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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성도의 신앙은 정당한가? – 양희송의 ‘가나안 성도 교회밖 신앙’을 읽고

  •  이 글은 크리스천투데이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

책 소개

제가 알기로, 국내에서 가나안 성도(‘안 나가’를 뒤집어서 만든 조어로써, ‘교회에 나가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를 본격적으로 다룬 책은 이 책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본서는 청어람 아카데미의 양희송 대표가 쓴, 과감하고 강력한 ‘시각’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제가 ‘시각’을 담은 책이라고 말한 이유는, 이 책은 화두의 제시와 분석은 있지만 대안은 제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그 현상(가나안 성도 100만 현상)과 가나안 성도들에 대한 양대표 자신의 ‘시각’만 존재합니다. 물론 재미있게도(그리고 어이없게도), 책 내용은 전혀 가나안 교회 현상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뒤표지의 추천인 두 분은 이 책이 ‘대안을 만들어’가며 ‘대안에 깊이 동감한다’고 말하긴 했지만요.

책의 내용은 크게 3부로 나뉩니다. 1부는 ‘가나안 현상학’입니다. 여기서는 2013년 조성돈, 정재영 교수의 2013년 연구결과를 소개하고 요약하며, 가나안 성도들이 누구이며 왜 교회를 가지 않게 되었는지(1–2)와 가나안 성도들 바라보는 시각(1–3)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특히 저자는 1–3에서 가나안 성도를 단순히 ‘교회 쇼핑족’이나 ‘교회 난민들’, 그리고 ‘영적 엘리트주의자들’이나 ‘영성소비자’, ‘잃어버린 양’으로 보는 것을 경계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인식이 ‘전형적인 오해’(p.56)라고 말하며 결론적으로 가나안 성도들도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더욱 잘 살도록 재촉하는 것(또는 삶 p.70)”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2부는 ‘가나안의 사회학’입니다. 첫 부분에서 저자는 14.2년 정도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그들이 왜 교회를 떠나는지에 대한 이유를 ‘숨막힘’(아마도 권력구조로 인한)‘과 ’위선‘, 그리고 ’분쟁‘등으로 정리합니다. 그리고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는 공동체(예를 들면, 벙커원 교회)들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서, (어쩌면 대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성인용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합니다. 즉, 한국교회는 ’구원의 확신‘부터 시작하여 단계적 양육을 거쳐 그 결론을 ’전도‘와 ’선교‘로 삼는 아이용 기독교에 머물러 있었고, 그 결과는 신앙의 더 깊은 성장을 가로막고 체제 순응적 인간형을 양산하는 데에만(p.135) 소용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것을 넘어서는 성장을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를 신학을 가르치는 것을 통해 구현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성인용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3부는 ‘가나안의 신학’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본격적으로 가나안의 신학, 즉 ‘제도적 교회 바깥에서도 에클레시아가 가능하다는’ 신학을 전개합니다. 그는 교회론 논쟁의 역사를 간략히 정리하고, ‘제도’라는 것이 과연 신앙을 보존하는데 효과적인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에클레시아는 교제(코이노니아)와 이웃을 향한 사랑(아가페)를 발휘하는 삶이 이루어지는 장이고, 심지어 역설적으로 에클레시아란 이름을 달고도 그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 제도는 에클레시아에 가장 적대적인 장애물이 된다고 말합니다(p.164–166).

저자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나안 성도들이 ‘회심해야 하는 어린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제도에 갇혀 그 본래적 기능을 상실한 에클레시아(교회)를 향한 저항과 탈출의 몸부림을 하는 신앙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며 그들의 신앙이 ‘성 안의 신앙’이 아니라 ‘길 위의 신앙’이며, 미지의 신앙이고 이웃이 되어주는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핵심 쟁점 – ‘제도’도 교회(에클레시아)의 일부인가?

다시 양대표의 말을 이해하기 쉽게 옮기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나안 성도들을 길 잃은 어린양 취급해선 안 된다. 오히려 교회의 ‘기능’이 ‘제도’ 때문에 무너졌기 때문에, ‘제도’ 바깥에서 ‘기능’을 수행하려는 신앙인들일 수 있다”입니다. 이러한 주장 이면에는 교회의 제도는 기능을 담기위한 그릇일 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이걸 다른 언어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기능(또는 사명)만을 주셨을 뿐 특정 제도는 주시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저자는 ‘공동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이상적인 ‘에클레시아’라는 공동체가 지금의 조직과 권위가 있는 제도 교회일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제도적 교회를 정기적으로 다니지 않고 소속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그를 신앙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없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저자인 양대표가 이끌고 있는 ‘세속성자를 위한 수요모임’같은 곳에서 신학과 삶을 나누면서, 세상을 향한 사랑과 봉사를 나누는 것도 충분한 신앙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신약성경이 이런 형태를 신앙을 승인한 적도, 심지어 상상한 적도 없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이 쓴 서신들은 직분도 제도도 없는, 커피숍과 같은 문화공간에서 수요일에 모여 신학과 삶을 즐거이 나누는 집단을 향해 쓴 책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교회에서 장로들에게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딛 2:15; 딤후 4:2)하라고 말하며, 교회를 다스리고(행 15:2; 20:17; 딤전 3:1–7; 5:17; 벧전 5:1), 성도들에게는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할 것을(히 13:17)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에클레시아에 기능뿐 아니라 제도도 주셨습니다. 성경은 장로와 집사의 직분을 말합니다. 각자는 은사에 따라 봉사해야 하며, 봉사할 거리는 차고 넘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들어야 하며, 들은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따라서 제도 없이는 기능도 온전하지 못합니다. 이 점을 헤르만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무정부주의는 말도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조직이나 교회정치, 또는 권위 없이 교회를 세우셨다는 주장은 철학적 신비주의의 특징을 이루는 원리들로부터 나왔지만, 성경의 가르침이나 실제 삶의 현실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말이다.
– Herman Bavinck, John Bolt(ed), Reformed Dogmatics IV: Holy Spirit, Church, and New Creation(MI: Baker Academic, 2008) p. 413〔512〕

 

인터뷰한 가나안 성도는 과연 일반적인가?

이 문제를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길을 찾아 제도적 신앙을 떠나는 가나안 신앙인’이 정말 일반적인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저자는 책 초반부(p.22–34)에 ‘교회는 떠났지만 신앙생활은 더 윤택해진’ 기독교 단체의 중견 책임자인 한 가나안 성도의 예를 소개합니다. 그는 현재 제도적 교회를 떠난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주일에는 11시 15분에 도넛가게에 도착해서 도넛과 커피를 시켜놓고 한 시간 정도 독서를 하며, 12시 15분에 가족들과 점심식사를 합니다. 그래도 주일학교의 필요성은 인정하기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은 인근 교회에 다닙니다. 그는 교회를 계속 다니는 것에 대한 어떤 설득력 있는 대답도 들은 적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교회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당신들은 왜 아직 남아 있습니까?”라고 묻는 사람입니다.

그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가나안 성도일 수 있을까요? 저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미 ‘기독교 단체의 중견 책임자’입니다. 주일에 도넛 가게에서 책 한 권 읽을 만한 정도는 되는 신학적 식견이 있는 사람입니다. 즉, 교회를 14.2년 다녔지만 6개월 동안 교회를 다니지 않은, 한 때는 교회의 중심부에 깊이 참여하고 있던, 지금은 여러 문제로 교회를 다니지 않는 ‘기독교 신앙의 문화나 컨텐츠를 전혀 접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저자는 조성돈, 정재영 교수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나타난 가나안 성도들의 특징을 보고, 그 양상이 대부분 위의 기독교 단체 중견책임자와 비슷할 것이라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성도들은 모두 이와 같을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논지를 전개하고 있지요. 저자는 마치 가나안 성도들의 대부분이 ‘미지의 신앙을 찾아 탐험하는 신앙인’인 것처럼 묘사하지만, 실제 대부분의 가나안 성도들은 오히려 ‘다시 돌아와야 하는 잃어버린 양’일 수 있습니다.

가나안 성도들의 대부분이 14.2년을 교회 출석하고, 교회의 중심부에 깊이 참여하고 있던 핵심층이었으며, 교회를 다니지 않기로 한 가장 큰 이유가 ‘자유로운 신앙생활(30%)’였다는 사실이, 그들이 꼭 ‘바른 신앙인’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14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참된 기독교 신앙과 교회에 대하여 이해하지도 못했을 가능성에 대하여는 생각하지 못합니까? 게다가 책 초반에 인터뷰한 기독교 단체의 중견책임자의 신앙은 ‘괜찮은’ 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미안하지만 어느 쪽이 더 어렵습니까? 한 기독교 단체의 중견책임자로써 주중에 신앙과 연관된 여러 일을 하고 좋은 신앙양서도 읽으면서, 교회를 ‘아직도’ 다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왜 아직 남아있습니까?”라고 비난하며 ‘윤택한’ 주일을 도넛가게에서 보내는 것과, 그 가나안 성도의 아내와 자식들이 다니는 교회의 교회학교 부장집사로써, 한 편으로는 꼰대 같은 사고방식과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졌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두 자녀를 키우고 성가대를 하며 십일조와 기타 헌금을 내면서 주중 월~금까지 세속적인 회사에서 상사한테 욕을 매일 들어먹으며 야근하고 파김치처럼 퇴근하지만 ‘숨 막히고, 위선적이며, 분쟁이 있는’ 인근 교회를 섬기는 것. 둘 중 무엇이 더 어렵습니까?

후자가 전자보다 더 어렵지 않다고 주장한다 하더라도, 전자를 ‘길 위의 신앙’이며 ‘이웃이 되어 주는 신앙’이고 ‘미지의 신앙’이라고 포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게다가 전자를 후자보다 더 ‘생각 있는’ 신앙인인양 생각하는 양 묘사하는 것은 웃기는 일입니다. 저자는 가나안 성도들을 위한 신학강좌를 만들고 대안처럼 이야기하지만(p.134), 미안하게도 주 5일 8시 출근 10시에 퇴근하며 토요일 오전에는 뻗었다가 오후에는 아이 셋을 데리고 외출해야 하는, 그러다가도 주말에 상사로부터 전화가 오면 부리나케 회사로 달려가야 하는 서울의 30대 직장인 아버지들은 그 강좌를 들을 수 없습니다.

