.

이 견해는 사실상 ‘경건주의자’들이라고 불리는 18-19세기 학자들에 의해 주로 제기되었습니다. 이들은 이전의 “생명없는 개신교 정통주의’에 반발하여 ‘죄에 지나치게 빠져있는데도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주장과 함께 프랑케, 벵겔 등에 의해 제기되었습니다. 물론 존 웨슬리도 이것을 지지했고요. 하지만 현대에는 경건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만 이 의견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신학전통에서 모두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3. 로이드존스의 견해

위대한 설교자요, 14권에 이르는 방대한 로마서 설교집을 남긴 로이드존스(Martyn Loyd-Jones)는 나름의 독특한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묘사하는 ‘나’는 신자나 불신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는 여기서의 ‘나’가 ‘회심의 과정’에 있는 사람을 묘사한다고 가리킵니다. 즉, 부흥의 시기에 말씀으로 말미암아 죄를 각성하고, 아직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인하여 거듭나 자유해지기 전 단계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즉, ‘회심 직전의 심리적 상태’를 ‘나’가 묘사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C. H. Dodd도 비슷한 주장을 합니다).

특별하고 은혜로운 의견일 수 있지만, 인정받기는 좀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토머스 슈라이너가 지적하듯, “본문은 율법에 비추어 본 인간 능력을 분석하고 있지 사람이 거듭나게 되는 심리적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 더글라스 무의 견해 – 이스라엘로 보는 견해

기본적으로 이 입장은 2번의 ‘불신자’ 의견을 옹호합니다. 하지만 더글라스 무는 독특한 입장을 전개합니다. 요약하자면, “여기서의 ‘나’는, 회심한 바울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현재 시점에서, 한때 율법으로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려 했던‘나’를 비추어 여전히 과거의 자신처럼 그리스도와 성령 없이 율법의 행위를 통한 칭의와 성화를 추구하는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을 가리킨다.”는 것이지요.

정리하자면, “나는 율법 아래에 사는 중생하지 못한 유대인들의 영적 상태”를 묘사한 것이 됩니다. 이 의견은 여러 난제들을 해결해 주고, 특히 7장 초반의 율법 문제와 9장의 유대인 문제를 의식하여 문맥을 잘 진단한 의견이라는 평을 받습니다(최갑종). 실제로 이 견해는 최근에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 톰 라이트(N.T. Wright)나 국내의 이한수, 최갑종 교수가 지지합니다. 이 의견도 다음 글에서 평가해 보겠습니다.

 

5. 그 외 의견

토마스 슈라이너(Thomas Schreiner)는 본문에서의 바울의 의도가 신자나 불신자의 상태를 서술하는 데 있지 않고 율법이 인간 본성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데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도 ESV 스터디 바이블에서는 신자일 것이라는 쪽으로 기우는 것 같습니다. 또한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은 ‘신자이긴 하지만 연약한 신자’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의견도 다음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 취해서는 안 되는 ‘태도’

이 문제는 대단히 어렵고, 또한 나올 수 있는 웬만한 해결책은 다 나온데다가, 아직도 어느 한 의견이 압도적으로 옳다는 증거를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주석을 보거나 누군가의 의견을 들을 때, 한 의견이 압도적으로 옳고 나머지 의견이 말도 안 된다는 식의 결론은 피하십시오. 뭔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거나, 아니면 해석학적 겸손함이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고든 피(Gordon D. Fee)는 이 문제에 대해 본문의‘나’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증거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톰 라이트도 “여기서 바울이 ‘통상적인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고 이해할 일말의 가능성도 제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더글라스 무는 이런 상황에서 겸손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바울이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적용할 수 있는 점들을 열거합니다(Moo. 641쪽). 저는 이 문제를 다루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이렇게 겸손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글에는 제가 보기에 옳은 의견, 즉 ‘신자를 가리킨다’는 의견을 상술하겠습니다.

Over de auteur

정규

진짜배기 잉여 필자. 다른 필진들과는 다르게 공식적인 '저자'다. 담임 목회자이자 두 딸의 아버지. 잉여롭고 싶은데 찾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 ㅠㅠ

Comments 3

  1.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론 7장 25절 말씀이 이해가 잘 안가는데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했을때)

    다음 글이 기대가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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