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 예레미야 2:13
나는 항상 두가지 죄를 동시에 짓는다.
1. 하나님을 떠나는 것
2.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이외의 더 즐거운(것으로 판단되는) 것을 찾는 것
더 안타까운 것은.
죄를 짓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떠날 때…
온갖 변명들로 자신을 합리화시킨다는 사실이다.
그 모든 변명들을 나열할 필요도 없다.
그 변명들은 깔때기다.
한가지 이야기를 서로 다른 목소리로 하고 있을 뿐이다.
“이 과실을 먹으면 네 눈이 밝아지리라”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최고가 아니라는 속삭임.
지금 즐기고 있는 것이 최고가 아니라는 속삭임.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이 최고가 아니라는 속삭임.
객관적으로 판단해보자.
‘맨날 물 뜨러 우물 나오기’ VS ‘마음에서 항상 넘쳐나는 생수’ 의 대결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아무 고민도 없이
‘주여 나에게도 그 물을 주셔서 더 이상 이렇게 땡볕에 멀리까지 나와서 물뜨지 않아도 되게 해주세요!’라고 하지 않았던가.
웃기는거다.
왜 이해하지 못하느냐 내 영혼아.
왜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 영혼아.
하나님께서 나에게 눈을 주시어 그분의 영광을 보게 하셨고,
귀한 은혜로 그 분 안에서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다.
항상 꿀단지 입구 가에서 서성이며 굳어 늘어붙어버린 꿀 뜯어 먹으며 행복해했는데,
이제는 꿀단지 안에 손을 넣어 손가락으로 찍어 진짜 꿀을 맛보았다.
그런데 죄된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지,
이상하게 그 꿀보다 더 달고 더 맛있는게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돌아간 곳은 다시 꿀단지 가장자리다.
일말의 진실이 있다.
그 꿀보다 더 달고 더 맛있는게 있다.
내가 현재 만난 하나님보다
더 멋지고 더 크고 더 영광스럽고 더 은혜로운 것이 있어서 내 행복이 극도로 치닫을 수 있다.
내가 만난 하나님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더 멋지고 더 크고 더 영광스럽고 더 은혜로운 것’은 꿀단지를 나와서는 찾을 수 없다.
가장자리로 가봤자 아무것도 없다.
절망 밖에는. 그것도 ‘이.미.’ 맛보았던 절망 밖에는…
내가 현재 겪고 있는 모든 것이 최고가 아니라는 것의 근거가 되며 동시에 소망이 되는 것은.
하나님 바로 그분 자신이시다.
내가 오늘 만난 하나님보다 더 좋은 것은,
내일의 하나님 밖에 없다.
내가 오늘 마신 생명수보다 더 달콤하고 더 갈증을 해소하는 것은
내일의 생명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꿀단지와 다르다.
하나님은 꿀이 아닐뿐 아니라, 다 먹고 나면 바닥을 드러내는 꿀단지는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은 무한하시며,
하나님 안에서 샘솟는 생명수는 무한하시기에,
내가 만날 수 있고 내가 즐길 수 있는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무한히 선하신 하나님을 무한히 즐거워 할 수 있는 무한의 시공간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게 천국이겠지?
오늘도 나는 웅덩이를 수억 팠다.
두렵다.
하나님을 떠난 것도,
하나님을 떠나 웅덩이를 판 것도.
그런데 더 두렵다.
내가 그 웅덩이가 물을 채울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팠다는 사실이,
내가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모르는 놈이 아니라는 사실이,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놈이 아니라는 사실이…
항상 드는 생각이다.
심장과 뇌가 만약 우리의 마음을 대변한다면.
지퍼가 달려서, 꺼내서 락스로 닦은 뒤에 다시 집어넣고 싶다.
혹 ‘마음’이라는 장기가 존재한다면,
외부보관이 가능했으면 좋겠다.
맨날 꺼내서 닦고 다시 넣고 닦고 다시 넣게.
꺼내서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수술도 하고, 아픈 곳도 싸매고, 더러운 곳도 닦게…
난.
마음수리공이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이 영혼.
팠던 수억의 웅덩이 다시 메꾸고.
하나 밖에 없는 웅덩이 앞에 닭똥 같은 눈물 흘리며 오늘도 서 있는다.
쭈뼛쭈뼛 서서 속삭인다.
‘저…
주님.
있잖아요.
그래도…
이 물이 제일 맛있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