전자는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책을 읽고, 양대표의 평신도를 위한 교양신학을 들으며,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모여 신앙을 이야기하고 한국교회를 비판하고 세상을 향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나이와 생각의 차이도 크고 환경도 신학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는 없을 것이고, GBS 때 횡설수설하여 논점을 파악하기 힘든 한 형제의 간증을 참고 들어야 할 일도 없을 것이며, 3년 동안 교사로 가르쳤던 아이가 대학에 가서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이야기할 때 느끼는 절망감도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현장이 없는 상황을 ‘신앙’으로 포장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럼에도 웃기는 것은(그리고 화가 나는 것은), 전자의 기독교인들이 후자의 기독교인들을 비난할 뿐 아니라 바보취급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언: 제도로부터의 탈피가 아닌, 제도적 교회의 개혁이 답이다.

사실 가나안 성도를 보는 이 책의 시각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것이며, 미국에서는 이미 레너드 스위트나 조지 바나 같은 인물이 주장하여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한물 간’ 이론입니다. 이미 케빈 드영(Kevin Deyoung)은 이러한 이론이 잊어버리고 있는 중요한 한 교리에 대하여 ‘왜 우리는 지역 교회를 사랑하는가’(2010, 부흥과개혁사)에서 밝힌 바 있지요. 그것은 놀랍게도 원죄의 교리입니다(p.254, Deyoung).

양희송 대표는 누군가 ‘제도적’ 공동체를 떠나도 충분히 신앙이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즉, 공동체만 있다면 그것이 ‘제도적’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누군가 죄를 저지른다면, 특히 공동체 내에서 죄를 저지른다면 누가 권징합니까? 가르침은 누가 줄까요? 아무나 가르쳐도 됩니까? 아니, 가르침이 없어도 괜찮습니까? 벙커원 교회처럼 모두가 평등하게 자기 의견을 나누어도 될까요? 그 의견 중에서 온갖 이단적인 내용이 판쳐도 말입니까? 신천지가 와서 자기 성경해석을 나누어도 되는 것입니까? 그러면 쫓아내야 하는 걸까요? 무슨 권위와 무슨 제도와 무슨 합법성으로 그들을 쫓을까요?

우리는 제도적 교회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인 정도가 아니라, 죄를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여기서 벗어나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2000년 기독교 역사상 늘 펠라기우스주의로 정죄되었습니다. 우리로써는 희망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을 주셨고, 그 구원 안에는 ‘제도적 교회’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도적 교회를 운영하고 회원이 되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제도적 교회, 즉 가시적 지역교회는 타락하고 무너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2000년 동안 제도적 교회를 통해 말씀을 공급해 주셨고, 서로를 돌보게 하심으로써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정신만 주신 것이 아니라, 형태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면, 제도적이고 권위적인 어떤 형태가 없어도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입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 죄인이라고 믿지 않는 펠라기우스주의자가 내리는 결론에 불과합니다(물론, 양대표가 펠라기우스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아직도 제도적 교회가 필요한 이유는, 제도적 교회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권력욕이 있고 수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제도적 교회가 죄인인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이며, 비록 지금 죄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최종적으로는 승리할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양대표가 제도적 교회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제도적 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합니다(p.187). 하지만 제도적 교회를 ‘떠나 있는 것’도 괜찮은 신앙의 상태라는 결론은 제도적 교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너희 떠나도 괜찮으니까 정신 차리고 잘해”정도의 겁주기에 불과한 것이지요.

차라리, 이미 성경에서 상당히 멀어지고 타락한 제도적 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지속적으로 부르짖는 것이 낫습니다. 물론 이런 의견이야 이미 한국교회에 지치도록 많이 나왔으니 거의 전혀 새로울 것이 없긴 하지요. 그래서 우리에게 모자란 것은 담론이라기보다는 실천일 것입니다. 저자는 대안을 말하지 않고, 시각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 시각으로는 좋은 대안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목사와, 교회의 모든 사람들을 목숨을 걸고 목양하는 장로들, 그리고 교회의 살림과 구제에 열심을 내는 집사들이 서로 사랑하며 한 마음으로 세상을 섬기는 ‘제도적 교회’가 많아지기를 소망하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이 타락한 세상에서 이러한 교회가 많이 나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교회를 나가던 안 나가던 세상 모든 죄인들의 소망은 이러한 교회 안에서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p.s. 제가 쓴 서평 중에서 아마 가장 신랄한 비판을 담은 글인 것 같습니다. 비판과 반론은 늘 언제나 환영입니다. 논지의 많은 부분은 케빈 드영의 책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Over de auteur

정규

진짜배기 잉여 필자. 다른 필진들과는 다르게 공식적인 '저자'다. 담임 목회자이자 두 딸의 아버지. 잉여롭고 싶은데 찾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 ㅠㅠ

Comments 66

  1. 제도적 교회의 회복, 직분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교회의 회복이 해답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무엇보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지적한 대목은 더욱 공감이 됩니다. 귀한 서평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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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쓰신 글에 많은 부분 공감합니다. 우리가 교회라는 공동체를 유지하고 참여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효율적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만약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다면 교회를 버리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제도적인 교회를 섬기고 지켜야 하는 이유는 우리 주님께서 명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명하셨으니 가장 필요하고 효율적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교회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 좋으냐, 좋지 않느냐 하는 것은 그것을 판단하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교회가 더 좋으냐, 아니면 다른 어떤 공동체가 더 좋으냐는 것도 그것을 판단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판단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제도적인 교회가 있는 것은 바로 주님의 판단입니다. 세례를 받는다고 구원을 받고 받지 않는다고 구원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 효율성을 판단하여 효과적이기 때문에 해도 되고 그렇지 않으면 세례를 없애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겨우 100년을 살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유한함으로 수천년을 이어왔거 앞으로 또 얼마나 더 이 땅에 존재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이 교회와 성도들의 삶에 유익성을 판단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우리가 그 성례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믿음이니다. 제도적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양희송 씨처럼 더 좋아 보이는 것이 있다고 그저 어떤 모임 정도를 만들고 그것이 교회를 대체할 수 있다고 말하거나, 주일날 도넛을 먹으면서 신앙생활을 편안하게 마음대로 즐기는 사람들의 삶이 과연 좋은 것인가?를 누가 판단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교회들이 해체되고 그런 신앙 생활을 한다면 100년 후에 500년 후에 이 땅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있을지 과연 책임을 질 수 있단 말입니까? 비록 부족하고 고리타분하고 죄악된 부분도 많은 누더기 같은 교회이지만,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바른 복음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런 교회라도 있었기 때문임을 그들은 모릅니다. 비록 누더기 같은 교회이지만 그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순교자가 나왔고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불살랐던 신앙의 선배들이 있었는지, 그들도 역시 불완전한 교회에 속했지만 그 교회를 사랑했고 지켜왔기에 우리에게 복음이 있는 것임을 왜 그들은 모를까요? 우리는 그저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묵묵히 순종하면 될 줄로 압니다. 그러기에 저는 부족하고 연약한 교회이지만 주님께서 사랑하신 주님의 몸된 이 교회를 사랑하고, 단지 영적인 교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제도적인 교회를 지킬 것을 우리에게 명하셨다고 믿습니다. 좋은 글, 참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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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한 의견 감사합니다. 다만 양대표님이 교회의 해체까지를 주장하거나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제한된 인간의 생각 안에서는 늘 오류가 있겠지요.

  3. 글을 읽다가 든 생각인데,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 도나투스 논쟁과 펠라기우스 논쟁이 함께 일어난 것도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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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댓글이 다소 공격적인 면이 있는 점 먼저 양해 부탁 드립니다. 제가 이 글을 읽었을때 글쓴이 분께서 양 대표님을 향해 나타내신 면이 저에게도 어쩔수 없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신약성경이 이런 형태를 신앙을 승인한 적도, 심지어 상상한 적도 없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이 쓴 서신들은 직분도 제도도 없는, 커피숍과 같은 문화공간에서 수요일에 모여 신학과 삶을 즐거이 나누는 집단을 향해 쓴 책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교회에서 장로들에게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딛 2:15; 딤후 4:2)하라고 말하며, 교회를 다스리고(행 15:2; 20:17; 딤전 3:1–7; 5:17; 벧전 5:1), 성도들에게는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할 것을(히 13:17) 말합니다.”

    재밌는 사실은 글쓴이 분께서는 제도적 교회의 개혁을 응원하는 것처럼 하면서 동시에 종교개혁 사건이 일으킨 변화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개혁을 외치면서 은근슬쩍 목회자의 권위는 사수하는 정규님께서는 만약 16세기에 살았더라면 신부들의 교권하락 현상을 바라보며 성도들에게 비난하시지 않으셨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합니다.

    가나안 성도 증가 원인은 무시한채 목회자의 교권하락(목회자의 말을 불순종하는 것보다도 더한, 아예 상종하지도 않겠다는 가나안 성도들의 태도)에 대한 내용만 신랄하게 비판하셨습니다만, 기성세대 목회자들의 마인드와 전혀 다를게 없으시다고 생각됩니다. 이미 故 옥한흠 목사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문제는 목회자들이 16세기의 성직자들처럼 타락했다는 겁니다. 16세기 교회의 제도들은 모두 성직자들에 의해 설계되었는데 어떻게 성직자들과 그들의 산물인 제도를 남겨둔채 개혁합니까? 암세포를 살려두고 암 제거 수술을 하겠다고 하는거나 다름 없습니다. 고양이가 생선 걱정해주는 격이죠.

    성경에는 교회에 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지만 그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져야 되는지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회의 리더는 목회자가 꼭 해야된다는 구절도 없습니다 (Office of Overseers = 성직자, 목회자, 장로). 그렇기에 종교개혁 당시 성직자에서 목회자로 교회 교권 이전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안수받는 목사들중 몇명이나 성경에서 요구하는 자질에 합당할까요(디모데전서 3:1-7). 적어도 천주교의 안수방식 수준을 흉내라도 내야되지 않을까요? 작자가 말하는 ‘제도’란 대체 무엇입니까. 시험을 치면 누구나 목사 될수 있고 (그 와중에도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부정까지 저지르고) 그가 하는 말에 다 순종하고 복종하는 한국 현대 교회의 ‘제도’, 이런걸 제도라고 부를수 있는 것 자체가 저는 부끄럽다고 생각합니다.

    가나안 성도들은 교회의 제도 자체를 부정해서 교회를 떠난게 아니라 목회자들과 그들이 만든 ‘제도’가 없어질때까지 피난민처럼 도망 나온 사람들입니다. 가나안 성도들의 증가 현상은 성도들의 일탈이 아니라 목회자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앨리스터 맥스래스의 말을 조금 인용하자면 기독교는 돌연변이 세포와 같습니다. 필요없는 부분은 잘려 나가고 다른 방향으로 언제나 성장할 수 있는 생물체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속에 목회자의 권위도 언제나 잘려 나갈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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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주신 고견은 감사드립니다.^^ 죄송합니다만, 다음 글에서 기림님의 의견에 대한 답이 나올 것 같습니다. 즉답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다음 글까지 읽어보시고 대화하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시고 의견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5. 율법이전의 혼란과 율법이후의 복음 혹은 자유를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의 말(갈라디아서 3:24)처럼 율법은 초등교사지만, 초등교사를 거치지 않은 성도에게 처음부터 성인용 교육을 시켜서는 죽도 밥도 안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자유를 악용하는 우리의 죄성을 고려할 때 ‘제도적 교회’가 필요하다는 서평의 주장에 공감합니다.

    다만 현재의 교회’제도’가 하나님께서 주신 ‘불변의 형태’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교회제도는 구약의 성전중심에서 가톨릭으로, 종교개혁 이후에는 오늘날의 개혁교회로 변화한 바 있습니다. 그중 가톨릭에서 개혁교회로의 변화는 가톨릭의 타락과 하나님의 뜻이 변화의 일차 원인이지만, 성도들의 성경 이해력 향상도 주요 배경입니다. 이전에는 성직자조차 성경을 못 읽는 경우가 많았지만(중세 초에는 왕과 귀족도 문맹이 많았습니다.) 중세사회가 안정되면서 글을 읽을 수 있는 이들이 늘었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읽게 되면서 교황으로 대표되는 고위성직자 중심의 교회제도와 성경해석에 문제의식이 생겨났으며, 그러한 문제의식은 ‘면죄부’판매를 계기로 폭발합니다. 시기적으로 늦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1450년)가 고려의 금속활자(1377년)보다 역사적으로 높게 평가 받는 것은, 교회제도에 대한 의문이 늘어나는 시기에 더욱 많은 이들이 읽을 수 있는 자국어(독일어) 성경의 인쇄·보급하는데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국어 성경의 보급과 함께 교회제도는 ‘고위성직자 중심’의 가톨릭에서 ‘일반 목회자’가 중심이 되는 개혁교회로 변화합니다. 개혁교회는 ‘만인제사장’을 내세우고 ‘평신도 중심의 교회’를 지향했지만, 실제 제도는 ‘목회자 중심’(+일부 장로)으로 설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 시기부터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의무화되는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주요 선진국에서 조차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의 비율은 10~20%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성경의 배경과 문맥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의 비율은 그보다도 낮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교회제도가 평신도가 아닌 목회자 중심으로 설계되는 것은 위의 서평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단과 잘못된 해석의 난립 등을 막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성립 초기 가톨릭이 고위성직자 중심의 교회제도를 만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와 중세에는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의 비율이 종교개혁 당시보다 훨씬 낮았기 때문에, 교부를 비롯한 학식 있는 주요 사제를 중심으로 교회제도를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더욱이 기본 교리조차 정착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기본 교리를 정리하고 정착시키기 위해서라는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문제점은 교회가 성립될 당시의 상황에서 고위성직자 중심의 교회제도를 만든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 고위 사제와 일반 사제들간의 성경이해에 필요한 지식격차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고위성직자들의 기득권을 위해 이를 교회제도에 반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교회제도가 일반 목회자 중심으로 변화한지도 이미 수백 년이 흘렀습니다. 대한민국에 기독교가 보급된 지도 백 년이 훌쩍 넘었고, 제자훈련 등 평신도 성경공부가 시작된 지도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또한 고등학생의 대학진학률이 80%를 넘어서는 등 고등교육이 보편화되어 성도들의 지적수준도 많이 향상 되었습니다. 그 결과 과거에 비해 목회자들과 평신도 사이의 성경이해력의 차이는 많이 감소하였습니다. 반면 일부 목회자들의 전횡과 비리 등의 문제가 계속 불거지고, 성경본문과는 별 상관없는 설교에 대한 평신도들의 실망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가나안 성도’의 증가는 더 이상 일방적으로 교육받는 초등학생이 아닌, 함께 고민하는 성인으로 성장한 평신도들이 늘었음을 보여줍니다. ‘가나안 성도’들의 평균 교회출석년수가 14년을 넘어선다는 것이 그 예입니다.

    이를 고려하면 교회제도가 종교개혁을 통해 고위성직자 중심에서 일반 목회자 중심으로 변화한 것처럼, 이제 목회자 중심에서 평신도와 함께하는 형태로 교회제도를 개혁하는 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서평을 쓰신 분은 비판한 ‘가나안 성도’들이 시도하는 여러 공동체의 모습은 새로운 교회제도에 대한 모색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서평을 쓰신 분은 목회자의 권위가 없어질 경우 ‘이단’ 등이 난립할 것을 우려하셨지만, 이러한 우려는 ‘고위성직자의 권위가 없어질 경우 이단이 설칠 것’이라는 논리로 종교개혁 당시에도 제기되었던 것입니다. 이단이 힘을 얻는 근본적인 이유가 형식적인 권위가 약화되어서가 아니라 기존 교회가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임을 고려하면, 평신도와 함께 함으로써 문제가 되는 일부 목회자들의 전횡에 대한 견제가 이루어진다면 이단이 기승도 줄어들 것이라 예상합니다.

    끝으로 서평은 ‘한 기독교 단체의 중견책임자로써 주중에 신앙과 연관된 여러 일을 하고 좋은 신앙양서도 읽으면서,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을 비난하며 윤택한 주일을 도넛가게에서 보내는 가나안 성도’ 보다 ‘그의 아내와 자식들이 다니는 교회의 교회학교 부장집사로써, 한 편으로는 꼰대 같은 사고방식과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졌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두 자녀를 키우고 성가대를 하며 십일조와 기타 헌금을 내면서 주중 월~금까지 세속적인 회사에서 상사한테 욕을 매일 들어먹으며 야근하고 파김치처럼 퇴근하지만 숨 막히고, 위선적이며, 분쟁이 있는 인근 교회를 섬기는 것’ 중 무엇이 더 어렵냐고 하시며, 전자를 후자보다 더 ‘생각 있는’ 신앙인인양 묘사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라고 비판합니다. 저 역시 전자를 후자보다 더 높게 평가할 생각은 없습니다. 후자의 분들이 교회를 위해 헌신하시는 기둥들임을 인정합니다. 다만, ‘두 자녀를 키우고 성가대를 하며 십일조와 기타 헌금을 내면서 주중 월~금까지 세속적인 회사에서 상사한테 욕을 매일 들어먹으며 야근하고 파김치처럼 퇴근하시는 분’이 주일날마저도 ‘숨 막히고, 위선적이며, 분쟁이 있는 인근 교회’를 섬겨야하는 기도록 하는 교회제도는 바꿀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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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든 성도들이 주일까지도 고통스러운 교회에서 섬겨야 하는 현실에 대하여는 저도 공감합니다. 제가 옹호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가르침과 치리를 할 수 있는 교회의 권위이지, 자기 마음대로 성도들을 좌지우지하는 권위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윗분처럼, 두 번째 글을 기다려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귀한 댓글 감사합니다.

  6. 양희송 대표의 책을 저 또한 읽은 후 본 서평을 읽고난 후 저의 개인적인 소견을 적으려 합니다. 많은 논지거리가 있지만 저는 단 한 가지 “제도적 교회”에 대해 서평을 쓴 저자에게 되묻고 싶습니다.
    본인은 본 서평에서 언급했듯이 제도적 교회가 필요한 이유는 죄인인 사람이 교훈과 책망의 메시지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양대표의 입장에서 다시 되묻자면 현재 한국에서 살아 숨쉬며 죄인들에게 영향력을 베풀 수 있고 그들에게 올바른 교훈과 책망을 할 수 있는 곳이 어디있습니까? 그렇다면 본인은 그럴만한 위치에 서 있다고 하시나요? 어느누가 그 위치에 서 있을 수 있나요? 신앙생활 오래 한 목사님이나 장로님이 하실 수 있으신가요?
    양대표의 의견에 힘을 가하자면 양대표는 제도적 교회에 이러한 인간의 타락성이 묻어나기 때문에 직분의 틀을 벗어나 서로가 서로에게 교훈하고 책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커피숍에 앉아 즐겁게 커피만 마시는게 아니라 그 가운데 서로의 인생과 삶을 나누며 고뇌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나누는 시간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서평을 쓴 본인은 이러한 깊이있는 사항들을 알지 못하는 관점 속에서 신랄한 비판만 널어놓은게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한국은 제도를 남용하여 한국교회를 무너뜨렸습니다. 진짜 제도는 단순히 나이가 많아 장로를 세우고 권사를 세우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사람들니 진정한 장로이며 권사입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가 되었다고 권사이고 장로인 제도는 무너져야 합니다. 이 제도 속에서 어찌 죄인인 우리가 생명력을 갖고 살 수 있을까요?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가나안 성도는 현 교회에 대한 극단적 표현이 아닌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모든 썩어빠진 인간들의 본성을 뒤흔드는 작업이기에 거부감이 심각하게 들거라 생각합니다. 부탁아닌 부탁을 드리지면 다시 한 번 본 책을 깊이 생각해보시며 색안경을 벗어놓고 고찰해보시기 바랍니다. (본 댓글을 쓴 본인은 양희송대표와 전혀 관련없음을 피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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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한국에서 살아 숨쉬며 죄인들에게 영향력을 베풀 수 있고 그들에게 올바른 교훈과 책망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냐고 물으셨는데, 저는 오히려 “그런 곳이 없습니까? 단 한 곳도?”라고 묻고 싶습니다. (기준이 다를 수는 있으나) 제가 알기에도 굉장히 훌륭하고 은혜로운 제도권 내의 교회공동체가 많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성경은 제도적 교회를 명했다”고 주장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니 “제도가 없어도 된다”는 주장을 반대할 뿐입니다. 한국교회의 타락하고 무너진 제도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1. 한곳도 없냐는 물음은 너무 우숩네요
        정말 한곳도 없다면 한국땅에 기독교는 사라졌겠죠 비율의 문제입니다 전체적인 분위기 말입니다 얼마 안되는 바른 목회자와 인내심과 겸손으로 무장한 성도들 덕분에 그나마 제도적교회가 유지되고 있는것이죠
        그리고 제도적교회를 개혁해야한다는 정규님의 의견에 어떤 대안들이 있을까요?
        대안이 없는반박만 난무할뿐입니다

        양필자갖밝히듯 대안보다 중요한 문제를 바로보는것이 이책의 목적입니다
        서평에서 대안이 있다고 해서 많이 기대하셨다가 실망하신것같은데 제가볼때 가나안 성도가 대안아닐까요 다른말로하면 이탈을통해 정신차리는 효과말입니다
        기준이 높아져야 할것같습니다 목회자와 교회에대한 기준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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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김요한님 의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1. 비율의 문제는 저도 동의합니다. 좋은 교회는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고, 그것은 아마도 2000년 내내 그랬을 것입니다(시대마다 조금씩은 달랐겠지만요). 제 생각에는 그 비율을 높이는 것이 대안이라고 봅니다. 어차피 제도적 교회가 성경의 명령이라면요.

          2. 제도적 교회의 개혁을 위한 대안은 이미 넘치도록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박영돈 교수님의 ‘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얼굴'(IVP, 2013)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3. 저는 양대표님이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책은 ‘시각’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소개했을 뿐이지요.

          4. 이탈을 통해 정신차리는 효과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도 있고, 의문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제도적 교회 밖에 있어도 된다’는 것을 합리화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습니다.

          5. “기준이 높아져야 할것같습니다 목회자와 교회에대한 기준말입니다” –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2. 교회의 아픔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고 계신 것 같아서 식견이 부족한 사람이라 망설이다 댓글 남겨 봅니다.. 한국은 제도를 남용하여 한국 교회를 무너뜨렸다는 의견에 참 많이 공감합니다. 한국 교회 내에서 교회의 직분에 대한 이해가 봉사와 섬김이 아닌-이것은 사실 유교적 세계관으로 한국 사회 전체의 현상이라고 봅니다만-감투를 쓰는 자리 혹은 더 ‘의로운’ 존재가 되게 하는 자리가 된 모습을 보며 저도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강영환님께서는 이러한 한국교회의 절망적인 현실, 특히 교회 제도가 남용되는 상황 가운데에서 썩어빠진 인간들의 본성을 뒤흔드는 작업이 가나안 성도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원론적인 이야기이고 아시는 이야기이겠지만 그러나 교회 안에서의 직분 특히 가르치는 장로(목사)와 다스리는 장로는 섬기는 직분이지 군림하고 다스리는 직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소위 목회자와 평신도로 구분되고 있는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의 신분(자극적인 단어를 써서 죄송합니다만, 한국 교회에서의 인식이 그렇기에 사용해 봅니다) 역시 평등 합니다. 집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장로와 집사의 직분에 관한 내용이고, 그 직분들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개인적으론 유교 문화의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만- 섬기는 위치인 장로, 집사라는 직분이 벼슬과 같이 이해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더 크냐고 싸우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이 직분을 가졌다고 해서 더 의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평등합니다. 다만 기능, 맡은 역할이 다른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제도적 교회의 제도에 인간의 타락성이 묻어나기 때문에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 양대표님의 논지이고 강영환 님의 논지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죄송합니다. 저는 그 책을 읽지 않아서 잘 모르는 상황입니다. 제가 오해한 것이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맞습니다. 교회의 제도, 직분 만큼 남용되는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제도의 문제일까요? 제도가 바뀐다면, 제도가 개혁된다면 인간의 죄성으로 인한, 교만으로 인해 나타나는 섬기지 못하고 도리어 직분을 남용해서 군림하는 모습들이 교회 안에서 사라지게 될까 저는 묻고 싶습니다.

      또한 이 교회 제도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그 기원이 어디인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신다면 좋겠습니다. 네 저도 참 기성 교회의 답없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교회의 제도라는 것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문제 투성이이고 우리의 탐욕으로 남용되어 누더기처럼 된 이 교회의 제도의 -저는 여기서 한국 교회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리고 제가 속한 장로 교회 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기원이 어디인가 입니다. 제가 알고 배운 바로는 성경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조직, 직분에 대해서 특히 17세기에 치열한 논쟁이 있었고, 성경이 말하는 직분의 체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제도를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사용하고 있구요(권사직은 예외 입니다. 저는 권사직을 성경적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즉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한국 교회 특히 한국 장로교회 조직의 큰 틀은 성경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그 제도를 바꿔서 한국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올바른 접근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제도에 성경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바꿔야 할 것입니다만, 어디까지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직분과 제도를 남용하는 인간의 부패한 마음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 유대교의 제도는 상당히 타락해 있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는 합법적인 대제사장이 아니었으며, 유대의 왕 역시 이두매 즉 에서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개혁이 아닌, 대속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개혁이 아닌 대속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는데 온 힘을 쏟으셨습니다. 공회 앞에서 그들의 부패를 비리를 개혁하고 척결하고자 하시지 않고, 인류의 죄의 문제의 진정한 해결책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당면한 교회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댓글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은 한주 평안하세요~

  7. 저는 대체적으로 이 서평에 동의합니다.
    다른 의견을 가지신 분들과 서평의 저자와의 차이는 결국 현 제도의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 차이에 있는 것 같습니다.
    서평의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제도의 교회에 희망이 있다는 쪽이고,
    다른 의견을 가지신 분들은 절망적이라는 쪽에 가깝지 않나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제도의 교회에 희망이 있다는 쪽입니다. 그 희망의 근거는 제도나 사람이 아닌 교리에 있습니다.
    현 제도의 교회가 아무리 타락을 했어도, 건전한 교리를 붙잡고 있기에 아직 얼마든지 많은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현 제도의 교회와 중세의 구교를 비교하는 것은 사실 어불성설입니다.
    그러한 시각은 사람과 제도만을 보기에 말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종교개혁은 결정적으로 “교리”의 문제로 접근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종교개혁은 실은 종교개혁이 아닌 사회 개혁이라 불러야겠지요.

    1.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시각의 차이가 결국 글의 내용을 좌우한게 맞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교리가 바르다고 해서 희망이 있다는 말씀에는 동의하기 어렵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교리(Doctrine)를 살아있게 만드는 객체(Vessel)는 결국 사람이지, 글이나 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학 서적들과 신학교는 옳은 내용을 가르칠수 있습니다. 허나 그것이 꼭 건강한 교회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교리를 수정함을 통해 사람들이 달라지는 결과를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그 교리를 지키고 삶으로 전환시켜야할 사람들이 그것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말씀이 살아 숨쉬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행하기 때문이지, 성경책 자체가 숨을 쉬며 움직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종교는 글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고 신도들도 있습니다. 만약 신도들을 완전히 배제시키고 종교를 바라본다면 그것은 소설책과 전혀 다를게 없습니다. 사회개혁이라 불러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 사회개혁도 종교개혁에 포함된다는 걸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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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한 의견 감사합니다^^ 종교개혁의 중심이 교리개혁이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직제와 사회개혁도 포함되어 있었지만요

  8. 저도 성경이 “제도적 교회”를 명했다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과 욕망은 제도를 남용하기도 했는데, 겉으로 보이는 성장(?)이 있을 때는 무엇이 문제인지 큰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것이 겉으로 보이는 성장이 멈춘 지금 그 문제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한국교회의 역사를 보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제도적 교회”가 제대로 시행된 적이 있었나 모르겠습니다. 최근 교리 열풍이 불고 있는데, 그동안 교리가 교회 내에서 제대로 교육된 적이 있었나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이 교회 내에서 제대로 가르쳐진 적이 있었나 모르겠습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어쩌면 교회 내의 교육 수준과 의식 수준이 올라간 지금에 지금의 “가나안 성도” 현상이 나타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제도적 교회”를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분명 제도적 교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문제점이 무엇인지 드러났기에 그것에 대해 우리가 고민하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회가 무엇인가, 직분이 무엇인가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제도적 교회를 바르게 세우기 위한 자기부인과 헌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론만 안다고 해서 그 공동체가 바르게 세워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바로 서서 자기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순종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현재 제도권 교회 내에서 성도들이 얼마나 고통당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기복신앙적인 말씀 앞에 두려움과 공포로 신앙생활 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진정한 기쁨을 주는 것은 제도적 교회가 바르게 세워지고, 직분이 바르게 시행될 때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인간은 약간의 틈이 주어지면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인간의 영혼을 위해 더욱 더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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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제도적 교회의 일원으로써, 섬기는 사람으로써 죄송함과 책임감을 느낍니다. 저 같은 사람부터 회개해야겠지요T_T

  9. 이민 교회에서 몇번의 방황을 한 끝에 더 이상의 희망을 갖지 못한 체 로칼 교회에 출석 중 입니다. 특히 한국 이민 교회에서는 로컬 교회에 출석하면 그 자체를 가나안 성도로 간주해 버립니다. 선생님의 주제와는 안 맞을 지도 모르겠지만 가나안 교인으로 간주되어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아갑니다. 교회를 나오면 이민 사회 (제도권 사회) 그 자체에서도 제외되기 때문 입니다. 한번의 예배라도 기쁨으로 드리고 싶어 택한 것으로는 많은 댓가를 치루게 되지요. 왜 제도권 안에서 개혁을 시도치 않느냐구요? 지금 저희 부부 위치에서는 어쩌면 개혁을 시도하는게 더 당당하고 용기 있어 보일 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너무나 많은 개혁, 또는 수구를 가장한 세상보다 더 세상적이고 비열한 진흙탕 싸움을 바왔던 우리는 그 자체를 거부했습니다. 말 그대로 교권이 “권면과 대화”를 선전포고로 받아 들이는 순간 우리는 조용히 나왔습니다. “조용히”란 내 등뒤의 온갖 추측과 루머를 남겨 둔 체로 란 말이겠지요. 가나안 교인들 중 저희와 비슷한 이유를 가지신 분들 많을 것 같습니다. 남아 있는 것과 떠나는 것 , 어떤 것이 옳다 말 할 수 있나요? 모두 각자의 마음의 빚과 짐이 있을 것 입니다. 누구의 신앙이 더 좋다 말 할 수 있는 문제입니까? 오직 판단은 주님께 달려 있겠지요. 그러나 단언컨데 개혁을 하기위해서도 아니고 다만 오랫동안 유지해온 인간 관계를 깨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지금의 ‘출석’을 고집하고 계시다면 , 가나안 교회의 고립된 상황에서 맞볼 수 있는 주님과의 은밀한 교제를 시작해 보시라고 과감히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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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감합니다. 특히 “말 그대로 교권이 “권면과 대화”를 선전포고로 받아 들이는 순간 우리는 조용히 나왔습니다.”라는 말에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그러나 단언컨데 개혁을 하기위해서도 아니고 다만 오랫동안 유지해온 인간 관계를 깨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지금의 ‘출석’을 고집하고 계시다면 , 가나안 교회의 고립된 상황에서 맞볼 수 있는 주님과의 은밀한 교제를 시작해 보시라고 과감히 권하고 싶습니다.”라는 말씀도 동의합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10. 저자는 경직된 제도 대신 필요한 것으로 “기독교 생태계”를 제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양씨가 세속성자 수요모임을 대안이라는 듯이 엄청나게 홍보한 것처럼 서평을 쓰신 느낌이 있는데, 사실 그렇지는 않았죠? 기독교 생태계가 가능하겠느냐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자기가 하고 있는 운동을 소개하는 맥락이었던 것 같은데요.

    대안 얘기를 하셨는데 양씨는 대안을 만들어나가는 운동에 동참하고 있으며 시작 단계입니다. 대안이 필요하긴 하지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때깔나는 대안을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고, 대안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이 있죠. 현재 제대로 된 대안이 없다고 해서 폄하하기 이전에, 대안을 만들어나가는 중이라면 더 지켜볼 필요도 있구요.
    (보다 근원적으로는, 피해자에게 대안을 요구하는 건 사실은 순 엉터리 아니냐고 되돌려 여쭙고 싶지만, 원글쓴 님은 가나안 성도들은 ‘피해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 이 질문은 접어두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지방에서 토요일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열심히 노동하는 20대 중반 평신도입니다.
    한번 더 성도들을 살펴 보시고, 목회자의 마음으로, 성도들이 겪고 있는 구조적인 한계와 그에 대한 답답함을, 깊이 공감해 주시는게 먼저가 아닐까 싶어 씁쓸합니다.
    영미권에서는 한물 간 논의의 흐름이라고 평가하신 가나안 현상은, 어쨌거나 현재 한국 교회의 커다란 “현상”입니다.
    글에서의 표현처럼 위협하자는 게 아니라요, 목회에 종사하시는 “당사자” 입장이시라면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는 상황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권징과 치리가 제대로 가능한,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제도를 만들 책임은 1차적으로는 기성 목회자 그룹에 있습니다. 가나안 “성도”에 대한 책에 대한 서평으로 “제도는 성경적인 것이니 제도를 개혁해보자”는 내용이 주가 되는 글을 작성하는 건, 오독 아니면 책임설정의 오류입니다. 거칠게 말하면, 이 글은 블로그가 아닌 일기장에 쓰셨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글만 읽었을 때는 후속편이 나올줄 몰랐는데 관련된 글을 하나 더 쓰신다고 하니, 챙겨서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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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귀한 의견 감사합니다.

      1. 우선, “한번 더 성도들을 살펴 보시고, 목회자의 마음으로, 성도들이 겪고 있는 구조적인 한계와 그에 대한 답답함을, 깊이 공감해 주시는게 먼저가 아닐까 싶어 씁쓸합니다.” –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2. 저는 ‘당사자’ 맞습니다.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것도 물론 맞습니다. “먼저 사과부터 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는 것이라면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다만 사과를 먼저하지 않은 것은 제가 ‘기성 그룹’을 대표할 권한이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사과를 먼저 하지 못할 것이라면 이런 글도 쓰지 말았어야 했다”라면 마찬가지로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것이 없네요(비꼬는 것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3. 다만, 현 한국교회의 상황,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제도적 교회 내에서 고통받는 현실을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매도받는 것은 좀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저도 그 고통을 겪었고, 그 대안으로 ‘바른 제도적 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개척을 한 목회자입니다. 저는 대안이 ‘좋은 제도적 교회’라고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저는 “양씨가 세속성자 수요모임을 대안이라는 듯이 엄청나게 홍보한 것처럼” 말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양대표님의 책을 보고 찾을만한 대안은 수요모임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쓴 것일 뿐이지요.

      4. 저는 대안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이 책은 뒷표지의 몇 몇 분의 추천처럼 대안을 말하는 책이 아니고, 가나안 현상을 보는 한 ‘시각’을 말하는 책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입니다(굳이 제가 비판을 했다면, 추천사를 비판한 것입니다). 즉, 책 소개를 한 것일 뿐입니다. 저는 대안이 없는 글이 가치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상을 바라보는 한 시각으로도 충분합니다. 다만 그 ‘시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지요.

      5. 다만, “제도는 성경적인 것이니 제도를 개혁해보자”라는 주장은 굽히지 않겠습니다. 이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신다면 논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6. 후속편은 원래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지만, 저는 이 글이 이토록 많은 반응을 얻게 될지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글이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에라도 후속편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 일부분에서 한발을 빼셨네요. 2번의 ‘대표할 권한’이 없다고 봐서 사과를 안했다는건 글의 태도와는 전혀 맞지 않는 변명이라고 봅니다. ‘내가 그런걸 책임질 깜냥이나 되느냐’라는 류의 사회 지도층이 자주 하는 흔한 변명이죠. 책임감은 내가 있는 위치와 영향력에 비례하는 것만은 아닐텐데요?
        그리고 3번처럼 억울하시면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태도가 글에 조금이나마 나타났을텐데, 정말 억울하신거 맞는지 다시 한번 되묻고 싶습니다.

        5번처럼 확고한 생각을 갖고 계신것은 존경합니다만, 빤히 보이는 면피성 항목은 별로 보기 좋지 않네요. 다수의 독자가 비슷한 댓글을 남겼다는건 목사님이 은연중에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과 가나안 성도들을 그런 스탠스로 대하고 있다는 뜻도 될 수 있겠지요.

        여튼, 대화하시려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건강한 목회 하시길 기원합니다.

      2. 거친 의견에 잘 대답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대표로 사과를 요구했다거나 하는게 아니라 책임의식을 요구한 건데, 개척 목사로 계신 상황이면 제가 할말이 없고 부끄럽긴 하네요~ 건강한 교회를 개척하시길…

        저도 제도가 무쓸모하다는 생각은 아닙니다. 좋은 제도가 있으면 거기 편입되고 싶기도 해요. 현재도 제도권 교회 내에 있구요. 다만 현실 인식의 차, 시각차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은 후속편을 읽어보는게 먼저라는 생각이 드네요.
        “심정적 가나안” 근처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만큼 이쪽과 저쪽이 이야기를 다 들어보고 싶습니다. 개혁주의 진영 목회자들의 생각도 궁금하구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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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교회의 개혁에 관심이 많은 성도 입니다. 틀림없는 것은 지금의 한국교회는 진실된 크리스챤이라면 “이건 아닌데”라고 한번쯤 회의를 품게 하는 상황은 틀림없는 거 같습니다. 단, 예수님은 교회의 형태와 조직에 대하여는 어떤 언급되 안되었다는 면에서 우리가 꼭 거대한 제도가 필요한지는 생각해 볼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두세사람이 내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중에 있느니라(*마 18;20)” 에서 예수님은 진실한 믿음의 자들의 모임에 함께 하십니다. 즉, 2~3 사람도 교회의 최소 공동체 단위가 될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면에서 한국교회는 새로운 터전위에서 새로운 성령으로 새롭게 탄생하려는 일단의 몸부림이라고 볼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일각 대형교회에서는 잘못을 지적하거나 고치자고 하면 또는 기존의 교회 정책에 반대면, 무조건 종북이나, 사탄, 이단으로 취급하는 것또한 심각한 한국교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교회를 종교권력으로 여기는 분들도 많은 것이 사실이구요 그것이 지나치면 예수님이아닌 일개 목사의사이비 종파로 치우치는 경향이 더욱더 위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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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한 의견 감사합니다.^^

      1. ‘이건 아닌데’라고 회의를 품게 하는 상황 이상이지요. 슬픈 일입니다. 거의 무너졌다고 보아도 될만큼 고통스러운 처지이니까요. 게다가 “기존의 교회 정책에 반대면, 무조건 종북이나, 사탄, 이단으로 취급하는 것또한 심각한 한국교회의 문제”라는 것 또한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권위의 타락.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2. 다만 서신서에는 여러 ‘제도’들을 명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컨대 장로와 집사와 같은 직분들 말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2-3사람도 충분히 교회가 될 수 있으나, 그 안의 어떤 제도도 없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후에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3. 앞으로도 계속 교회 개혁에 관심을 많이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사실 (어쩌면) 한국교회는 ‘위로부터의 개혁’은 틀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3. 반가워요~^^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직분은 각 지역적인 특성과 배경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제도화가 된 듯합니다
    성경은 제도화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하나님의 나라와 더불어 그의 따른 공동체를 바르게 다스리기 위한 직분의 당위성과 그의 따르는 자격에 대해 논의 된것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에베소서의 말씀처럼 목사와 교사는 성도들을 온전케함과 동시에 봉사의 의무를 다할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성도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앙을 돕는일에 직분자가 필요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제도와 직분에 대해서 다시 논의가 되었으면 좋겠고 가나안성도는 한국교회의 잘못 인식된 제도와 직분자의 도덕성 때문에 발생된 또 하나의 대안이 아닐까요?
    하지만 가나안성도들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정확히는 알수없지만 교회안의 직분자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이는 또 하나의 오류가 발생되지 않을까요? 정규동역자의 글에 공감이 많이 되는것도 있지만 반면에 교회안의 직분과 제도와 교인들의 관계에대해 좀더넓은 이해로 평을 쓰셨다면 읽는이로 하여금 더 좋았을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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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함 의견 감사합니다^^

      1 ‘공동체를 바르게 다스리기 위한 직분의 당위성과 그의 따르는 자격’을 제가 ‘제도’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것이 꼭 장로교나 침례교, 감독교회 중 어느 하나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2. “목사와 교사는 성도들을 온전케함과 동시에 봉사의 의무를 다할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성도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앙을 돕는일에 직분자”여야 한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지 않는 목사를 그렇게 살도록 개혁해야 하겠지요. 말씀하신대로 ‘직분자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절실합니다.

      3. 가나안 성도들이 대안이라는 것은 모르겠습니다. 그 현상을 인정하고 안타깝게 여길 수야 있겠지만, 저는 아무래도 ‘현 교회의 개혁’이 더 나은 대안이라고 봅니다.

      4. 동역자라 불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마음이 기쁩니다^^

  14. 가나안 성도의 대안은 신약성경의 교회를 만들어 가는 개 교회의 개혁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가나안 성도들도 그런 노력을 통해서 교회 안에 머물 수 있고 마땅히 머물러야 하는 것이 성도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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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교회의 제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하다고 봅니다. 제도 운용의 구체적인 내용은 부족한게 사실이지만 직제, 역할, 권위에 대하여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현시대 한국교회 타락의 해결책으로서 제도적 개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제시하는 교회의 제도에 대한 가르침이 그렇게 깊이 숙고해야 할 만큼 심오하거나 모호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이미 상당한 성경 지식의 보급이 보편화되고 그것들은 충분히 해석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현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그밖의 기독교 선진국에서 그러한 지식에 뒤따르는 개혁의 노력도 함께 지속되어왔습니다. 그것들이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주목받을 만한 이슈의 것으로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 이든지 혹은 전혀 주목받지 못한 것이든지 말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가 처한 문제에 그런식의 소위 개혁주의적인 접근법?은 역설적이게도 성경이 말하는 교회 본연의 가치에 미치지 못 하는 우리 각자의 모습에 대한 반성을 가로막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미 문제의식에 대하여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충분한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 권면하는 말씀에 대한 지식역시 갖추고 있습니다. 말씀을 놓쳤다고 하기에는 이러한 문제의식과 관련한 성경지식은 명쾌하고 객관성이 있습니다. 성경에 감추어진 뭔가 심오하고 감춰진 진리를 놓쳐서 한국교회가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명백히 말하는 교회제도에 대한 완전하고 신성한 지식이 우리의 무지따위나 고의적, 또는 부지중일 지라도 원죄에 물든 의지가 작용하여 그 말씀을 곡해하도록 한 것이다 라는 식의 억지 경건스런 표현은 너무싫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분명 다스리는 직분과 함께 그들의 권위까지도 함께 인정하고 있음이 성경입니다. 이 시점에서 직분의 존폐문제나 권위의 범위를 논하는 것이 가한 것일까 의문입니다. 그 것의 존폐문제는 당연할 것이고 그 권위의 범위를 논함에 있어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권위가 소수가 아닌 다수에게 중심이 실려야 한다는 식의 제도개혁의 제안은 평등을 교회구조속에 구체적으로 실현한다는 점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공동체 모습의 본질에 가깝지 않은가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과연 그러한 방식의 권력분할이 성경에서 제시하는 교회다스림의 방법일까 하는 것 입니다. 가르침과 권징의 권위가 그렇게 한 교회안에서 넓은 분포로 분할된다면 궂이 소수의 직분자를 세우는 일이 의미가 있을까요. 또한 성경은 분명 소수의 다스리는 직분자들에게 권위를 두고 그것에 순종하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두서없이 썼습니다만 문제의 본질은 직분제도의 문제점보다도 훨씬 기본적인데 있다고 봅니다. 대부분의 화살과 비난이 담임목사와 권사장로들에게 가는 것이 당연하기도 하지만 내심 불만스럽습니다. 한국교회의 기형성은 특정 권력층이 조장했다기보다 부패한 결과물속에서 그들이 기득권층이 되었을 뿐이라 봅니다. 목사와 장로는 타락했고 성도들은 일방적으로 상처만 받은 피해자들일 뿐임이 한국교회입니까. 아니오. 정신차립시다. 큰 교회 목사와 돈좀 굴리는 장로들을 욕하기 바쁜 우리의 이면에는 권력자들에게 잔뜩 짐을 지워놓고 성도 개개인 스스로는 거룩한 짐을 거부하는 이중적인 잣대가 있습니다. 물질문제와 성적 정결의 문제는 목사장로라서 더 해야하는 것도 아니고 평신도라서 덜 해도 되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도’로서 짊어져야 하는 문제이지 ‘직분자’로서 짊어져야만 하는 성질이 절대로 아닙니다. 디모데서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직분자로서의 조건은 ‘성도’로서 ‘모범이 되는 수준’의 성화를 요구함이지 평신도와는 다른 수준을 요구함이 아닙니다. 솔직해집시다. 목사장로가 아니더래도 기독교인이면서 돈 벌어 쓰는 맛에 인생살고 포르노 못 끊고 사는 사람 부지기수입니다. 과거의 신앙의 선배들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지금의 교회권위자들의 부패함이 그 권위밖에 있는 우리와 달리 유별난 것 이던가요. 성도가 성도다웠다면 지금의 교회는 지금같지 않았습니다. 본래 있는 사람중에서 신앙좋고 충성된 사람들 뽑아놓은 사람들이 직분자들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다수의 이목속에서 그들의 사생활이 드러났음에 그들의 죄목이 더 커 보이는 건 아니구요? 다수의 정직한 사람속에서 소수가 더욱 정직하게 직분을 수행하는 것이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다수의 감추어진, 부정직한 신앙인들 속에서 극소수가 정직하게 직분을 감당하라고 등떠미는 태도부터 반성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문제제기의 끝에는 항상 권력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손가락질의 강도가 센 순위로 댓글 호감이 찍힙니다. 교회가 갖는 가치의 본질은 성도 개개인 각자의 구체적인 삶속에 그리스도의 생명과 말씀을 침투시킬 만큼의 역량을 갖도록 힘쓰는 일을 목적으로 촛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결코 성과주의나 숫자적 팽창을 옹호하고자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이 거룩한 양심으로 깨어있는 신앙인에게는 분명히 성경적인 비전이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성도의 성도다움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회복이 우리가 늘상 말하는 한국교회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는 빼앗기거나 그 어떤 부패함에 병든 권력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나라가 이땅에 비추어지는 그림자라 하지 않습니까. 목사장로 손가락질한다고 하나님나라가 개혁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가진 권세따위(부패하였다면) 이미 하나님나라에 미치지 못 하는 세상권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것들에 대하여 침튀기며 분개함보다 우리에게 시급한 것들, 소중한 것들과 스스로의 본분에 충실함이 교회개혁의 열쇠라 믿습니다. 목사장로는 교회를 위한 도구일 뿐 그 조직의 어떠함이 교회가 아닙니다. 성도로서의 우리 하나하나가 교회이며 하나님의 목적이며 교회입니다. 말이 길어져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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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문의 댓글, 귀한 의견에 감사드립니다.

      1. 여러모로 동의합니다. “한국교회의 성도의 성도다움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회복이 우리가 늘상 말하는 한국교회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 한다는 것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만 제 생각에는 직분자들의 개혁은 훨씬 더 시급해 보입니다.

      2. “목사장로는 교회를 위한 도구일 뿐 그 조직의 어떠함이 교회가 아닙니다. 성도로서의 우리 하나하나가 교회이며 하나님의 목적이며 교회입니다” – 아멘.

  16. 교회론도 이제 세상 철학의 한 흐름처럼 ‘포스트모던이나 해체주의’로 치닫고 있군요. 교회는 해체가 되어도 결국 주님은 자신의 계획대로 교회를 교회로서 그 기능에 합당하게 세우시리라 봅니다. 인간은 타락했다면 그들이 속한 제도와와 직제 또한 아픔이 있지 않겠나요. 제도에 대한 완전성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참으로 오류요 인간을 과대하게 평가하는 것 또한 잘못이라 봅니다. 목회자와 장로, 집사, 교회 문턱에 걸터 앉아 있는 이도 마찬가지라 봅니다. 모두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제도권 안이나 밖이나 죄에 노출되어 있고 죄 아래 있다면, 보다 합리적이고 변화 가능성이 있고 위험성을 극소화 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제도적 교회가 필요하지 않겠나요? 좋아서가 아니라 최소한의 진리를 보수하고 유지하고 개진하기 위해서 말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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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한 의견 감사드립니다^^

      “제도권 안이나 밖이나 죄에 노출되어 있고 죄 아래 있다면, 보다 합리적이고 변화 가능성이 있고 위험성을 극소화 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제도적 교회가 필요하지 않겠나요? 좋아서가 아니라 최소한의 진리를 보수하고 유지하고 개진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인간은 죄인이라서 죄를 짓고, 그래서 제도교회는 타락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죄인이라서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17. 정규형 고생이 많습니다.^^.
    괜한 일 했나 많이 부담도 되시겠지만
    내일이 아니니 난 그냥 내것만 하리라 식도 별로 인듯합니다.

    아무튼 형의 글로 이 책이 많이 홍보가 되었을 것 같네요^^
    윈윈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양희송 대표님께서 제가 최근에 본 쿼바디스에서 나오셔서 반가웠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분이지만요^^

    바른 교회를 함께 세워나가봅시다^^

  18. Pingback: 가나안 성도의 신앙은 정당한가? – 양희송의 ‘가나안 성도 교회밖 신앙’을 읽고 | SomeSpringDay

  19. 혹시 재규님의 다음글은 어디서 읽을 수 있나요? 이 사이트에 업데이트가 안 된건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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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아직 후속글이 안올라온 거 같아서 이렇게 제 생각을 남깁니다.
    저는 30대 중반에 평신도입니다. 미국에 있는 이민교회에 다닌지 이제 어언 5년차가 되어갑니다. 위에 쓰신 댓글들을 어제오늘 2번이상 찬찬히 읽어보았습니다. 굳이 제게 시각을 요구하신다면, 저는 변화중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 개인적인 배경상 저는 목사님들의 시각에서,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을 비판해오던 사람입니다. 제 부모님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셨고, 나름 제 집안이 기독교집안이고, 심지어 아버님이 늦게나마 신학을 공부하셔서 저는 항상 착한 기독교인(진정 착하다는게 아니라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에 충실했던..)이었습니다.
    아직, 양희송대표님의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여러 유투브 영상과 CBS 방송등을 통해 그 분의 의견을 섭렵하였습니다. 솔직히 양 대표님이 강연하신 영상 특히 장신대 특강에서 하신 것을 보면, https://www.youtube.com/watch?v=-WDiwtEPvtY (정규님이 꼭 보셨으면 하네요) 양대표님은 현 기독교제도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네요.
    본론으로 들어가서, 성경에서 제도화를 명했다는 것에 저는 동감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두 세사람 모인 것이라는 것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편입니다. 심지어 한국에도 미자립교회(교인수가 20여명 이내에 재정적으로 자립이 어려운교회라는 뜻) 작은 교회가 90프로에 육박한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아마 정규님은 아실 것이라 믿습니다. 이민교회는 대부분 미자립교회입니다. 소위 대형교회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미자립교회입니다.
    이런 교회에서 성도들이 무자비하게 봉사에 희생당하고 양육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상황속에서 아쉬움들은 그저 같이 봉사하는 몇몇 성도들과의 교제로 채워지기 마련입니다. 저의 경우도 개인적으로 선교단체 (CCC나 IVF 등)의 모임을 찾아다니거나, 또래들을 찾아 방황도 해보았고, 정말 뜻있는 청년들을 찾아다니며 위로를 얻곤 했습니다.
    이민교회에서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원래 이렇게 신앙생활이 어렵고 힘든것인가?라는 질문을 반문해봅니다. 제가 한국에서 교회 다니는 때에도 그렇게 신나고 행복하지는 않았던 거 같지만, 이민교회는 정말 만만치 않은 도전이 됨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긋지긋해서 떠나는 가나안 성도들을 십분 이해합니다. 차라리 내 신앙을 잘 챙기고 내 가정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너무 아프게 공감이됩니다.
    너무 글이 길어지는거 같아서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곳에 꼭 목회자나 장로, 집사의 직분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찬양을 인도하고, 누구나 말씀을 서로 나눌 수 있고, 함께 헌금을 해서 선교에 후원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런 것에 기본이 되는 것을 배우고 훈련할 수 있는 단체가 점점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꼭 목사님을 초빙하고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그만두고, 뜻있는 성도들끼리의 모임을 통해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뜻있는 곳에 후원할 수 있는 교회들이 생기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가 싶습니다.
    제 생각에 대한 비판과 의견도 즐거운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p.s. 참고로 블로그에 올린 댓글을 수정할 수 있게 해주시면 좋겠네요^^ 오타나 지울 필요도 있을 거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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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원님 귀한 의견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답 늦어서 죄송합니다.

      1. 양대표님의 영상은 챙겨 보겠습니다. 소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 저도 이제 간신히 미자립을 벗어난 개척교회의 목회자입니다. 모를리가 없지요. 말씀하신 “이런 교회에서 성도들이 무자비하게 봉사에 희생당하고 양육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상황속에서 아쉬움들은 그저 같이 봉사하는 몇몇 성도들과의 교제로 채워지기 마련”이라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나 보고자, 저도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아직 여러모로 모자란 목회자가 훌륭한 성도들을 만나 즐겁게 목회하고 있습니다.

      3. “지긋지긋해서 떠나는 가나안 성도들을 십분 이해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괴롭지만요. 많은 지역 교회들이 “차라리 떠나는 것이 신앙에 도움이 되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괴롭습니다.

      4. 성경이 제도를 명했다는 것은, 다음 글에 그 ‘성경적 근거’를 밝히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준비 기간이 길어져서요. 저는 말씀하신 ‘대안’이 정말 마음에 들지만(“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하), 그게 성경이 말한 바와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글을 읽으시고 더 토론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p.s. 블로그 덧글 수정은 제 권한이 아닙니다. 그러나 조만간 운영자를 협박(?)해서 기능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1. 이정규 강도사님.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요즘 힘든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조금 과격하게 글을 쓴 감이 없지 않아 있네요. 개척하신 교회가 주님이 보시기에 시원하게 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양희송씨도 가나안 성도들이 제도권 교회로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책을 낸 것이라고 저는유추하고 있습니다.
        다음 글을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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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격하긴요. 너무나 신사적이고 부드러운 댓글에 감동했었습니다^^ 귀한 의견 너무 감사드리구요. 두 번째 글 올리면 또 고견 남겨주세요.

  21. 가나안 성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부득불 리더쉽과 이에 따른 한국교회의 문제점에 대한이야기를 언급을 하고자 합니다. 저는 목사,장로님들만이 한국교회의 잘못된 점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공동체 속에서 각각 부름 받은 성도로서 마땅히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간단한 예로서 가정에 대한 1차 적인 책임은 가장에게 있듯이 현재의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먼저 리더쉽에 물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여러가지로 타당하다고 봅니다. 성경에서도 신약,구약 모두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간 리더일수록 일반일 들과는 다른 기준으로 심판하실 것을 언급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몇몇 존경하는 목회자님들은 문제의 책임을 먼저 리더쉽에서 찾으시는 것은 맞다고 봅니다. 그러나 대부분 교회에서는 문제의 본질을 위한 해결을 다른쪽으로 분산,회피 등으로 리더쉽이 아닌 다른 곳으로 전가 시킴니다. 심지어 양떼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신성한 설교 시간을 자신의 방패막이 변론하는 시간으로 또는 자신과는 다른 반대파를 공격하는 데 설교를 이용하는 상당수의 목사님들을 보면서 통탄을 금치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먼저 고백하는 리더쉽은 거의 본적이 없구요…그리고 저는 영어예배를 참석하면서 외국 목회자들과도 여러번 의견을 나눈적이 있는데…몇몇분은 한국교회의 리더쉽의 한개인의 목회자에 대한 권력이 초법적 쏠림 현상에 대하여 놀라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런 한국교회의 한 목회자에 대한 초법적 권략의 쏠림현상은 토착화된 유교문화에 기독교문화가 뿌리를 내리면서 생겨난 한국적 기형적 문화라고 생각하며 또 반드시 앞으로 개선되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로 이어지며 이것은 나중에는 목회자 자신에게도 치명적인 독이 되어 돌아옵니다. 즉, 공동체를 위해서도 , 목회자 개인을 위하여도 과다하고 초법적 권력은 결코 좋은 것이 될수 없습니다.
    또 주변에 리더쉽을 도와주는 모든 직분자들도 이것을 명심하여 오직 목회자는 깨어있는 기도와 깊은 영성으로 양떼들에게 하나님의신령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만 집중할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현재 한국교회의 모습은 교회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 못하고 분별없고 맹신하는 성도들과 이를 분별없이 좋아하고 받아들인 목회자들의 합작품이라고 생각할때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결론은 한국교회의 올바른 모습으로 나아가려면 최대한 교회내의 권력을 분산하며 어느 한 개인에게-목회자든 장로이든-쏠림이 없는 그래서 오로지 받은 은사대로 섬기며 이것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때 비로서 주안에서 한몸된 아름 다운 공동체가 실현 된다고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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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말씀을 덧붙일 것이 없네요. 구구절절이 동의합니다. 특히 “최대한 교회내의 권력을 분산하여” 부분에는 처절하게 동의합니다.

  22. 강도사님의 글에 공감합니다. 2010년도에 캐나다에서 선교사들과 일년동안 공동체 생활하면서 만나게됏던 한 선교사님 가정이 생각났습니다. 그분은 캐나다에서의 다문화교회 개척을 준비하신다고 하여 저와 얘기를 많이 나눴지요. 생각도 깊으신 분이셨구요 근데 그분이 꿈꾸는 교회는 house church 였습니다. 그 개념이야 다들 다르겟지만. 그분에 의하면 목사나 직분자 없이 그리고 특정 예배시간없이 성도의 교제자체를 교회의 모든 것으로 보더라구요.

    그후 한국에서도 가정교회라는 얘기는 많이들었지만. 지금 가나안성도의 흐름이 그런 house church 개념과 맞아떨어지지 않을까싶네요. 한국교회와 목회자들 직분자들의 큰 잘못을 통회합니다. 제가 속한 교단의 병폐도 그렇구요 ㅜㅜ 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가야할 길은 제도적 교회를 버리는 것이아니라 개혁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저도 그 실천을 저의 자리에서 하려하구요.

    귀한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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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귀한 의견 감사합니다^^ 사실 속해보면 가정교회나 대안공동체 같은 모임이 더 좋기는 합니다. 리더격인 사람이 경건하고 상식적이며, 서로 상당히 친하다는 가정 하에서요. 저도 그런 모임에 있어본 적이 있습니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문제가 발견되었고, 결국은 제도적 교회가 가지고 있는 모습(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을 향해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늘 결국은 개혁이 답이 아닌가 싶습니다.

  23. 저는 제도에 대한 어떤 명령이 있다 없다 이 주제는 사실 비껴 가고 싶습니다. 물론 이 장이 그것을 논하기로만 했다면 죄송하구요…서신서 보다는성경에서 예수님은 2 가지를 언급하지 않으셨다고들 합니다. 첫째는 교회의 형태나 제도 대한 것이구요 다른 하나는 전도의 방법에 대한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저는 첫번째 교회의 형태나 제도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유에 대하여 저는 나름 2가지로 해석하여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각 나라마다 모든 상황(*정치적,경제적, 문화적배경등)이 다르므로 교회의 형태가 다르게 나타날것을 이미 전제로 하셨다고 생각이 되구오 다른 하나는 그 것은 각나라 혹은 그 상황에 맞추어 우리들에게 위임하신 것이 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중요성에서도 본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진짜 중요한 것 핵심적인 것이라면 예수님은 반드시 언급하셨을 것입니다. . 예를 들어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에 포로생활을 할떼에는 대다수 가정교회(*home church)의 형태로 신앙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국이나 북한도 지금 이런 지하교회의 형태로 예배를 드리고 있구요 반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국가는 제도적인 것이 효율적이라면 제도적인 또는 대형교회도 등장할수도 있는 것이지 그것이 명령에 입각한 것으로 본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라고 봅니다. 그것은 반대로 가정하여 보아도 더욱 명백히 드러납니다. 만약, 교회에 대한 구체적인 제도나 규칙을 정할경우 향후 복음이 전세계로 퍼진다는 전제를 하고 볼때…그것은 각 나라마다 문화나 사정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것인데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또 규정할 필요가 없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쉽게 누구나 알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비유를 많이 쓰신 이유처럼 명백하다고 봅니다. 바빌론 유수시대에 조직적인 교회가 될수도 없고 필요치 않은 것처럼-포로신분이기 때문에 , 조직적인 교회가 어려울때는 가정교회가 또 다른 남은자로서 그루터기의 역할을 할수 있는 대안이 될수 있다고 보는 것이 더욱더 성경적인 유연한 사고라고 생각됩니다. 현재로서는 조적이나 제도적인 교회가 개혁의 면에 있어서 많은 점이 보완이 되어야 한다면, 또 부족한면이있다고 전제하면 또 제도적인 교회가 온전하여 질때 까지 가정교회가 더 성령의 사역을 잘 수행할수 있다면 또 대안이 될수 있다면 당연히 그 역할을 해야 하는 시대적 사명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꼭 제도 안이나 밖이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또 명령이다 아니다 가 아닌 것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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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Pingback: 가나안을 양산한 ‘교회’는 정당한가? -교회를 떠나 가나안으로 간 당신에게 | 진짜배기

  25. 가나안 성도를 읽지는 못했지만 제가 생각하고 있던 교회의 본질에 관한 고민에 대해서 또 다른 깨달음을 주신것 같아 감사합니다. 저는 기성교회의 구조적인 형태 자체가 문제일 것으로만 생각하였기 때문에 가정교회만이 대안이라고 생각해왔었습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문제들이 야기될수 있다는 것에 대한 생각은 못해본것 같네요.

    덕분에 좋은 문제들을 떠안게 된것 같아 감사드립니다. 해결방안을 찾고 말씀하신대로 늘 개혁을 시도하는 교회가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1. 저도 아직 책을 읽지못했는데, 오늘 구매했네요.
      몇몇 분들은 양희송씨가 너무 과격하다고 하시던데, 한번 정독해보렵니다.
      어쨋든 큰 질문을 성장위주와 권위주의적이었던 한국교회에 던져주고 모든 성도들에게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26. 댓글을 읽다 보니 ‘제도적 교회’ 라는 용어가 명확히 정의되지 않아서 같은 용어로 다른 것을 가정하며 의견을 나누는 느낌이 듭니다.
    ‘제도적 교회’ 라는 용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은사에 따른 직분과 그에 따른 권위를 의미한다면, (저를 포함해서) 많은 분들이 ‘제도적 교회’를 성경이 요구하고 있다는 데에 동의하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도적 교회’ 라는 용어가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직분과 권위를 세우고 조직하는 특정 방식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성경이 요구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직분과 권위를 세우고 조직하는 방식은 성경적 원리를 따라야 하겠지만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나안 성도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다 이제는 안 나간다는 사실만 공유할 뿐 그들의 생각과 상황은 다양할 것입니다. 편의상 가나안 성도라고 부르고 연구할지라도 그들에 대한 처방과 도움은 그들의 상황과 생각과 신앙 상태에 따라 다양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획일적으로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그들에게 접근하기 보다는 내 주변에 있는 가나안 성도의 상황과 이야기를 듣고 서로 도울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게 현실적으로 보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는 ‘잃어버린 양’이라는 일방적인 모습만이 강조되고 있는데, 가나안 성도를 실제로 구성하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포용적인 자세가 조금 더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27. 마지막 댓글이 4년전인데 이제와서 뒷북인 듯한 느낌도 없지 않지만 흘러흘러 여기까지 오게되어 여러 좋은 의견들을 보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하고 글 남겨 봅니다.
    사십 평생 교회를 한번도 떠난 적 없지만 지금 가나안 성도의 문턱에 한쪽 발 걸친 사람입니다. 반평생이상을 미국에서 살면서 거의 대부분 이민교회에서 섬겼고요 학생때는 청년부라는 테두리안에서 보호(?) 받아 느끼지 못했던 목회자, 교회의 부조리들에 지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사실 죄로 따지자면 저같은 죄인이 또 없을 것이니 누구를 정죄하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그동안 대부분 좋은 교회들만 거쳤음에도 제가 교회에 (미국 이민교회 한정입니다 – 하지만 여러면에서 아마 한국교회와 비슷할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막오신 분들이 많고 교회 문화도 그분들 위주로 자연히 형성되고요) 지친 이유를 조금 나눠보자면 첫번째는 단체주의입니다. 한국의 문화가 그렇겠지만 목사님이 제시하는 목회비전에 일사불란하게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 직진하는 문화를 선호하여 저같이 어렸을때 미국에 와서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은 굉장히 힘이 듭니다. 항상 겉돌게 되고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고 (이건 성격적인 면도 있을 겁니다만) 모임에 빠지는 사람이 되죠.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지않고 여러번 권하는 걸 미덕으로 생각하여 뭔가를 거절할때 굉장이 힘들때가 많습니다. 다양한 생각과 의견이 묵살되는 문화이기도 하고요. 뭔가의 부조리에 대해 의견을 내면 유별난 사람으로 찍히는 것 같고요. 다행히 대부분의 성도분들은 이런 저를 받아들이시고 따뜻히 대해 주시지만 견디기 힘든 점은 저같은 사람은 교회에서 품어야 하는 특별한 사람, 우리가 사랑으로 대해야 하는 사람으로 치부되는 것 같은 것입니다. 저는 그냥 일반 성도이고 싶은데 저의 저 됨으로 특별관리대상(?) 처럼 되는 것이 굉장히 싫습니다. 아마 개인적인 성향이신 분들은 이런 이유로 교회를 떠나시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 (다른 분이 언급하신 “자유롭게 신앙생활하는”)

    관련된 다른 이유는 (저는 사실 이게 더 큰 이유입니다) 교회에서 비본질적인 것들에 대해 가르칠때 설교자의 개인적 믿음을 진리인양 설교하는 것 때문입니다. 사실 신앙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일 수 밖에 없을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구약의 모습처럼 권위와 심판자로, 어떤 사람은 예수님처럼 친구와도 같은 모습으로 만나겠지요. 어떤 교회는 하나님은 이미 필요한 모든 계시를 성경에 주셨으므로 직접 음성으로 알려주시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가르치고 다른 교회는 오늘 펜이 없어졌는데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어디 있는지 알려주셔서 찾았다고 하나님은 항상 말씀하신다고 고백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예정론을 주장하고 어떤 교회는 자유의지를 중요시 여기죠. 사실 이런 비본질적일 수도 있는 문제들은 구원이나 하나님을 만나는데 의미가 없을수도 있으나 사실 신앙활동이나 신앙생활에 크게 영향을 주는 것은 오히려 이런 것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는 교단의 교리나 목회자의 개인 신앙에 따르게 되는데 거기까지는 좋다고 해도 다른 의견들은 다 틀리고 이것이 오직 진리인양 설교되어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어렸을때 한 교단의 교리만 들으며 자라다가 다른 견해도 있고 어느 것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는걸 알았을때 교회에 상당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성도들의 정보 습득력이나 신앙의 수준도 높아졌는데 다양한 신앙의 모습을 수용하지 못하고 교단이나 교회에서 정한 한가지 신앙의 모습만이 옳다고 가르칠때 굉장히 받아들이기 힘듬을 느낍니다. 지금 다니는 교회는 보수적인 장로 교회인데… 비본질적인것에서 거의 율법주의인것처럼 숨이 막힙니다. 물론 성도는 신앙의 자유가 있지만 교회 전체적인 분위기에 따라가지 못하면 위의 첫번째와 같은 문제에 다다르게 되죠. 혼자만 겉도는… 그래서 이 페이지에서 나온 다양한 의견들이 너무나 좋습니다. 각자의 생각들이 있지만 누구도 푸시하지 않고 의견을 나누는… 교회안은 질서가 있어야 하니 의견 분분하는 것 보단 진리가 아닐수 있지만 한가지 교리를 정해 밀고 나가는 것이 효율적일 수도 있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이런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원론적으로는 저는 현재 교회의 제도는 성경에서 말해졌고 교회에 속해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잠시 기성교회를 떠나 몸과 영혼을 추스리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섬김과 교회 공동체라는 주님의 명령을 잠시 이행하지 못하겠지만 힘들게 계속해서 하는 것보단 하나님과 조용히 개인적으로 만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회복이 되면 다시 교회로 돌아가겠지요. 저는 제가 가나안 성도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해봤는데 오히려 자유함을 느끼는 부분도 있습니다. 두서없이 쓴 글이지만 저의 예가 다른분들께 도움이 될까하여 남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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